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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포스트휴먼] 긍정의 욕망과 즐거운 위반2021-07-14 08: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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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1장 여성 되기 또는 재고된 성차

 

들뢰즈가 말한 유목적 주체의 형상을 하나의 과정으로 바라보며, 그 과정을 지도로 그려가려는 로지 브라이도티의 작업은 여성 되기, 페미니즘에서 시작된다. 페미니즘은 그 자체로 차이에서 시작되는 사유이며, 실천이다. 물론 페미니즘이 사유하는 차이의 층위는 다양하다. 차이는 성차, 혹은 개별적 주체들의 차이로 나타날 수 있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대문자 여성으로서의 주체를 포스트 대문자 여성으로 변형시키면서, 성차를 중요하게 여긴다. 대안적 페미니스트 주체성은 타인을 은유화하기보다 자기 책임감을 환기시키는 방향으로 형상화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자본주의 내에서 급증하는 차이들을 살펴보면서, 들뢰즈의 말대로 권력을 변화시키는 차이를 감별해내려고 한다. 더욱 복잡해진 차원의 차이들은 주체와 주체가 속한 사회관계의 구조들을 함께 변화시킨다. 주체성을 구성하기 위해 젠더, 인종, 계급, 세대에 걸쳐, 거시적 차원과 미시적 차원 모두에서 더 많은 복잡성이 필요하다. 서구 백인 남성들이 탈주체에 골몰할 때, 식민화된 젠더, 인종, 계급, 세대에 속한 이들은 일단 주체를 구성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복잡성 속에서 차이를 전제한 채 이미 포스트모던한 주체로 구성(혹은 변형)된다.

 

철학적 유물론에서 주체성은 신체적 구조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주체성과 신체의 연결은 섹슈얼리티와 성차의 문제를 부각한다. 이런 유물론의 전통이 68혁명과 그 이후를 이끈 급진적인 권력 비판과 인본주의적 주체의 해체로 연결된다. 정신분석학도 주체를 합리성과 분리하면서 급격하게 해체한다. 데카르트의 인식주체 코기토는 욕망으로 대체된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새로운 주체를 표현한다. 욕망을 내세우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들뢰즈는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면서, 욕망을 다르게 바라보자고 주장한다.

 

신체는 우리의 복잡한 주체성을 여러 층위로 표현한다. 우리는 신체적으로 동물이면서 기계이다. 이 사실은 인본주의적 사고의 경계들을 무력화시킨다. 주체가 되는 과정은 문화적 조정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권력의 부정적 측면(포테스타스)과 긍정적 측면(포텐티아)이 함께한다. 주체성은 전혀 본질적인 무엇이 아니며, 문법적인 를 만드는 허구적 통일 속에서 여러 단계의 허구적 안무를 통해 사회적으로 운영 가능한 자아를 만드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의식과 무의식 모두가 작용한다. 주체는 되기라는 필수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을 통해서 구성된다.

 

들뢰즈의 주체성에서 욕망은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이 욕망은 리비도인 동시에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로지 브라이도티가 말하는 페미니즘 주체도 이런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 그러니까 성차화된다. 페미니스트 주체는 불평등의 정치의식 속에서 다양성과 차이를 긍정하고 대안적인 가치를 주장하면서 구성된다. 이 주체는 리좀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상호연결을 위한 다중의 능력을 가진다. 주체와 마찬가지로 여성성도 본질적이지 않으며 잠재적 실재로 육체를 통해 체현된다. 그러니까 성차를 통해 나타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여성 주체의 기원에서 물질성을 발견한다. 물질적 신체성은 성차 페미니즘에서 중요하다. 들뢰즈에게 영향을 받은 이리가레의 주장을 통해 성차 페미니즘의 주요 견해들이 소개된다. 이리가레는 모성적 상상계에 몰입하면서 집단적으로 힘을 기르려는 잠재적 여성성을 탐구한다. 모성애가 여성을 남성성에 복종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모성을 통해 여성들이 팔루스중심주의의 경계를 넘어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과거의 페미니즘 주체가 재현 불가능성으로 환원된다면, ‘잠재적 여성성은 모방을 통해 재점유된다.

 

로지 브라이도티에게 팔루스중심주의를 비판하는 특수한 성 전략인 모방은, 해체의 긍정적인 형태이다. 이런 관점에서 여성들이 여성성을 말하고 실천하는 과정은 되기의 능동적 과정이다. 물론 체현된 자아의 복잡성도 고려해야 한다. 대문자 여성은 실재하는 여성들과 대립하기도 하고 공모하기도 한다. 대문자 여성에 대한 분석과 개별 경험을 구분하는 일은 페미니스트가 주체성을 재정의할 수 있게 해 준다. 로지 브라이도티에게 여성 정체성은 남성의 타자로 구성되지 않는다. 여성들 내부의 차이가 성차의 범주를 구성하며, 여성 안에서 여성 정체성이 구성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성차 페미니즘을 통해 본질적인 정체성 자체를 거부하며, 변증법을 통해 주체가 구성된다는 논리도 거부한다. 성차는 주체를 구성하는 다중적 차이들의 작용을 재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성으로서 한 사람이 말할 때, 그는 정치적으로 하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말한다. (소수적) 정체성을 인정하는 일은 해방이라는 과제와 연결된다. 성차 페미니즘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오해된 방식으로 나름의 맥락 속에서 전해진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모니크 위티그와 주디스 버틀러를 중심으로 그 맥락을 탐구한다.

