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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리딩 R&D] 물질을 에너지로 바꾸는 힘2023-01-25 19:5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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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E=mc2 3, 4부 발제.hwp (80.5KB)

E=mc²3부 유년 시절 & 4부 성년 시절

 

E=mc²이라는 공식은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를 보여준다. 질량은 에너지로 변환되며, 이 변환이 연쇄하여 일어날 때 질량을 가진 물질은 폭발적인 에너지로 변화한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사고실험을 통해 이 공식을 만들어냈다. 1930년대가 끝나기도 전에 E=mc²은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공식이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은 이 무기의 공개와 함께 끝이 났다. 1905년부터 1945년까지가 E=mc²의 유년과 성년에 해당한다.

 

안정된 상태에 있는 물질이 어떻게 순식간에 폭발적인 에너지로 변화할 수 있을까? 1890년대에 연구자들은 에너지 선을 내뿜은 금속 광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라듐을 여러 해 연구하던 마리 퀴리는 1898년 이 에너지 선에 방사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연 상태에서 라듐은 서서히 에너지로 변환되지만, 한꺼번에 많은 질량이 변환되도록 하면 발생하는 에너지도 커진다. 그러나 아직은 많은 과학자가 의 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그 시대의 뉴턴과 같은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20대 중반에 정규 교육과정 밖에서 당대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푸앵카레가 상대성 개념에 근접하기는 했지만, 세계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확장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이 책에서 중심 주제로 다루는 공식 E=mc²은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특수 상대성 이론의 일부분이다. 1909년 특허청을 떠나 교수가 된 아인슈타인은 1915년 통합된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다.

 

물질의 질량 변화를 가속하기 위해선 물질 내부에 관한 연구가 더 필요했다. 러더퍼드는 그동안 단단하다고 믿었던 원자가 실은 텅 비어있음을 밝혀냈다. 가이거계수기를 발명한 한스 가이거가 러더퍼드의 조수였다. 텅 비어있는 원자의 가운데에는 핵이라는 작은 덩어리가 있다. 핵 속에는 양전하를 띤 입자인 양성자와 전기적으로 중성인 중성자가 있다. 곧 중성자를 통해 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예측이 나왔다.

 

페르미는 중성자를 쏘아서 핵 속에 넣으려고 시도했다. 1934년에 빠른 중성자보다 느린 중성자가 유리하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1938년 유대인 여성 과학자 리제 마이트너가 연구를 진전시켰다. 핵 안에는 서로 밀어대는 양성자들이 있고, 이 양성자들을 한 덩어리로 묶는 강한 핵력도 존재한다. 양성자들 사이는 중성자로 가득 차 있는데,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균형이 유지되는 상황이라면 중성자를 집어넣어 이 균형을 깨뜨리는 일이 가능하다.

 

마이트너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 1938년 세계는 두 번째 세계대전을 예감하고 있었다. 유대인 과학자들은 미국 정부에 원자폭탄에 만들라고 계속 권유했지만 거절당하는 상황이었다. 독일 쪽에서는 하이젠베르크가 연구를 이끌며, 좀 더 일찍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중성자의 속도를 떨어뜨리기 위해 중수를 이용하기로 했다. 독일이 주변 국가를 점령해나가면서 우라늄과 중수 공급도 점점 원활해졌다.

 

다만 하이젠베르크는 공학자를 비롯한 아랫사람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다. 공학자들은 원자로에 넣을 우라늄이 공 모양일 때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하이젠베르크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또 영국이 독일에 점령당한 국가 사람들과 함께 반격을 준비했다. 영국은 두 차례 노르웨이의 중수 공장 폭파를 시도했고, 두 번째에 성공했다. 중수 공장이 재개되자 노르웨이인들은 중수를 운반하던 열차가 실린 배를 침몰시켜버렸다.

 

이렇게 하여 뒤늦게 출발한 미국이 만회할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 정부와 과학자들은 원자폭탄 개발에 회의적이고 소극적이었으며, 아이디어도 단순했다.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 과학자들은 뒤늦은 미국의 물리학 기반을 끌어올리면서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다. 원자폭탄 프로그램을 총괄한 레슬리 그로브스는 J. 로버트 오펜하이머에게 과학자들을 감독하게 했고, 이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오펜하이머는 겉으로는 완벽해 보였지만 자신감이 없었고, 사람들의 약점을 파악하거나 다루는 데 능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지 고민하다가 유명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을 공략했다. 미국과 영국의 폭약 전문가들, 폰 노이만과 파인만을 비롯한 많은 학자가 오펜하이머가 함께했다. 1943년에는 코펜하겐을 탈출한 닐스 보어까지 합류했다. 결국 오펜하이머가 속한 워싱턴 팀에서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오펜하이머의 팀은 우라늄을 더 강력한 플루토늄으로 만들고자 했다. 플루토늄은 너무 쉽게 폭발해서 문제였는데, E=mc²의 폭발력을 극대화하려면 모든 것을 정확하게 동시에 폭발시켜야 했다. 공을 폭약으로 감싸 안으로 밀려들어 빠르게 합쳐지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미국에서 연구가 계속되는 사이 1945년 하이젠베르크의 연구소는 연합군에게 발각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알프스로 도망쳐 연구를 계속하다가 미군에 체포되었다.

 

프로젝트를 성공시켰지만, 원자폭탄 공격이 가시화되었을 때 오펜하이머는 괴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군인이 아닌데다 좌익이었던 오펜하이머는 모든 정보에서 배제되고 감시를 당하는 처지였다. 원자폭탄 개발과 사용을 결정했으면서도 나중에 미국 정치인과 군인들은 원자폭탄이 불필요했다고 말했다. 원자폭탄이라는 무기를 최초로 사용한 국가가 미국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아이젠하워의 말, 192)

 

원자폭탄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수십 킬로그램의 정제된 우라늄이 공처럼 뭉쳐있을 수 없었다. 이 공 모양 정제된 우라늄 덩어리가 E=mc²의 거대한 폭발력을 인류에게 증명했다. 외부에서 핵을 뚫고 들어간 중성자가 균형을 깨뜨리면 양성자의 힘으로도 핵이 쪼개진다. 밀도 높은 우라늄의 연쇄 반응은 엄청난 속도로 질량을 에너지로 변환한다. 몇백분의 1초 만에 폭발이 끝나고, 태양 중심에서나 가능한 온도로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이것이 E=mc²의 위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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