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레드 마오] 7장 혁명군 지도자 & 8장 내전과 숙청 (1927~1932)2019-04-18 09:2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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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실넘실


어지럽다. 고문古文에 경이원지敬而遠之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공경하여 멀리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때로는 원이경지遠而敬之하는 경우도 있겠다. 적당히 멀어야 대상을 선망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법이다. 멀리서 매력적으로 느끼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실망한 경우가 있는지. 가까이 세심하게 바라보면, 멀리서 볼 때에는 보이지 않던 흠, 잡티, 주름, 모순, 거짓, 기만 등을 보다 생생하게 볼 수 있는 법이다. 여튼 현재 나에게는 마오가 그렇다. 조금 멀리서 볼 때는 호기심이 드는 인물이었으나 세밀하게 살펴보니 질리는 인물이다.

 

5~6장을 읽으며 저자의 태도가 흥미로웠다. 마오의 투쟁을, 중국 공산당의 수립과 발전을 이른바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과하게 말하면 이들은 열심히 혁명에 투신하고 있으나 그것이 맑스의 혹은 공산주의의 혁명일 필요가 있을까는 의문이었다. 여러 혁명가운데 맑시즘을, 공산주의를 선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념보다는 권력이며, 이론보다는 현실이다.


보잘 것 없는 중국공산당의 생존 전략, 국민당과의 연합 노선이 실패한 이후 이들은 한동안 또 다른 진통을 겪는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이 기간 논쟁의 주제가 되었던 것은 '혁명의 방법과 혁명의 적기'에 관한 문제였다. 이를 두고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인물은 넷, 취추바이와 리리싼과 저우언라이 그리고 마오쩌둥이었다. 수십년 뒤의 역사를 아는 우리는 앞의 둘과 뒤의 둘의 삶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로 도래할 혁명을 위해 도시에서 봉기를 기도한 이들은 30년 좌우를 거치며 힘을 잃는다. 결과론적이지만 이를 '모험주의'라 불러도 좋으리라. 결과론적이라 함은 이 말이 쌍방이 서로를, 나아가 누구든 지목하여 말할 수 있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앞에서 한 때의 동지(?)였던 취추바이와 마오의 입장이 서로 엇갈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따져보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후난성 징강산에 있는 마오와 상하이에 있는 취추바이의 입장이 같을 수 있었을까. 공산당 중앙과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는 전장은 서로 온도가 다르기 마련이다. 한편 재미있게도 이 차이 속에서 마오와 저우언라이의 대립이 조금씩 엿보이고 있다. 저자의 서술 때문인지, 아니면 실제로 이 둘이 실제로 대립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직접적인 갈등이 첨예하게 벌어지는 것은 아마 더 뒤로 미루어야 할 것이다.


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마오와 주더와의 대립이다. 마오의 무장 노선에 대한 평가가 서로 엇갈리는 가운데서 마오는 중요한 동지(!)를 얻는다. 바로 주더 그리고 펑더화이. 이 가운데서도 주더와의 갈등이 재미있다. 도식적으로 접근한다면 중앙은 노동자 중심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봉기를 중시하며 이를 통해 근거지를 마련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보면 마오는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지역에 머물지 않고 유격대의 유연성을 강조한 인물로 조망되곤 한다. 그러나 주더와의 관계에서 보면 마오는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끊임없이 골몰했으나 주더는 보다 유연한 전쟁을 수행하는 것에 익숙했던 인물이었다. 


"갈등의 일부 원인은 비록 두 세력이 1년 전 하나로 합쳐지기는 했지만 역사가 다르다는 데 있었다. 마오의 군대는 징강산 근거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군사적 기술을 갖추었다. 반면 주더의 군대는 항상 이동하는 부대였다."(402) 


어쨌든 두 모순, 근거지를 중심으로 한 정주의 특성과 유격대적 유동성이 합쳐져 홍군의 뿌리가 된다. 언뜻 보면 합쳐질 수 없는 이 두가지 요소를 하나의 그릇, 홍군의 구성에 넣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중국적 특성'의 일면이라는 점은 강조해야 할 듯싶다. 누군가 '무질서의 지배자'라는 모순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처럼, 중국 혁명은 모순적인 모습을 상당부분 가지고 있다. 한쪽에서 보면 혁명의 과정이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이는 권력 투쟁의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마오의 생애를 볼 수록, 중국 혁명의 과정을 세밀하게 관찰할 수록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상호 모순되는 것이 한데 엉켜 있으니.