 

미국에서 성차가 섹스/젠더 패러다임으로 이해되면서, 게일 루빈이나 주디스 버틀러 같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은 성차를 이성애적 매트릭스를 강화하는 권력관계로 보고 적대적으로 반응했다. 성차가 강조하는 물질적 신체성이 받아들여지기에는 당시 미국 페미니즘의 여성 신체에 대한 보수적 경향이 컸다. 미국의 주류 페미니즘이 신체를 보수적으로 바라볼 때, 섹스/젠더가 아닌 섹슈얼리티를 주요 의제로 내세운 퀴어이론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들에게는 여성성보다 동성애에 대한 억압의 구조를 밝히는 일이 더 중요했다.

 

위티그는 여성이라는 범주를 아예 레즈비언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했다. 이리가레가 주체를 남성으로 보고 여성적 글쓰기를 통해 대안적 상징계를 탐색하자고 했다면, 위티그는 여성이 주체를 재점유할 수 있다고 보고 적극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라고 종용한다. 버틀러는 젠더를 수행성으로 파악하면서 여성범주 자체가 이성애 규범성을 강제한다고 이해한다. 젠더이원론을 거부하고 이성애중심 규범성에 반대하고자 하는 퀴어이론가들이 보인 태도는 분명히 전복적이었다. 문제는 이들의 실천이 오히려 규범적 섹슈얼리티의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점이었다.

 

90년대 페미니즘에서 정신분석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분석이 욕망을 결핍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적대적이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결핍보다 주체 구성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무의식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정신분석을 중요하게 본다. 무의식이 존재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보다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무의식을 어떻게 대하느냐이다. 무의식이 추동하는 주체화는 그 자체로 비통일적 주체를 구성한다. 비통일적 정체성은 모순과 역설이라는 내부의 불협화음을 통해 규범에 저항한다. 욕망이 정치적이라면, 정치는 욕망에서 시작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계속해서 무의식의 주체로서 우리가 여성이라는 기표를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로지 브라이도티가 보기에, 버틀러는 레즈비언이 팔루스를 전유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의지적 주체에 대한 고전적 믿음으로 돌아간다. 젠더 트러블이 성적 전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서글픈 일이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더욱 이성애적 분위기에서 성차를 강조한다. 출산이라는 이성애적 흔적을 통해 태어난 우리는 애초부터 성차라는 차이를 품고 태어난 존재이다. 우리의 신체가 바로 동일자에 대항하는 비일자를 긍정하는 차이이다.

 

팔루스를 전유하는 문제에서도 로지 브라이도티는 부정적 태도를 드러낸다. 팔루스는 사회계약의 핵심에 부계의 은유를 기록하는 것으로, 변형되거나 전이되지 않는다. 여성성과 동성애도 버틀러의 견해처럼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버틀러를 비롯한 몇몇 퀴어이론가에게는 여성성을 의도적으로 삭제하려는 여성공포증이 발견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퀴어이론이 급진적이고 위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성애를 곧바로 페니스에 대한 욕망이나 사회적 규범을 추구하는 보수적 행위로 연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로지 브라이도티가 퀴어이론에서 찾는 가장 큰 문제는 우울증이다. 애도의 대상과 언어를 잃어버린 소수자의 우울증은 죽음과 상실에 과도하게 몰입한다. 정신분석이 죽음과 상실뿐 아니라 기쁨과 만족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음에도, 이들은 죽음과 상실만을 바라본다. 여기서 로지 브라이도티는 쾌락이 하는 역할에 주목하자고 주장한다. 쾌락은 위반적인 동시에 경계를 무너뜨리는 쾌락이며, 주체를 상상계에 연결한다. 결핍보다는 쾌락이 욕망을 추구한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쾌락에 충실하며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욕망은 즐거움을 통해 주체를 구성한다. 더 즐겁기 위해, 더 힘을 기르기 위해 우리는 욕망한다. 욕망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전복하고 위반하는 일도 상실이나 애도를 통해 일어나지 않는다. 전략적으로 주체를 구성하는 일은 위반인 동시에 즐거운 일이다. 위티그나 버틀러의 작업 역시 그런 긍정의 욕망과 즐거운 위반의 되기과정이었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여성 되기의 성애론을 보다 더 활력 넘치는 관능성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욕망을 결핍과 부정성 대신 충만함과 풍부함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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