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코스모스-가능한세계들] 1113_우리에게 숭배해야 할 미래가 남아있을까2020-11-13 13: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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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숭배해야 할 미래가 남아있을까




우리 은하에는 수천억 개의 별들이 중력으로 한 데 모여 있다. 그런 우리 은하조차도 1조 개의 은하 중 하나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 거대한 우주조차도 우리의 이해의 상상을 뛰어 넘는 다중 우주의 작은 입자 하나에 불과할지 모른다. 창백한 푸른 점에서조차 곧잘 길을 잃는 미미한 존재인 우리가, 이토록 압도적인 현실을 대면했을 때 취한 행동은 무엇일까. 


과학적 낭만 내지는 선택적 무지? 


아인슈타인의 시대만 해도 우리는 여전히 숭배할 미래가 남아있었다. 지구 밖은 미래였고 낭만이었다. 지구 밖 세상을 그토록 열망하던 그 때와 지금의 우리는 뭔가 많이 달라져 있는 것 같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면서 계속 100년 전, 50년 전 그 때와 인류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가늠하곤 했었다. 낭만과 미래가 있던 시간을 지나 화폐와 정치만 있는 시간을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세포와 생명에서부터 행성과 은하까지 샅샅이 탐구해내는 <코스모스>의 서사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싶은 건지 아직은 모르겠다. 숭배해야 할 미래가 더 이상 없다고 여겨질 때 인류의 현미경은 어디로 향하게 되는 걸까. 여전히 질문이 미래형인 것이 아이러니다. 


다시 <코스모스>의 서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80년대 <코스모스>와 2020년에 나온 <코스모스>는 어떻게 다를까. 새로 발견하는 것이든,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든 그 안에 또 어마어마한 코스모스가 있을 것이다. 


최초의 생명 속에는 더 많은 생명을 만들 수 있는 복제 메커니즘이 담겨 있었다. DNA이다. DNA의 장점 중 하나는 완벽하지 않다는 것. DNA는 복제 오류를 일으켰고 지구를 수없이 때린 우주선에 맞아서 훼손되기도 했다. 이런 돌연변이들 중 뜻밖에 성공적인 개체가 단세포였다. 단세포가 식물이 되기까지 이후 30억 년이 더 걸린다. 시간은 흘러 2억년 전에는 포유류가 출현했다. 포유류의 뇌는 점점 더 커지고 주름이 많아지면서 계속 진화했다. 그러다 소금 한 알의 1000조분의 1에 해당하는 돌연변이가 수백만년 전 우리 선조 중 한 명의 DNA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 글을 읽을 수 있게 한 돌연변이다. 그들은 라틴어로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뜻인 호모 사피엔스를 자신의 종 이름으로 삼았다. 


이후 수만 년 동안 선조 중 일부는 아프리카를 떠나 지구 각지에 정착했다. 한 곳에 정착해 실내에서 사는 일은 혁명이었다. 식물을 심어 땅에서 먹을 것을 얻는 기술을 발명한 농업혁명이다. 대개의 혁명이 그렇듯이 농업혁명도 좋은 변화와 무서운 변화를 둘 다 가져왔다. 정착지는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커졌고, 도시가 만들어졌다. 도시의 시초라 여겨지는 차탈회위크는 현재 터키 영토인 아나톨리아 평원의 세워진 마을이었다. 차탈회위크는 아직 인간 사회가 농업 발명으로 치르게 된 가혹한 대가인 불평들이 없었다. 아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17세기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로 넘어간다. 구세계 사람들과 신세계 사람들이 자유롭게 섞여 살았다는 도시. 조르다노 부르노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들의 존재를 선언했다가 이단으로 몰려 고초를 겪은 곳이다. 고작 50년 후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호이겐스)는 똑같은 믿음을 품고도 오히려 상을 받는다. 하위헌스는 렌즈 2개를 써서 별, 행성, 위성을 눈 앞으로 가져왔으며, 토성의 고리들이 토성에 붙어있지 않다는 것과 토성의 위성이자 태양계에서 두 번째로 큰 위성인 타이탄을 발견했다. 추시계를 발명했고, 최초의 영사기와 애니메이션을 발명했다. 그는 우주에 무한히 많은 세계가 있고 그 중 생명이 사는 세계도 많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성서에는 그 다른 세계들과 생물들에 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을까? 신이 왜 그 내용을 빠뜨렸을까? 신은 그 점에서 분명했다. 인간 외에 다른 자녀가 있다는 말은 일절 숨겨야 했다. 


이 모순을 정면으로 다룬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작고한 아버지의 건어물 수입 사업이 망하자 크고 작은 숨은 세계를 발견하게끔 해 주는 렌즈를 가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1632년에 태어난 바뤼흐 스피노자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우리가 어떤 의식을 치르는지, 무엇을 먹는지, 누구를 사랑하는지에 집착하며 화내고 실망하는 폭군이 아니었다. 그의 신은 우주의 물리 법칙 그 자체였다. 그의 신은 사람들의 죄에는 흥미가 없었고, 그의 성서는 자연의 책이었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기적에서 신을 찾지 마라. 기적이란 자연 법칙의 위반인 셈이다. 그런데 만약 그 자연법칙을 쓴 것이 신이라면, 신이야말로 그 법칙을 가장 잘 이해하지 않겠는가? 기적은 자연적인 사건을 인간이 오해한 것 뿐이다. 지진, 홍수, 가뭄에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신은 인간의 희망과 두려움이 투사된 존재가 아니라 우주를 존재하게끔 한 창조력일 뿐이고, 우리는 자연 법칙을 연구할 때 그 창조력을 가장 잘 접할 수 있다.”


