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애도의 애도를] 진 선생과 푸코 사이에서 나는 애도한다_7장 8장 발제2020-01-28 17: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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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애도를] 7장 푸코와 민주주의/8장 마르크스와 알튀세르 사이의 푸코 발제_아라차



진 선생과 푸코 사이에서 나는 애도한다



진 선생은 알랭 바디우와 자크 랑시에르, 조르조 아감벤과 슬라예보 지젝, 안토니오 네그리같은 사상가들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해방의 정치를 추구하며, 이러한 정치를 제도적인 정치의 바깥에서 찾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때의 제도적인 정치는 자유민주주의를 가리킨다. 이 사상가들이 현대 정치의 대표적인 모델로 간주되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가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억압하거나 배제하는 지배의 체제라고 간주한다고 주장한단다. 그러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 바깥에 존재하는 진정한 정치의 장소를 발견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 ‘바깥’은 어디이고, ‘진정한’ 정치의 장소는 어디인 것인가? 진 선생은 과연 ‘바깥’과 ‘진정한 정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일단 ‘바깥’과 ‘진정한 정치’가 있다고 상정하고 논의를 따라가 보자. 논의의 출발은 마르크스이고 유의미한 ‘바깥’을 구현한 철학자로 푸코를 뽑고 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허구성과 기만성을 비판하고 경제적 착취에 근거를 둔 계급투쟁을 정치의 쟁점으로 파악했다. 푸코는 마르크스와는 달리 역사적 전개과정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또는 경제적 착취 관계의 형성과 전개로 파악하지 않고, 권력 관계의 전개과정으로 제시했다. 또한 권력관계의 전개과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 예속화와 주체화라는 문제를 정치의 쟁점으로 제기한다. 


