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 행복한 감시국가 중국|| 공상으로도 초월하기 어려운2022-03-03 08: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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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으로도 초월하기 어려운

에레혼

 

장르문학에서 SF는 항상 불리한 입지에 있다. 공상 과학만큼 장단 맞추기 어려운 장르가 또 있을까? 대중들을 끌어 모으겠노라고 흥미로운 이야기에 주력하면, 과학적 요소에 대한 검증이 뒤따른다. 반대로 과학적으로 엄밀한 태도를 취한다면, 매니아들에게는 사랑을 받겠지만 비운의 명작 꼬리표가 붙기 마련이다. 장르물이 대중문화의 중심축으로 편입되었다고 하지만, SF는 여기서 예외인 듯하다. ‘장르 오타쿠’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좀비나 오컬트가 드라마, 영화 전방위적으로 활약하고 있는 현실을 보라. 이에 비하면 장르물 전통 강자 SF는 영화와 소설을 통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SF의 ‘상대적 침체’에 다각도로 접근해볼 수도 있다. OTT가 다른 플랫폼을 과대표하고 있기에, 공상 과학이 상대적으로 약세인 OTT의 상황을 여타 시장으로 일반화해서는 안된다. 혹은 조금 더 단순하게 생각해서, SF는 몰입해서 보는 컨텐츠이지 심심풀이로 보기 어렵다. 다시 말해 지금 시점이 SF의 호황기가 아닐 뿐, 언젠가 공상 과학 붐은 온다. (정말?)

혹은 SF가 기를 못펴는 듯 보이는 모습은, 현실이 콘텐츠를 압도하기 때문이 아닐까. 얼마 전 유튜브 쇼트 클립에서 2족 보행 로봇의 발전 과정을 본 적이 있다. 이전까지 2족 보행 로봇,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몇 걸음 떼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최근 등장한 로봇들은 달리기도 능숙하게 하고, 기둥에서 기둥으로 점프를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SF 콘텐츠는 과학 기술 발전의 양상을 실시간으로 목도할 수 있는 현실과 경쟁하는 셈이다.

기술 발전의 광풍이 휩쓸고 간 사회에서 SF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행복한 감시국가, 중국》을 세미나 도서로 선정하면서, 엉뚱하게도 저런 질문이 떠올랐다. 그리고 책의 맨 처음 장을 읽고 나니 중국 SF를 한번 읽어봐야 한다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고른 것이 오늘 우리가 보게 될 두 작품, <말세의 이야기><포스트 라이프>이다.

언뜻 보았을 때에도 대비되는 작품들이다. 분량도 그렇고 서술 스타일, 그리고 다루는 내용도 천양지차이다. <말세의 이야기>는 인류의 최후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지구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제거된다는 설정인데, 맨 마지막에 남자와 여자 한 쌍만이 남는다. <포스트 라이프>는 인간의 의식을 칩에 업로드 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었다. 주인공은 이 기술의 권위자 ‘리멍’의 의식이 업로드 된 칩을 분실하는 사고를 겪는다.

각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해보자. <말세의 이야기> 속 과학자들은 인류가 갑자기 사라지는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전지구적 자동 생존 시스템(GSSS)’를 설계한다. 이 시스템은 인류 최후의 남녀 한 쌍이 남았을 때, 그들의 의식주를 책임지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최후 인류로서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고, 여자(‘나’의 어머니)는 목숨을 끊는다. 작품 말미에 지구에 홀로 남은 ‘나’는 깨달음을 읊조인다.

아마도 신은 인간세상의 증오를 차마 볼 수가 없어 잠시 모든 무관한 사람들을 퇴장시키고 아버지와 어머니만 남겨 그들에게 서로 잘 지내는 법을 배우게 한 것은 아닐까. (7페이지)

<포스트 라이프>에서 ‘리멍’의 의식 칩을 잃어버린 이후 살인범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주인공에 대한 책망은 의식이 담긴 기계를 없앤 책임을 묻는 윤리적 태도보다는 원천 기술이 소멸된 것에 대한 아쉬움에 가까워 보인다. 주인공은 이 칩을 찾기 위해 ‘의식의 기원에 관한 궁극적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44) 블랙홀로 들어가겠다고 자원한다. 그리고 블랙홀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분리하여 존재하는 줄 알았던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일이 일어난다.

나는 동시에 우주의 어떠한 사물도 다 느낄 수 있었다. 크게는 우주의 전체적인 존재,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운의 집합과 분산, 항성의 연소, 행성의 형성, 에너지의 분출에서부터 작게는 인류의 존재, 생명의 비밀 그리고 분자, 원자, 기본 입자의 무한한 형식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이 다 무한한 의식 속에 있었다. 시간은 사라졌다. 혹은 우주의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도 의식 속에 있었다. 그것들은 다 나였고 나는 그것들이어서 분리시킬 수가 없었다. 그 의식은 우주와 구조가 같았다. 그래서 더 이상 인류의 작은 의식처럼 탐구하고, 이해하고, 변화시키려는 욕망이 없었다. 그 의식은 우주 그 자체가 되었다. 만약 당신들이 계속 ‘나’라는 말로 그 의식을 가리키려 한다면 내가 바로 우주였다.(50)

그런데, 두 작품을 읽고 드는 기분은 당혹감이었다. <말세의 이야기><포스트 라이프>를 펼쳐보니, 각 작품은 SF 소설로 감시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하려던 본래 의도와 거리가 있다. 원래는 중국 작가의 SF 소설을 읽고서 그들이 중국의 기술 발전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각을 살펴보고자 했다. 그렇지만 페이다오와 왕웨이렌의 작품은 기존 SF 소설의 클리셰를 충실히 따른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왕웨이렌의 작품이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묘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결국 모든 것이 통합되고, ‘무에서 유가 생기고 유에서 무가 생긴다’는 결론이 마치 중국 고대 사상을 겉핥기로 배우고픈 이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듯하여.

무엇보다 이 건조한 문체의 작품이 중국 독자들에게 얼마나 반향을 불러올 수 있을지 미지수이다. 중국의 현실은 SF보다 더 공상 과학 같은 서사 체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국가 공인 가상화폐인 디지털 위안화가 1년의 시범 사용기간동안 620억 위안의 누적 거래액을 달성하는 나라, 우주 굴기라는 이름으로 유/무인 우주선을 주기적을 쏘아올리는 나라. 중국의 현실은 SF 작가들에게 창작의 동기를 주는 대상을 뛰어넘고 있다. 옆 나라 SF 작품에는 과학보다 공상이 더 첨가되어야 할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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