"규울과 자유, 강압과 자발 사이의 충돌에 관해 마오는 '대립의 통일' 관념을 사용하여 충돌은 결국 통일을 이룰 것이라는 논리를 세웠다. … 실제로는 항상 통일보다 충돌이 발생했다. 1930년대 초 장시성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마오가 자신의 인생에서 이따금씩 추진한 숙청과 정풍운동이 그랬다."(474)


대립이 통일을 낳는다면 그 통일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 그것이 대립의 해소는 아닐 것이다. 적당히 둘을 섞는 것도 아닐 테다. 도리어 거꾸로 어떤 새로운 현실에 압도당함이 아닐까? 30년을 좌우로한 마오의 행보를 보면 '현실'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멀리는 코민테른의 지도가 있고, 가까이 - 그래도 소식을 주고 받는데 몇 달이 걸리도록 멀지만 - 상하이의 당 중앙이 있다. 이들의 기획과 판단과 달리 마오의 '노선'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징강산에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중앙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소기의 성과를 얻어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마오의 삶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과정이었고, 이를 최우선으로 삼은 까닭에 중앙과 당의 '지도'를 가볍게 무시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독자적인 생존노선에 그치지 않고, 저자가 언급하듯 몇 번이나 내쳐지는 상황속에서도 결국 중앙으로 치고 올라가는 것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처음에는 그가 당대의 다른 인물이 보지 못하는 명철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도시의 노동자가 아닌 농민, 정치가 아닌 폭력, 전선이 아닌 기동과 유격. 그러나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면 이는 그의 판단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놓인 '현실적 상황'이었다. 어쩌면 그는 그저 운이 좋은 인물은 아니었을까? 열심히 생존을, 현실 위에서의 길 - 아주 좁은 길을 모색했는데 그게 다행히 중국 혁명이라 불리는 커다란 세계로 가는 길목이었다는 뒤늦은 발견. 


그의 삶을 보면서 부단히도 발견하는 것이지만, 현실이 이념을, 상황이 인식을 압도하고 있다. 이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꽤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이런 문제를 마주하면 어느 책의 서술이 떠오르곤 한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은 이렇다. 현실이 이론을 압도하고 있다. 21세기 중국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거꾸로 이는 중국의 20세기 역사를 두고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저자의 서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당대의 어깨를 나란히 한 인물과 비교할 때 마오는 지독히도 현실적이며,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고, 독단적인 권력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하다는 법칙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마오, 그리고 중국 혁명의 기묘한 상황들. 그러나 여기에 무엇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마오에게 이론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당시의 숙청 과정에 신중함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중국 공산당에 이념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반대로 모든 것이 넘치고 있다. 마오에게는 이론이 부족하기보다 기민한 행동이 넘치고 있으며, 숙청과 갈등에는 신중함이 부족하기보다는 광기와 폭력이 넘치고 있다. 따라서 마오와 중국 혁명, 나아가 중국을 판단하는 질문도 재고 되어야 한다. 이들에게 이념이 부족한가? 


맑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중국은 독일에 맑스 동상을 선물했다. 이를 두고 일부는 비웃었다. 이들은 아마도 중국이, 그것이 시진핑이던 마오던 중국 민중이던 어떤 학자던 상관없이 맑스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중국에는 맑시즘이 없다고. 일면 이 말은 옳다. 뭔가 부족하겠지. 그러나 거꾸로 뭔가 넘실넘실 넘쳐 흐르고 있다면, 그 결과로 그런 선물 증정식을 낳았다면 어찌할 건가? 부족함이 문제인가 넘치는 것이 문제인가? 가능성의 차원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혁명은 과연 무엇으로 설명하고 평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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