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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리딩R&D] 물은 H₂O인가?라고 묻는 이유2023-05-02 14:4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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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R&D] <물은 H₂O인가?> 1장 물과 화학혁명 1.1 요절한 플로지스톤



물은 H₂O인가?라고 묻는 이유



<과학혁명의 구조> 이후 과학이 영원한 자연법칙을 말해준다는 관념은 깨졌다. 과학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저자는 <물은 H₂O인가?>를 물으며 패러다임적 과학 지식의 한계를 지적하고 과학적 다원주의가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다원주의는 상대주의라고 비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상대주의는 게으른 방임과 판단 포기를 함축한다. 다원주의는 판단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단 하나의 가치 있는 시스템을 육성하는 것보다 다수의 가치 있는 시스템들을 육성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다원주의는 지식의 육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 책은 전문가들만을 위한 책은 아니다. 지식 탐구의 방법론으로 접근해도 좋을 것 같다. 각 장이 3절로 이루어져 있다. 1절은 비전문가들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로 호기심을 유발하고 2절에서 자신의 주장을 제시한다. 3절에서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예상되는 반론과 심층 논의, 미래 전망 등을 다룬다. 일방적인 정보 습득보다는 새로운 과학철학적 관점과 비정통적인 사유의 틈새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물은 H₂O라는 명제의 진리성을 의문시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물은 H₂O라는 명제는 하나의 견해이고, 그 견해를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로 간주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 


그러기 위해 화학혁명에 꼭 등장해야 하는 조지프 프리스틀리부터 소개한다. 그는 당시 인공 탄산수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발견하여 유럽 전체에서 유명했었다. 이는 기체를 다루를 화학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당시에 기체는 ‘공기’로 더 많이 불렸다. 프리스틀리는 새로운 공기를 가장 많이 발견하고 생산한 인물이다. ‘산소’라고 부르는 기체도 최초로 언급했다. ‘산소’라는 명명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산소를 공기에서 플로지스톤이 빠진 ‘탈플로지스톤 공기’라고 표현했다. 플로지스톤은 가연성의 ‘요소’로, 다른 물질들과 결합하여 자신의 속성을 부여하는 물질을 뜻했다. 어떤 금속에서 플로지스톤을 빼면 금속회(녹이나 산화물)라는 흙과 유사한 물질이 되었고, 플로지스톤을 넣어주면 다시 금속이 된다. 플로지스톤 이론이 남아있으면 이러한 상호변환 연구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화학은 젊은 라부아지에의 화학에 밀렸다. 라부아지에는 연소를 녹슮과 마찬가지로 산소와의 결합으로 보았다. 프리스틀리가 탈플로지스톤화를 본 곳에서 그는 ‘산화’를 보았다.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플로지스톤 개념을 끝까지 버리지 않은 프리스틀리를 패러다임 저항으로 과학자이기를 그만둔 사례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두 이론은 동등하게 틀렸다.


‘자연에 플로지스톤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를 근거로 내세우면 안 된다. 지금의 과학은 암흑물질 등 관찰 불가능하지만 이론적 필수성 때문에 인정하고 있는 대상들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금속이 녹슬 때 무게가 증가한다는 점 때문에, ‘플로지스톤을 잃었는데 어떻게 무게가 더 늘어나는가’로 반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광자나 무게없는 입자들도 인정되고 있다. 라부아지에의 산 이론, 연소 이론, 칼로릭 이론 또한 현대 화학의 관점에서 볼 때 명백히 틀린 개념이다. 라부아지에 이론이 플로지스톤 이론보다 더 단순하다든가, 더 진보적이다 등의 주장도 한계가 있다. 저자가 보기에 플로지스톤 이론은 때 이르게 살해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플로지스톤 이론이 남아 있었거나 더 오래 존속되었다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었을까. 플로지스톤 이론은 모든 금속이 유사한 속성들을 지닌 이유를 멋지게 설명했지만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할 수 없다. 플로지스톤을 마이너스 전기와 동일시하는 길도 막혀버린 셈이다. 플로지스톤이 있었다면 화학에서 무게를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음을 일깨우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이런 논의들을 통해 드러내고 싶은 것은 다름 아닌 다원주의적 사유이다. 물이 화합물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 또 다른 세계관이 과연 가능할까? 잘 확립된 과학적 결과들은 필연적일까 아니면 우연적일까? 내용이 근본적으로 다른 과학이 존재할 수 있을까? 저자는 화학혁명기의 물을 단일한 견해의 빈곤함을 일깨우는 사례로 삼아, 단 하나의 지식 추구 방법을 고집하는 것이 실제적 앎은 물론 잠재적 앎까지 가릴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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