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플라톤의 '국가'] 8권 발제: 불행의 씨앗, 타락의 족보2019-11-19 14:2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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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씨앗, 타락의 족보

에레혼

한참을 돌아왔다. 어디서부터 길을 돌아온 건지 떠올려보면, 5권의 서두(449a, p.217)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크라테스는 올바르지 못한 정체政體를 네가지 범주로 분류하려 했지만 5권에서 7권까지의 내용은 수호자와 철인을 위해 할애되었다. 8권에 들어서고 나서야 소크라테스의 시각에서 옳지 못한 정체에 대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8권은 앞선 내용들과 달리 통일성 있고 체계적인 편이다. 우선 글라우콘이 등장해 지금까지 선생이 했던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네 가지 종류의 그릇된 정체, ‘명예지상정체(timokratia/timarchia) 과두정체(oligarchia) 민주정체(demokratia) 참주정체(tyrannis)’에 대해 차례대로 설명한다.

 

네 가지 정체에 대한 논의에서 체계성이 느껴지는 것은 그동안 <국가>의 논의 전개 방식에 익숙해졌다는 방증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에서 내내 집단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개인과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정체가 다섯 가지라면, 개인들 혼의 상태도 다섯가지겠지?(544e, p.453) 하는 말도 가볍게 보이지 않는다. 이 언질은 이번에도 익숙한 논의 방식을 택하겠다 것이다. 실제로 8권에서는 각각의 정체를 말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네 종류의 정체를 닮은 혼의 모습, 그리고 그 정체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대해서도 설명이 이어진다.


소크라테스가 설명하는 네 가지 정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명예지상정체에서 참주정체까지의 설명은 ‘그나마’ 더 나은 정체를 먼저 소개한 뒤 비교적 열등한 정체를 소개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특이한 것은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좋지 못한 개념들의 우열을 가리는 서술 방식이다. 부정적인 것을 먼저 소개하고 이후에 긍정적인 것을 언급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구성할 수도 있을텐데, 플라톤은 정반대의 방식을 택했다. 8권이 이렇게 서술된 까닭은 간단하다. 더 나은 정체 속에 그보다 그릇된 정체가 나타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심지어 소크라테스는 내내 최선자정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이 정체 역시 명예지상정체로 타락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8권에서는 우리가 익히 기대하던 플라톤의 이미지─’반反민주주의자’ 플라톤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한다. 플라톤이 비판하고 있는 민주정체는 당시 아테네의 정체 체제이고, 이 정체는 당연히 현대의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과 차이가 있다. 따라서 현대 정치 체제의 관점에서 플라톤을 민주적/반민주적이라 규정하는 것은 플라톤 입장에서 조금 억울한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플라톤의 시각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여전히 존중은 할 수 없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민주정체는 자유와 관용이 과도한 것을 문제라 말한다. (557b-558c, pp.479-481) 이러한 비판은 절제된 삶을 지향점으로 삼는 최선자정체의 정 반대에 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나라에서는 분명 저마다 자기 생활을 자기 좋을 대로 꾸려나갈 것이네 … 그러면 이 정체는 모든 정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같네. 온갖 꽃을 수놓은 다채로운 외투처럼, 온갖 성격으로 다채롭게 장식된 이 정체는 가장 아름다워 보일 것이네. (557b-557c, pp.479-480) 민주정체를 비꼬는 이 말은 선별된 소수의 정치를 긍정적으로 보았던 플라톤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사실 <국가>를 독해하며 느끼는 이런 반발심은 플라톤이 책 전반에서 드러내고 있는 확신적 태도와 비약에 조준되어있다. 플라톤에 의해 그려진 소크라테스는 확신에 찬 모습으로 민주정체와 민중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한다. 이러한 확신은 실제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고, 소크라테스(혹은 플라톤)가 논리적으로 사유한 끝에 내린 결론에 대한 믿음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자꾸 독해를 하며 잊어버리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는 플라톤의 저작이 사후事後적 텍스트라는 사실이다. 책을 읽다 보면 <국가>가 플라톤이 아테네 정치의 몰락, 그리고 스승의 죽음을 목도한 뒤에 쓴 텍스트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가 있다. ‘점차 그릇된 방향으로 변질되는 정체’, ‘민중의 부정적 면모’에 대한 서술은 단순히 논리적 도식 혹은 감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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