농업 발명 직후부터 수천 년동안 우리가 생각하는 신성함이란 자연에 뿌리내린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인간이 나머지 자연과는 차별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신은 인간들에게 타고 난 자아를 부정하고 억누르라고 명했는데, 신이 보기에 그 자아가 대체로 사악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면 스피노자의 신을 숭배한다는 것은 자연 법칙을 공부하고 경배하는 것이었다.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성서는 신이 불러 준 내용이 아니라 인간들이 쓴 내용”이라고 했다. 그가 볼 때 국가 공인 종교란 정신적 강압일 뿐이었다. 주요한 전통 정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초자연적 현상은 조직화된 미신일 뿐이었다. 그는 그런 마술적 사고가 자유로운 사회의 시민들에게는 위험하다고 믿었다. 이전에는 누구도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낸 사람이 없었다. 사상의 자유가 허락되는 네덜란드라고 할지라도 너무 급진적인 사고였다. 


또 다른 급진적 사고로 넘어가 보자. 오늘날 이란에 해당하는 페르시아 땅에 아브라함과 비슷한 선지자가 살았었다. 아브라함처럼 그도 정확한 출생 연대는 모른다. 약 4000년 전에 살았으리라 추측된다. 선지자의 이름은 조로아스터였고, 그는 불의 화신이었다. 불을 수백 년 동안 꺼트리지 않고 관리하는 것은 조로아스터 신자들에게 주어진 의무 중 하나였다. 조로아스터의 신 아후라 마즈다는 인간들에게 희생 의례도, 제물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요구한 것은 불을 잘 지킬 것, 그리고 좋은 생각과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을 할 것뿐이었다. 아후라 마즈다의 대척점에 해당하는 사악한 쌍둥이 앙그라 마이뉴가 있었다. 아후라 마즈다는 개를 좋아했고, 고양이를 싫어했다. 반면 앙그라 마이뉴는 고양이를 아꼈다. 당시 페르시아 사람들은 악이 추악한 머리를 쳐들 때, 그것을 앙그라 마이뉴의 계략으로 받아들였다. 개가 광견병 바이러스에 걸려 포악해 질 때도 악령 앙그라 마이뉴에 씌었다고 여겼다. 


사실 이것은 선악의 이야기, 신과 악마의 대결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포식자와 먹잇감의 이야기다. 이 경우 포식자는 미생물이다. 질병을 일으키는 미생물, 즉 병원체는 숙주에 몸에 깃들어서 자신이 일으키는 질병을 전달할 매개체로 쓰고 난 뒤에는 쓰러뜨린다. 광견병 바이러스는 개의 신경 세포로 침입해 신경계의 작동을 장악한다. 바이러스가 개의 목에 있는 신경으로 향한다. 개의 침 생산을 늘리러 가는 것이다. 개는 아무 것도 삼키지 못하고 침이 흘러나오게 된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침이 개의 몸을 떠나 다음 번 표적으로 이동할 확률이 커진다. 바이러스가 새 희생자에게 침투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바이러스에 필요한 것은 질병의 매개체가 되어 그 (사악한) 불꽃이 꺼지지 않고 전달되도록 도와줄 희생자 뿐이다. 


우리는 바이러스, 미생물, 호르몬, 자신의 DNA까지 보이지 않는 힘들에 휩싸여 있다. 우리 선조들은 사랑하던 개가 갑자기 악마적인 행동을 하거나 멀쩡하던 딸이 20대부터 갑자기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어떤 존재의 명령을 따르는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은 ‘악마의 저주’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 몸에 들어있는 40억년 된 생명의 경전, DNA. 모든 동물의 행동은 DNA에 이끌려 이뤄지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동식물이 결국에는 유전자의 탈것(이기적 유전자)보다 별로 더 나을 것 없는 존재인 것일까. 인간의 행동마저도 우리 본성에 프로그래밍된 DNA의 지시에 따라 이뤄지는 것일 뿐이라고 인정한다면, 자유 의지는 어떻게 될까? 우리가 선악을 논할 수 있을까?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가 인간의 좋고 나쁜 행동을 모두 통제할 뿐 자신들에게는 통제력이 없다고 보았던 조로아스터교 신자들보다 우리가 과연 더 나은 처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유전자가 아니라 이상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선택하고 운명을 빚어내겠다는 것을 가능성이 있는 생각일까? 


저자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이야기를 해 준다며 아소카 왕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간 행동의 양 극단을 모두 몸소 행했던 한 인간의 이야기이다. 아소카 왕의 DNA 속에서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가 싸우다가 최후에는 아후라 마즈다가 승리했다는 결론은 어떤 희망을 준다는 것일까? 아후라 마즈다 DNA는 과연 인류에게 희망의 미래를 이어가게 해 주는 것일까? (미래를 이어가는 게 꼭 희망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 질문은 남겨 둔 채 남겨진 서사를 따라가 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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