후기

제목[문학] <테드 창 -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01.14 발제문2020-01-14 09:2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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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였다. 2000년 12월 25일. 밀레니엄 크리스마스라며 좀 떠들썩했는데, 나는 친구와 단 둘이 학교 기숙사 방에 처박혀 있었다. 학기가 끝나 다들 집으로 돌아가고 캠퍼스는 죽은 듯 조용했다. 말 그대로 '고요한 밤'. 그날 우리는 별 것 아닌 것으로 밤을 새웠다. 저마다 컴퓨터에 <삼국지> 게임을 붙잡고 천하통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게임의 해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상 세계가 선물 해준 기묘한 충족감을 생각해본다. <대항해시대>가 없었다면 나는 세계를 다르게 보았을 것이다. <삼국지> 시리즈가 없었다면 지난 가을 뤄양과 쉬창에 가서 조조와 관우의 흔적을 훑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기묘한 성취감과 보상, 거기에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까지. 


마음껏 실패해도 좋은 자유를 가져봅시다. 실패해도 멈추지 말고 다시 도전해봅시다. 

성장하는 짜릿함을 이기는 즐거움을 알아갑시다. 이곳은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한 플레이 그라운드, 

플레이를 멈추지 마세요. 즐거움을 플레이 하세요. '구글 플레이'


1.


플랫폼의 변화와 네트워크 세계의 확장은 삶의 양식을 바꾼 것은 물론 세계를 다르게 보게 만든다. 80-90년대 가상현실이나 인공지능을 다룬 작품을 보면 태반이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가상세계에 매몰되어 현실을 잊고 살 것이라는 둥,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는 둥. 2020년(!)이 되었지만 그런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인간은 달라진 세계에 생각보다 잘 적응하며 살고 있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뉴로블래스트라는 개놈 엔진을 탑재한 '디지언트'에 얽힌 이야기이다. 쉽게 말해 일종의 게임 개발에서 런칭, 서비스 종료 이후까지 다룬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거 딥러닝이 탑재된 다마고치 같은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노렸는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에서 말하는 '소프트웨어 객체(Object)'를 가리키는 디지언트는 디지몬을 떠올리게 한다. 다마고치에서 디지몬이 나왔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특정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디지털 펫을 수집하고 키우는 게임. 최근 이런 게임의 최전선에는 포켓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AR, 증강현실을 도입하여 크게 유행을 탔다. 너도나도 포켓몬을 잡으러 길거리를 헤맸고, 덕분에 속초는 포켓몬의 성지(!)처럼 유명세를 타곤 했다. 문제는 이 게임, 소프트웨어들이 '주기'를 갖는다는 점. 새로운 버전이 나오면 이전 버전의 게임은 잊히기 마련이다. 다행히 포켓몬은 새로운 버전의 게임 엔진으로 자신이 키우던 포켓몬을 전송할 수 있었다. 즉 게임 엔진이 달라지더라도 포켓몬을 잃는 일이 없다는 것. 그러나 최근 발매된 버전에서는 일부 포켓몬이 삭제되고 말았다. 하여 애지중지 포켓몬을 '키우던' 게이머에게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낡은 세계에 머물던가, 자신이 키우던 캐릭터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던가.


소설도 비슷한 상황을 맞는다. 그러나 하나 더 문제가 있다. 게놈 엔진 덕택에 디지언트가 어느 정도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주인공 애나가 취업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장류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여 디지언트를 육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까닭이다. '원숭이의 매력을 맘껏 즐기세요. 똥은 던지지 않아요.(104)' 헌데, 그 매력이 '원숭이'를 능가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똑똑한 디지털 영장류는 스스로 어느 정도 학습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 능력을 가지고 있어 인간들과 대화하는 것도 가능하다. 기대보다 더 매력적인 존재가 탄생한 것. 디지언트는 더 이상 '소프트웨어 객체'로 머물지 않는다. 



2.  


회사가 문을 닫아도, 뉴로블래스트를 구동할 수 있는 엔진이 사라지더라도 소설 속 인물들은 디지언트를 버릴 수 없다. 애나에게 잭스는, 데릭에게 마르코와 폴로는 애지중지 '육성'한 소프트웨어 속 객체가 아니다. 그렇다고 반려 동물과 같이 제한된 관계의 대상도 아니다. 오히려 그 이상이다. 마치 인간과도 같은 존재로, 애나와 데릭에게 이들은 마치 자식과도 같다. 실제로 이 둘은 저마다 파트너가 있지만 아이를 갖지 않는다.


