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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차이나] 사마천의 후예이고 싶겠지만 (수호전 17회~23회 발제)2021-04-06 03:2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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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후예이고 싶겠지만

에레혼

《수호전》을 읽고 있으면, 실험실에서 《홍루몽》을 읽던 2019년이 떠오른다. 당시에 나는 분명한 동기를 가지고 세미나에 참여했다. 그동안 혼자서 보려고 애써도 못 읽는 《홍루몽》을 좀 강제적으로 읽을 자리가 필요했다. 마오쩌둥이 부하들에게 《홍루몽》을 읽어보라고 그토록 권유했다는 에피소드를 보며 대체 어떤 책일까 궁금했다. 정말 마오의 말대로 봉건 사회에 처절하게 저항하는 책일지.

이런 기대감 때문인지 《홍루몽》을 펼쳐보고 실망감이 더 컸다. 고전소설 답지않은 완정성─이런 표현 조심해야 하지만 이렇게 표현할 방법밖에는 없다─이나 인물 내면에 대한 탁월한 묘사는 소문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반봉건’이라는 키워드에 대해서는, 글쎄. 과도한 의미 부여가 이뤄진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썼던 발제문을 보니, 나도 이런 사소한 반항에 상당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캐릭터의 반항이 대관원의 문밖을 넘지는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엄밀히 말하면, 《홍루몽》은 주인공의 반항이 굳이 집밖을 넘어야 하는가 물어보는 듯하다. 조설근이 만든 대관원은 이미 작은 우주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보옥과 대옥의 삐딱한 태도를 그저 사춘기 청소년의 치기어린 모습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삼국지》나 《수호전》의 인물들처럼 세계를 뒤집고 탐관오리를 혼내 줘야만 훌륭한 사람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부터 바꿔 나갈 수 있을 때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 이상이 내가 생각하는 《홍루몽》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한 ‘꿈보다 해몽’ 되겠다.


《홍루몽》 세미나로부터 2년여 시간이 흘렀고, 반봉건 문학의 선두주자 《수호전》을 읽는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그때 발제문에서 상투적인 정의로 넘겨 짚은 것처럼 《수호전》 속 인물들은 거대한 악과 싸우는 인물처럼 보이는가, 하고 자문해본다. 지금까지 읽은 바로는 질문에 긍정할 수 없다. 등장인물들은 어떤 인물보다 개인적인 일에 발끈한다. 그리고 그 ‘성질머리’ 때문에 양산박에 오르게 된다. 같은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의 성격마다 다른 대처 방식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발끈하는 인물들의 전사前史를 길게 늘어놔도 그들의 처지에는 공감이 쉬이 되지 않는다. 17회부터 23회의 이야기는 자신의 성미가 곧 투명장投名狀이 되어버리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7회부터는 송강의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이 등장인물은 김성탄에게 단단히 미움을 산 것이 분명하다. (김성탄의 주장대로라면, 시내암도 송강을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하니 진실은 저 너머에……) 서스펜스마저 돋보였던 노지심, 임충, 이지의 등장과는 달리 송강은 다소 평범하게 등장한다. 명색이 자신의 전傳인데 주인공의 자리도 임충에게 넘겨주는 듯하다.


오용이 피가 낭자한 바닥에서 최고 두령의 교의를 끌어다가 임충을 앉히며 소리쳤다.
“만일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왕륜처럼 될 것이다. 오늘 임 교두를 산채의 주인으로 세우겠다!
_수호전 18(본문 페이지로는 2242)


오용의 계획대로 임충은 성급하게 칼을 휘두른다. 자연스럽게 양산박은 송강 및 108의 주둔지로 완벽하게 거듭난다. 여기서 패거리의 높은 자리를 거듭 사양하던 송강이 이야기의 전면으로 등장하는 에피소는는 다름 아닌 염파석의 목숨을 끊는 부분이다.


문을 열고 보니 흥건한 핏속에 시신이 쓰러져 있었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냐!
“나는 사내대장부로 평생 도망간 적이 없소. 당신이 하자는 대로 따르겠소.
“저년은 정말 나쁜 년인데 잘 죽였소. 다만 이제 이 늙은이는 누가 먹여 살린단 말이오!
_수호전 10(2289)


이 에피소드가 송강에게는 세상을 등져야만 하는 이유, 즉 투명장인 셈이다. 이후에 등장하는 무송의 투명장도 별반 다르지 않다. 만취 상태에서도 호랑이를 때려잡는 이 사내 역시 (23회 이후의 이야기일테지만) 반금련과의 사건에서 누군가를 죽이고 양산박 패거리에 비로소 입단할 수 있게 되리라.

《수호전》 70회의 3분의 1정도 읽은 시점에서의 감상은, 작가가 명분을 만드는 일에 심취해있다는 생각이 든다. 양산박이라는 늪지대로 떨어지는 첫 발걸음에는 예외없이 유혈이 낭자한다. 작가는 투명장으로 ‘활용된’ 인물들의 처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심지어는 이런 살인 장면들을 세세하게 묘사하기까지 한다. 당시 인물들에게는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살인이었을지 모르고, 고전은 원래 시대적 특징을 감안해서 읽어야 한다지만…… 《사기》에 심취하고, 사마천의 태도를 염두하던 김성탄(과 그를 통해 재탄생한 시내암)이니 이와 같은 후대의 평가도 이해할지 모른다는 마음에 괜히 비판을 해본다. 아니, 사마천의 마음으로 《수호전》을 대했던 김성탄이라면 이런 평가에 대해 “내 글을 이해해줄 선비를 기다린다”고 응수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국 관련 옛글을 읽다보면 사마천은 아무데서나 소환된다. 김성탄의 《수호전》 독법은 분명 통쾌한 부분도 있고, 과감한 태도도 겸비되어 있어서 신선하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가 《수호전》이 역사가의 마음으로 쓴 책이라고 극찬한 것에 대해서는 쉬이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시내암이 과연 사마천을 비롯한 역사가들처럼 후세에 교훈 혹은 타산지석이 되라고 《수호전》 서사를 남긴 것일까? 송강과 무송의 이야기를 보니 김성탄이 과도하게 의미부여한 것처럼 보인다. 어디까지가 본받을 이야기고 어디까지가 경계해야 하는 이야기인가. 그보다 《수호전》이 이렇게 읽는 작품이 맞긴 한걸까? 언제는 시내암이 한가한 마음을 못견뎌 쓴 책이 《수호전》이라고 하더니만. 사마천이 이름이 이용당했네, 하는 농담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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