진 선생은 바깥의 정치가 두 가지 문제점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하나는 지배적인 정치체와 진정한 정치의 장소 사이의 근원적 양립 불가능성을 가정하는 까닭에, 예속화에서 주체화로의 이행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해명하기 어렵다는 점, 또 하나의 문제점은 바깥의 정치를 추구하는 사상가들에게서 나타나는 역사성의 부재이다. 진 선생은 푸코를 통해 민주주의를 새롭게 고찰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특히 예속화와 주체화의 문제와 관련하여 의미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문제 제기라면 예속화와 주체화를 별개의 양상으로 상정해야 하기 때문에 진 선생의 논의를 따라가기가 시작부터 어렵다. 푸코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어떻게 예속관계들이 주체들을 만들 수 있는지(구성할 수 있는지) 탐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예속화와 주체화가 같은 양면임을 주지하고 있다.(예속적 주체화 내지 종속적 주체화라고 번역되는 개념) 진 선생의 말처럼 푸코의 관계론적 권력론은 예속화와 주체화를 내재적인 복합적 관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지 않은가. 또한 푸코는 구성해 놓은 역사를 소비하는 입장이 아니라 역사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입장을 택하고 있으니 역사성의 부재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 푸코는 종종 과거를 지나치게 일반화한다는 이유로 역사학자들에게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일반 역사학자들과는 상당히 다른 의도를 가지고 사료를 사용한다. 푸코는 근본적으로 역사의 진보라는 개념 자체를 문제시하고 있다. 역사가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보라는 개념도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현재는 과거 사건의 불가항력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여러 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를 분석하는 것은 현재 우리의 모습을 단순 명료하게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를 연결해 주는 나약한 선들을 추적해 감으로써 왜 그리고 어떻게 현재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수도 있는지를 파악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럼에도 진 선생에 의한 푸코의 논의를 더 따라가 본다. 관계론적 권력론. 푸코에 따르면 권력은 누군가 혹은 어딘가에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망 속에서 기능한다는 것, 이 망 속에서 개인들은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으며, 항상 권력을 감수하면서 또한 그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다. 권력이 있기 때문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과로서 권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론적 권력론은 민주주의를 법적인 정체로 규정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갈등적인 과정으로서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푸코에 따르면 고전적인 자유주의는 자연적인 것으로서의 교환이 경제의 토대였다면, 신자유주의는 자연적 경향의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국가의 독점과 개입에 맞서 ‘인위적 관계’로서의 경쟁을 보호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경쟁은 존중해야 할 자연적인 소여가 아니라 통치술의 역사적 목표다.” 이렇게 경제의 근거가 교환에서 경쟁으로 바뀌고, 경제활동이 자연적인 것에서 인위적인 것으로 재정의되면서, 인간에 대한 상이한 이해 방식이 나타나고 인간의 활동은 “인적 자본”의 관점에서 재정의된다. 인간들은 각자가 기업가이고 각자가 자신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투자를 한 만큼 자신의 활동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개인 주체, 개인 기업가들은 다른 사람이나 국가의 간섭 없이 자신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투자하고 벌어들이고 소비하고 생산하기 때문에 동시에 국가에 대해 이러저러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일종의 반정치적 장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의미있는 사회의 변화나 변혁을 사고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 또는 그것을 위한 조건들 자체가 축소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삶의 양식으로서 민주주의다. “신자유주의는 정치의 종언이 아니라 사회의 권력관계를 재구조화하는 정치의 변혁이다. 우리가 오늘날 목도하는 것은 공식적인 통치기술로부터 비공식 통치기술로의 전위이자 통치의 무대에서 새로운 행위자들의 등장이다. 이것은 국가성 및 국가와 시민사회 행위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 선생은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대한 푸코의 전략으로 대항품행, 권리들을 가질 권리, 파레지아를 말한다. 그러면서 신자유주의가 훨씬 견고하고 뿌리 깊은 통치성이기 때문에 단순히 복지국가를 실현한다거나 금융자본의 활동을 통제하는 것으로 극복될 수 없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주체화 양식의 발명이 필수적이라고 덧붙인다. “푸코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이와 같은 주체화 양식에 대해 좀 더 온전한 이론을 제시할 수 있었을까”라고 묻는 진 선생에게는 푸코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자기 통치의 실천”은 새로운 주체화 양식으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마르크스와 알튀세르 사이의 푸코를 보자. 푸코는 알튀세르의 ‘억압적 국가장치/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국가장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푸코에게 권력은 이데올로기를 동원해서 기만하고 은폐하고 가상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생산하고 그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가 아니라 ‘권력-지식’ 또는 ‘지식-권력’ 장치가 권력을 해명하는 데 더 적절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권력은 국가나 제도보다 더 하위의 수준에서, 곧 미시물리학의 수준에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도로서의 국가 장치의 기능적 효용과 실재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제한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 장에서 재밌는 분석은 규율 권력에 대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군대와 작업장에서 규율의 문제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수행했다. 푸코 역시 <감시와 처벌>에서 이를 인용하며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인 협업에 대해 논의한다. 협업은 노동 과정을 세부적으로 분할하며 각각의 노동자들에게 세부적으로 분할된 특정한 작업만을 부과한다. 이는 따로 따로 생산하는 것보다 생산성을 훨씬 더 높여주지만 이러한 생산성의 증대가 전제하고 있는 것은 노동자들이 이런 작업 방식에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은 강제 내지 폭력으로 가능하며 인간 및 그 신체의 자율성을 해체한다. 신체의 활동에 대한 면밀한 통제를 가능케 하고 지속적인 복종을 확보하는 이러한 방법을 ‘규율’이라고 부를 수 있다. 푸코의 규율 권력은 강제나 통제만이 아닌 신체 능력의 확장이나 신체에 대한 유용한 관계의 성립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푸코는 자본가가 노동력을 구매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이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노동을 분할하면서 결합하는 규율 권력의 작용이 필수적인 조건이다. 규율의 기술이 없이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규율 권력 그 자체는 정의상 자본주의 국가장치에 종속되지 않는다. 일반화된 규율의 기술은 국가 기구나 제도의 아래쪽에서 작동하면서 개인들 자체를 제작하는 일을 수행한다. 규율은 개인을 제조한다. 그것은 개인을 권력 행사의 객체와 도구로 간주하는 권력의 특정한 기술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규율권력이 수행하는 예속적 주체화의 쟁점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철폐나 국가권력의 장악 및 국가장치의 해체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푸코가 보기에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호명 같은 개념을 통해 해명하려고 했던 예속화의 문제는 단면적일뿐더러 어떤 의미에서는 도착적인 것이었을 수 있다. 자본주의적인 계급지배를 정당화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예속적 주체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푸코는 규율권력 개념을 통해 성적 예속화, 광인들의 정신의학적 예속화, 학생들의 규범적 예속화와 같이 계급지배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예속화 작용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진 선생은 알튀세르에게 푸코의 권력론이 권력의 비대칭성이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사고하지 않은 것으로 비쳤을 것이라고 한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존재론적으로 상이한 계급이라는 것을 망각했다는 것. 흠, 마르크스도 다음 논의로 넘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도 크렘린 궁에 머물러 있는 이 느낌은 뭘까. 다시 자본주의 계급론으로 돌아올 것이라면 푸코의 규율 권력 논의를 왜 그렇게 길게 한 것일까. 푸코를 가져와서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시대의 예속화를 논의하려고 했다면 푸코가 역사를, 권력을, 주체를 어떻게 새롭게 정의해 버렸는지만 설명했어도 좋았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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