소설을 읽으며 내가 '중지'시킨 수많은 게임 속의 캐릭터를 생각했다. 애지중지 키우며 들였던 수많은 시간, 알게 모르게 쏟아부은 돈, 게다가 애정까지. 그러나 지금은 다 옛것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일부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디지언트를 중지시켰던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한편으로는 지금 우리 집 식구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네 고양이를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반려 동물에 대해 큰 환상을 가지고 있다. 삶의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태반을 동물과 함께 살아본 경험으로, 그건 터무니없는 기대라 생각한다. 늘 관계는 제한적이다. 우리는 서로의 감정과 상태에 그렇게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제한된 관계는 제한된 책임만 요구할 뿐이다. 그래서 다행이다.


소설은 소프트웨어 객체와의 또 다른 관계성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다른 작품과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기계와 인간의 애정 혹은 사랑 따위로 끝났겠지. 소설은 윤리적인 문제를 건드린다. 뉴로블래스트를 구동할 수 있는 엔진이 사라지자 디지언트의 세계가 급속히 축소된다. 사설 서버를 이용하기는 하나 다수의 유저와 디지언트가 사라진 곳은 '행성 규모의 고스트 타운'(185)에 불과했다. 아니, 행성보다 더 커다란 세계일 것이다. 종말 뒤에 남겨진 디지언트를 어떻게 해야 할까? 


애나와 데릭이 디지언트를 위한 새로운 세계, 뉴로블래스트를 새로운 엔진에 이식하려고 애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록 디지털 객체이기는 하지만 생명을 가진 존재이기에 그렇다. 환경이 사라졌고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파괴되었다. 마치 정글을 잃은 코끼리처럼. 실제로 주인공은 기금 마련을 위해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위한 운동가들과 접촉하기도 했다. 


새로운 엔진에 뉴로블래스트를 이식할 엄청난 비용을 대기 위해 골몰하던 중 새로운 제의를 받는다. 디지언트를 섹스돌로 개발하려는 이가 나타난 것이다. 디지언트가 섹스돌이 되다니!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니 제안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제안자는 '비독점적 사용권'을 요구할 뿐이다. 복제물을 개발하고 연구하겠다는 것. 한편 디지언트의 의사에 반하는 실험이나 연구도 하지 않겠단다. 게다가 인간의 대체물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매력적이고, 다정하고, 진정으로 섹스를 하고 싶어하는 비인간 파트너'(210)가 목표이다. 어쩌면 디지언트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성이 탄생하지 않을까? 그래서 제안자는 담대하게도 '성의 프론티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디지언트가 나서서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면 어떨까? 마르코는 데릭에게 제안을 수용할 의사를 밝힌다. '법인法人', 사회적 존재가 되는 것이 마르코의 소망이기도 했다. 마르코는 데릭이 염려하는 일들을 쿨하게 넘긴다. 현재 자신의 기호를 만든 것도 초기 회사의 개발 방향 때문 아니었나? 또 다른 개발사가 자신을 바꾼다 해서, 특정한 방향으로 자신을 변화한다 해서 나쁠 게 무엇있겠는가? 게다가 자신을 복제해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소설은 두 선택을 보여준다. 데릭은 마르코에게 설득당해 제안을 수용하기로 한다. 그러나 애나는 더 많은 시간을 잭스와 보내기로 한다. 더 성숙한 조재로 잭스를 키우기 위해. 과연 누구의 선택이 옳을까? 소설은 애나의 말로 끝난다. "놀이 시간은 끝났어, 잭스. 이제 숙제 헤야지."(248) 마치 아이를 부르는 엄마처럼. 그렇게 '보살핌'으로 윤리는 완성된 것일까? 데릭의 질문은 이렇다. '마르코를 존중하고 싶다면 그를 인간처럼 대해야 할까, 아니면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까?'(241) 어쩌면 인간이 아닌 낯선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윤리의 시작은 아닐지 소설은 묻는다. 일찍이 제안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개방적이고 정직하게 그 사실을 바라보고, 디지언트를 인간이라고 여기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210) 


컴퓨터와 스마트폰, 인터넷과 게임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다. 소설은 먼 미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현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이 끝나며 제목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애나의 잭스는 언제까지 살까? 데릭의 마르코는? 어쩌면 생각보다 이들의 삶은 일찍 끝날 수도 있다. 새로운 엔진 '리얼 스페이스'도 언제 서비스를 종료할지 모르니. 그러나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윤리를 학습하며 또 다른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결국 생애 주기란 특정한 삶의 양식 안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니 '생애 주기'란 낡은 윤리의 사이클을 재는 척도로서만 필요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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