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루쉰] 1부 01-03: 지워지고자 했으나 지워질 수 없는2020-05-18 17:4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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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루쉰독본] 발제 1부 01-03.pdf (617.8KB)

지워지고자 했으나 지워질 수 없는

루쉰 세미나/20200518/에레혼

​(사진 파일은 나중에 수정하겠습니다. 첨부한 pdf 파일에는 사진이 잘 들어가 있으니 그것을 참고하셔도 됩니다.)

2015년에 나는 동기들과 함께 베이징으로 루쉰 탐방을 다녀왔다. 루쉰이 태어난 샤오싱이나 루쉰공원ㆍ루쉰기념관이 있는 상하이가 아니라 베이징으로 간 이유는 간단했다. 탐방 멤버 전원이 베이징을 가고 싶어했기 때문에! 사실 지역을 고르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 지역에 가야 하는 이유에 살을 잘 붙여야 학과에서 탐방단이라는 명칭을 부여해주었고, 그래야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회의 끝에 누군가 루쉰의 생가를 탐방해보는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그때 멤버 전원은 전공 수업으로 루쉰을 배우고 있었거나 배웠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루쉰의 베이징 생활을 따라가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한 여름에 베이징으로 떠나는 미친 짓을 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던 탐방이었다. 하지만 모든 여행이 그렇듯, 돌아오고 나니 베이징에 대한 기억은 미화되었고 이제 힘들었던 것은 편집되었다. 그리고 탐방을 다녀온 멤버끼리 굳게 다짐한 것이 있다. 언제든 이 탐방기를 사용할 곳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사용하자고. 루쉰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나는 지금이 바로 루쉰 탐방기를 사용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탐방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루쉰이 베이징 시절에 머물렀던 생가였다. 루쉰은 베이징에 1912년 처음 상경하여 1926년까지 살았다. 이 시기동안 그는 네 곳을 거주했다. 101장에서 03장까지의 글을 읽다 보니 루쉰의 베이징 정착 시기가 떠올라, 당시 루쉰의 거처에 얽힌 에피소드와 그의 글을 연관지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샤오싱회관


루쉰이 북경에서 가장 처음 살았던 곳의 이름은 샤오싱회관紹興會館이다. 20세기 초반 베이징은
회관 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지방 사람들이 베이징에 살 때 동향 사람들끼리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크게 짓고 그 안에서 함께 사는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루쉰은 베이징 생활에 적응하는 시간을 거친다. 실제로 그가 샤오싱 고향집을 정리하게 된 것도 베이징 샤오싱회관에 살던 때에 일어난 일이다.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한 소설 <고향>에는 당시 정황을 엿볼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고향은 결코 이렇지 않았다. 고향은 훨씬 좋았다. 하지만 내가 고향의 아름다움을 떠올리고 그 아름다움을 말하려고 하자 그 모습은 이내 사라져버리고 말도 사라져버렸다. …… 단지 내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내가 이번에 좋은 심정으로 고향에 돌아온 것이 아니어서 그런 것이다.

이번에 나는 고향과 작별하러 왔다. 오랫동안 우리 일가가 살아온 집이 타성바지에게 팔렸다. 올해까지 집을 넘겨줘야 해서 정월 초하루 전에 익숙한 옛집과 영원히 작별하고 정든 고향을 떠나 내가 밥벌이하는 타관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고향’, <루쉰독본>, 28-29.)


루쉰은, 아니 적어도 <고향> 속 화자는 타관으로 가서 사는 일을 내키지 않았다. 루쉰에게도 베이징 시기는 복잡미묘한 시기이기 때문에 <고향>의 주인공 쉰迅의 이야기가 더욱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주수인周樹이 필명 루쉰으로 거듭난 것도, 그가 대학 강의로 이름을 날린 것도, <광인일기><Q정전>으로 소설가로 데뷔한 것도 모두 베이징 거주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동생 주작인周作人과 영영 갈라서게 된 것도, 베이징여사범대 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하다가 수배 명령을 받게 된 것도 이 시기에 일어난 것이었다.

2. 시싼티아오

시싼티아오西三라고만 말하면, 베이징 토박이이라고 해도 루쉰 고거를 말하는 줄 모르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루쉰은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즉 베이징을 떠나기 직전까지 이곳에 거주했다. 하지만 이렇게 루쉰이 짧은 시간 거주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시싼티아오를 생경하게 느기는 것은 아니다. 루쉰의 베이징 시기 네 번째 고거는 위치를 약간 이전하여 베이징 루쉰박물관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루쉰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이 장소는 베이징에 있는 루쉰 고거 가운데 샤오싱회관과 더불어 가장 형태가 온전한 곳이다.

2년 남짓한 시간동안 루쉰에게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위에서 말했던 베이징여사대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으로 루쉰에게 체포령이 떨어졌으며 그는 더 이상 베이징에 거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루쉰이 이런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한들, 그가 안정적인 생활을 오래동안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는 특유의 사고 방식이나 글쓰기 스타일 때문에 지지자만큼이나 많은 적수를 몰고 다녔다. 루쉰을 미워했던 사람은 정치인, 군벌, 지식인 등 직업군을 가리지 않았다. 지금으로 치면 악플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이야기도 자주 들었다. 물론 루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악플러의 글을 전시하고, 철저하게 되갚아준다. <수감록 41>에서처럼 말이다.


한 익명의 편지에서 “돌조각이나 헤아려라.”라는 말을 들었다. 재주가 없거든 개혁을 제창하지 말고 돌조각이나 헤아리는 게 나을 거라는 뜻인 듯하다. …… 만일 의지가 좀 약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위축당해 자신도 모르게 ‘돌조각이나 헤아리는’ 당()에 들어가 버릴 것이다.

