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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리딩 R&D] 행위성과 책임의 문제 (제인 베넷 - 생동하는 물질 2장 발제)2022-09-14 19: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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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생동하는 물질 2장 발제.hwp (80KB)

생동하는 물질2장 배치들의 행위성

 

이 책의 1장에서 제인 베넷은 사물-권력을 강조했다. 사물-권력이라는 용어는 세계를 다른 감각으로 바라보게 만들지만 몇 가지 단점을 가진다. 먼저 물질의 안정성이나 사물성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는 개체주의적 관점 때문에 집합적 이해가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제인 베넷은 행위소가 단독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행위성은 수많은 신체와 힘들의 상호작용인 간섭, 협력, 상호작용에 의존한다. (76)

 

제인 베넷은 이 행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2003년 북아메리카의 정전 사태를 예로 들면서 스피노자의 정동적신체 개념과 들뢰즈-가타리의 배치개념을 활용한다. 스피노자에게 신체는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신체를 변용시키거나 변용되는 존재이다. 개별 신체의 변용과 상태를 의미하는 정서는 유사한 신체에도 전이되어 정동의 방식으로 작용한다. 스피노자에게 신체의 역량은 행위하는 힘이자 행위를 견뎌내는 힘이기도 하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에서 모든 사물은 외부의 원인으로 생겨나며, 끊임없이 외부의 영향을 받으며 존재한다. 모든 사물은 자기 자신이 원인인 실체(신 즉 자연)가 변형된 양태이다. 외부에서 기원한 양태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집합된 형태로 존재한다. 더 다양한 기원과 다양한 모양의 집합은 곧 더 큰 역량을 의미한다. 코나투스(욕망, 노력, 충동, 자기-보존)는 양태들이 자신을 유지하거나 변형하려는 모든 힘과 노력을 의미한다.

 

결국 모든 양태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변화를 추구한다. 양태들의 지속적인 가변성은 배치로 연결된다. 이질적인 배치는 신체와 정신의 역량을 향상시키면서 권력도 강화한다. 제인 베넷은 여기서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들뢰즈-가타리의 배치개념을 연결하여 행위성을 다시 규정하고자 한다. 이제 행위성의 효능은 개인이나 집단의 노력과 역량으로 이해되기보다 존재론적으로 이질적인 장에 분배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배치는 여러 생동하는 물질들과 다양한 요소들을 일시적으로 묶은 것이며, 살아있고 진동하는 연합이다. 배치에 중심적인 지배자는 없으며, 배치의 힘은 배치를 구성하는 각각의 힘의 합이 아니다. 배치를 통해 생성되는 효과는 우연적이고 유한하며 창발적이다. 집단적이고 개방되어있는 배치의 힘을 예상하기는 어렵다. 배치에는 인간과 사회적 구성물뿐 아니라 비인간 요소들도 포함된다. 인간중심적 사고로는 배치를 이해하기 어렵다.

 

제인 베넷은 배치의 행위성과 책임의 예로 2003년 북아메리카 정전 사태를 언급하며 몇 가지 행위소를 나열한다. 전기와 발전장치, 송전선, 인근 지역의 소규모 화재들, 전력 회사들과 전기 소비자들, 연방 에너지규제위원회들이 행위소로 언급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때는 대개 인간 주체의 의도나 능력, 책임만이 강조되기 쉽다. 제인 베넷은 특정한 인물이나 집단에 책임을 지우기 위해 물질의 행위성을 축소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87)

 

서구 역사에서 인간의 권력은 자율적인 의지나 책임과 연동되는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의지대로 행동한다는 전제에 따라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며, 여러 권한도 가진다. 인간의 행위성을 제한하는 개념도 있다. ‘구조가 그 예이다. ‘구조는 인간의 행위성을 부정하고 제한하며 수동적인 작용으로 이해된다. ‘구조는 인간의 행위성을 제한하지만, 사물의 힘을 다루지는 못한다. ‘구조안에서도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존재는 인간 주체뿐이기 때문이다. (94)

 

제인 베넷은 인간만이 능동적으로 행위한다는 오랜 믿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새로운 행위성을 주장하기 위해 효능, 궤적, 인과성이라는 개념을 활용한다. 먼저 효능은 의도라는 요인의 힘을 약화시킨다. 의도와 도덕적 주체를 연결하는 힘이 약해지면, 비인간 역시 효능을 통해 힘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궤적은 인간 중심의 목표 지향성이 아니라 방향성에서 자유로운 움직임 자체를 강조한다. 이 움직임은 목적이 아닌 배치의 충동에 가깝다. (100)

 

인과성은 사물의 관계를 작용적이 아닌 창발적으로, 선형이 아닌 프랙탈로 본다. 하나의 결과는 하나의 원인에 종속되지 않으며, 원인과 결과는 서로 순환한다. 창발하는 인과성에서 과정은 그 자체로 행위소이며, 행위 능력도 다양하다. 제인 베넷은 이를 원인과 결과를 같이 용해시키는 관점’(102)이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에는 인간 주체와 이 주체의 수단이거나 수동적인 대리자가 모두 포함된다.

 

제인 베넷이 자칫 관념적으로 다가오기 쉬운 물질의 행위성을 설명하면서 정전 사태를 예로 드는 서술방식은 매우 도발적이며 매력적인 시도이다. 제인 베넷이 말하는 행위성 개념으로 보면 어떤 사건이든, 오히려 중대하고 위험한 사건일수록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져야 할 주체가 불분명해진다. 한편 현실에서는 그렇게 중대하고 위험한 사건일수록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준 책임자를 가려내야 할 필요가 크게 제기된다. (109)

 

행위소의 집합성과 복잡한 행위성의 개념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다르게 보아야만 한다. 제인 베넷의 의도는 행위성의 책임 공방을 약화시키기보다 해로운 결과를 초래한 원인을 탐색할 범위를 확장하는 데 있다. 물론 제인 베넷의 의도가 현실의 배치 속에서 어떻게 읽힐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제인 베넷의 주장대로 분산된 행위성을 강조하면서 비난의 정치에 저항하고 인간-비인간 배치들의 권력을 강조할 필요에 크게 공감한다.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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