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잡담] 잡담을 위한 짧은 메모2021-01-21 21: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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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해제 - '팬데믹 시대 인간의 조건'


팬데믹 시대에 국가의 역할, 개인의 자유, 경제 활동, 봉쇄와 방역의 조건, 극도로 성별화되고 계급화된 '집'의 의미, 정치 지도자나 자본가들이 '결정할 수밖에 없는'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진단, 인류의 미래에 대한 구상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이 요청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기의 공간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기록이라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구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추상적인 논의로는 이 시대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12쪽)




프롤로그 - 봉쇄 속의 빛


일기에는 필연적으로 '내'가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가급적 그런 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자제했다. 내가 쓴 건 '나'의 일기를 넘어선, '내가 우한에서 지내며 쓴' 일기였고, 이는 단순히 개인의 일기가 아닌, 일기라는 방식으로 진행한 공적서사였다. (17쪽)




1월 23일

소금을 엄청 사 대는 남자를 보고 누군가 물었다. "소금 그렇게 많이 사서 뭐 하시게요?" 그 사람이 대답했다. "봉쇄가 1년이나 이어지면 어쩌나요!" (31쪽)


1월 24일

한 번 나갔다 오니 이 세상이 아직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생존 팁도 배울 수 있었다. 이 전쟁에서 사람들 대부분은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다. 시스템이 보장해 주는 게 없다. 독거노인과 장애인처럼 상대적으로 더 취약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상대적으로 더 젊은 편인 나로서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36쪽)


1월 25일

내 페미니스트 친구들은 늘 단순히 어떤 사람의 언행만 보는 게 아니라. 여성이 처한 환경을 본다. 개인을 때려잡는 쪽이 훨씬 더 쉬운 법이지만, 우리가 사회 구조 속에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가령 내가 지금 느끼는 절망감은 그 책임을 어느 특정 개인에게 돌릴 수 없는, 부패한 사회 제도와 구조에 대한 실망이다. 자원과 권력을 가진 정부가 뭔가 해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이니까. (41쪽)
아마 지금은 병에 걸린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되는 건강염려증이 가장 큰 심리적 장애물일 것이다. (43쪽) 
가 본적 없는 길이라, 뜬금없이 내 세계가 조금은 더 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46쪽)



1월 26일

단지를 나선 순간, 스산한 느낌이 얼굴을 덮쳤다. 길 양쪽의 가게들이 전부 닫혀 있었다. 눈에 띈 사람은 거리 환경미화원 한 사람, 경비원 한 사람, 행인 한 사람, 이렇게 세 명뿐이었다. 나는 속으로 오늘 마주치는 사람 수를 세기 시작했다. (50쪽)


1월 27일

살면서 이렇게 나 자신에게 집중해 본 적이 없다. 지금은 많고도 많은 세세한 생각의 갈피를 순식간에 흩어 버리기가 너무 힘들다. 평상시에는 자신의 부정적 정서를 조절하고 해소하거나, 그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이 아주 많다. 그런데 봉쇄 와중에는 그러기가 너무 힘들다. 예전에는 모임, 게임, 흥미와 취미 활동 등 숱하게 많은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 힘들다. 

거대하고 음울한 그림자가 우리 삶을 점거해 버렸다.(57쪽)
나로서는 일관된 마음으로 일기 전체를 써 내려갈 방법이 없다. 이렇게 터무니없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터무니없음을 하나하나 기록해 나가는 것뿐이다. (64쪽)


1월 30일

무력감을 없애는 게 정말 힘들다.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력감을 없애는 게 아니라 무력감과 공존하는 방법을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83쪽)




무력감과 공존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가슴에 콕 박힌다. 


나 역시 2020년 세워놓은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 계획이 어그러진 것은 물론, 이런저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몸을 사려야 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확진자 수에 맞춰 삶이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예외 상태로 살다 보니 계획을 세우는 일을 주저하게 된다. 될 대로 되라지라는 식의 마음도 있다.


저자는 봉쇄된 도시, 우한에서 산책을 하고 밥을 지어먹으며 운동을 하고 사람들과 화상통화를 한다. 도시는 봉쇄되었으나 삶이 고립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먹었는지를 기록하는 일은 건강한 삶을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먹고, 식재료를 사고, 산책을 하면서 저자는 우한의 일상을 보여준다. 낯설고 먼 이야기였지만 이제 우리 일상의 일부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규칙적으로 다시 산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3월, 코로나로 전국이 얼어붙어 있을 때 봄바람을 맞으러 남산에 오르곤 했다. 건강하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무력감에 저항하기 위해서기도 했고, 전염병과 싸우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더불어 기록하기를 힘써야지. 길을 잃었고 표류하고 있다. 목표가 없으니 행적을 남겨야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헤아려볼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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