…… 그런데 냉소하는 사람들은 개혁을 반대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보수를 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문자를 보더라도 그들은 백화문이 눈에 차지 않지만 고문을 잘 쓰는 것도 아니다. 그들 자신의 학설을 따르자면 의당 ‘돌조각이나 헤아려야’ 할 터인데도 그들은 그렇게는 하지 않고 이상하게 냉소만 보내고 있다. (‘수감록 41, <루쉰독본>, 71-72.)

루쉰에게 언변으로 공격을 가했던 사람은 지리멸렬한 설전을 다시 이어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루쉰의 논설문들은 지금에나 통쾌한 느낌으로 읽을 수 있지, 동시대 지식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권력자들이 루쉰을 겁냈던 이유 또한 분명하다. 베이징여사대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루쉰은 청년과 약자의 편에 서고자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을 두고 후스胡適처럼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비판한 지식인도 있었기에 루쉰의 태도는 특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루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마오쩌둥조차 루쉰을 바라보는 시각은 20세기 초반 권력가들과 다르지 않았다. 반우파투쟁이 한참이던 1957년에 마오는 지금까지 루쉰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감옥에 갇힌 채로 계속 글이나 쓰고 있든지, 한 마디도 안 하든지 했겠지.” 루쉰도 충분히 반우파투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는데, 마오의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루쉰은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입을 다물고 있을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3. 빠다오완후통, 좐타후통

빠다오완후통八道胡同과 좐타후통塔胡同은 각각 루쉰의 두 번째ㆍ세 번째 거처로 쓰인 곳이다. 루쉰은 빠다오완후통에서는 1919년부터 1923년까지, 그리고 좐타후통에서는 1923년부터 1924년까지 거주했다. 두번째 거주지에 살던 시기에 루쉰은 <Q정전>을 연재하고 대학강의에 출강하게 되었지만, 동생 주작인과 결별하게 되며 세번째 거주지로 이사하게 된다.

루쉰 고거를 순서대로 배치하지 설명하지 않은 이유는 빠다오완과 좐타후통의 모습이 앞서 언급한 고거들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베이징 시기 루쉰의 두 번째ㆍ세 번째 거처는 상당히 열악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심지어 빠다오완은 현재 장소가 남아있지 않다. 실제로 탐방할 때에도 이곳을 찾는 과정이 가장 어려웠다. 구글지도와 바이두지도의 위치가 달랐고, 특히 구글지도에서 가리킨 위치로 가도 루쉰 고거가 없었기 떄문이다. (당시는 몰랐던 사실인데, 중국에서는 구글지도를 거의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정보 업데이트가 느리다.) 현재는 루쉰 빠다오완 고거가 철거된 자리에는 베이징35중학교가 들어서 있다. 좐타후통의 경우도 위치를 찾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곳도 빠다오완처럼 철거될 위기에 놓여있었는데 주변 주민들의 노력으로 인해 겨우 지켜낼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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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오완후통 루쉰 고거 자리에 위치한 베이징35중학교)

한쪽에서는 박물관까지 지어가면서 루쉰을 기념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구도심을 정비한다는 명분 아래 루쉰과 관련된 것들을 부순다. 루쉰에게 유랑민流氓이라고 욕을 먹은 한 지식인은 루쉰에게 봉건의 잔당封建餘孼이라며 쏘아붙였다고 하는데, 재개발로 사라진(또는 사라질 위기에 처한) 루쉰 고거를 보고 있으니 그가 정말 그런 취급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루쉰의 베이징 시기 세 번째 거처인 좐타후통84. 문 위에 아주 작게 표시를 해놨다.)

탐방을 할 때는 이런 현실이 씁쓸했지만, 루쉰의 글을 읽을수록 그는 이런 푸대접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거꾸로 말하면 자신을 기념하는 사업에 대해서도 달갑지 않은 시선을 보냈을 것이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는 근거는 루쉰의 독특한 태도에 따른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무거운 사명을 부여했지만, 그 사명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은 하지 않았다. <행인>이라는 글에서 이러한 태도가 잘 나타난다.


노인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요. 마음 깊이 눈물짓는 사람도, 당신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도 만
날 수 있을 거요.

행인 아닙니다. 저는 그들이 마음 깊이 눈물짓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이 저 때문에 슬퍼하는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행인’, <루쉰독본>, 23-24.)

<행인>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가 지나간 흔적은 어둠으로 덮인다. 행인은 해가 지는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그가 걸어온 자취조차 사라지고 있다. 설령 행인이 목적지에 도달한다고 해서 그 사실을 기억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간이 좀 지나면 노인과 아이마저도 행인을 만났다는 것조차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혹은 조금 남다르고 예민한 사람 정도로 회고될 것이다.

탐방 중에 루쉰에 대한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인터뷰는 루쉰이 교편을 잡았던 베이징사범대학교에서 이뤄졌다. 중국 대학생에게 루쉰은 중국 혁명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으며, 교과서에서 만날 수 있는 작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 상당수가 루쉰에 대해 많은 정보를 술술 읊을 수 있었지만 상투적인 대답 이외의 말을 듣기는 어려웠다. 중국의 젊은 세대가 루쉰의 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이 변화는 루쉰이 살아있을 때 받았던 대접에 비하면 엄청난 것이다. 하지만 루쉰은 이제 더 이상 새롭게 해석되지 않는다. 그는 필요에 따라서는 철거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때에 민족의 스승으로 추앙되기도 한다. 어쩌면 루쉰은 본인이 가장 바라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회자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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