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중국] 7장 이탁오 - 자기모순의 철학자 발제2020-07-20 18: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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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모순이란?


1587년은 만력 15년, 간지로는 정해년이다. 겉으로 보면 태평성대에 가까워 기록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대명제국이 이미 발전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있었다. 황제가 치세에 힘쓰든지 쾌락에 빠지든지, 수보가 독재적이든지 유화적이든지, 고위 장군이 창의적이든지 구태의연하든지, 문관이 정직하게 근무하든지 탐욕에 빠지든지, 사상가가 극단적으로 진보적이든지 보수적이든지 결국은 모두 선악의 구별 없이 어느 것이나 실제적으로 의미 있는 발전을 얻을 수 없었다. 어떤 자는 지위를 잃었고, 어떤 자는 명예를 잃었고 또 어떤 자는 둘 다를 잃었다.

이 때문에 우리들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비극적인 마무리를 할 수밖에 없다. 만력 정해년의 연감은 역사에 있어서 실패로 얼룩진 한 편의 기록이었다.  (382-383)


타도공가점, 공자의 무리를 때려 부수자는 것은 20세기 중국인들의 자기 반성의 결과물이었다. 서구 제국의 침략, 또 그것은 거꾸로 보면 또 다른 의미의 '제국'이 무너져버린 상황을 만들었다. 침략이 문제인지 몰락이 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원흉은 공자, 즉 유가에 있다고 보았다. 이때 유가는 특정한 개념, 혹은 규범을 중심으로 삼는 학문 체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전통의 대명사라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이 말은 넓게는 전통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적극적인 변화의 목소리를, 좁게는 그 원흉이자 뿌리로 지목된 유가를 씻어내자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배경에서 이탁오는 흥미로운 위치에 서 있다. 전통의 관점에서 보면 해괴한 이단아였으나, 그 밖에서 보면 전통을 깨뜨리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불우한 철학가였기 때문이다. 그가 과연 어디까지 이르렀는가, 그의 철학적 실험의 유효성을 두고 다양한 평가가 엇갈린다. 혹자는 그를 '좌절'이라 일컬었으며, 또 다른 사람은 '굴절'이라 일컫기도 했다. 저자, 레이 황의 입장은 전자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조금 차이가 있다면 이탁오의 철학을 '비판'보다는 '비관'으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가 사회의 모순에 주목하기는 했으나 이를 뜯어고치는데 큰 열망을 가지지는 않았다고 본다. 어떠한 이념, 혹은 이상에 사로잡힌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이다. 도리어 그는 비관적인데 이는 그의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배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탁오는 독특한 출생 배경을 갖는다. 그의 조상은 상인으로 타국을 오가며 장사를 했다. 그의 조상 가운데는 서역인의 피가 흘러들어오기도 했고, 이슬람교를 믿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다른 독서인처럼 유가를 숭상했으며, 당연히 유가 관원이 되었다. 그러던 그가 61세에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어째서 그런 기묘한 선택을 한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문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독서인은 가문의 많은 지원을 받았으며, 당연히 그 가문을 챙겨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이 책임을 다하지 않기란 어려운 것이었으며, 형식적으로라도 출가를 하지 않는 한 그 의무로부터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이천 년간 뿌리내린 가족관,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는 광인이 되었다.


철학적으로 볼 때 그는 매우 복잡하다. 그는 공자를 존숭한 유가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도가와 불가를 연구하였고, 유불도가 궁극적으로는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는 왕기, 왕간의 영향을 받은 태주학파의 인물로 구분되곤 한다. 왕양명의 독특한 해석, 실천중심의 철학에 주목하는 사람은 왕양명의 철학이 민중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하나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명대 사회에서는 철학을 통해 민중 운동을 지도한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철학이 개혁적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전통에 얽매여 있다는 점에 있어서 이탁오 역시 한계를 지닌다. 그 역시 공자를 숭상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탁오의 모순이라 할 때, 이 모순은 그 개인의 모순이기도 하지만 시대와 사회의 모순이기도 하다. 좌절보다 비관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레이 황의 저작을 읽으면 명나라는 유가의 속박에 얽매여 있어 도무지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비관이란 이탁오 개인의 비관이기도 하지만, 만력제의 비관이라 할 수도 있고 명나라 자체의 비관이라 할 수도 있다. 


'이탁오는 당시 어느 누구보다 훨씬 많은 자유를 향유했으나 끝내 자신이 추구하던 독립을 획득하지 못했다.' 사실 여기에 이탁오라는 이름 대신 다른 이의 이름을 넣어도 큰 오류가 있다고 하지는 않아도 될 듯하다. 누구도 이 속박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이것은 경향의 문제일까 아니면 근본적인 체제의 문제일까. 뿌리가 썩었으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하고, 나무가 굽고 줄기가 말랐으면 그 부분만 내치면 될 일이다. 저자의 답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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