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차이나] 짐승은 길들여지지 않는다 (수호전 38회~45회)2021-04-27 15: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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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럽다. 108명의 호한을 일일이 다 생각하는 건 역시 버거운 일이다. 108이라는 숫자가 무리였다,고 하려니 켕기는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수호전>과 함께 언급되는 <삼국지>를 떠올려보자. 모르긴 해도 등장인물이 100명은 훌쩍 넘을 것 같다. 헤아려보니 위, 촉, 오 셋으로 나누면 나라 별로 36명. 위촉오 세 나라에 들지 않는 한나라 조정의 인물이나, 군벌 세력의 인물, 남만 출신의 이름까지 헤아리면 100명은 금방 넘겠다. 


무관심 때문일까. 애정이 없으면 다 똑같이 보이기 마련이다. 청소년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헤아릴 수 없는 장벽을 마주하곤 한다. 아이돌 그룹과 그 구성원의 이름을 줄줄 꿰는데 좀처럼 따라가기 버겁다. BTS가 몇 명인지도 헷갈리는 것을 보면 내 지각을 아득히 뛰어넘는 일이 분명하다. 무관심 때문이기도 하고, 관심을 기울이기 힘든 감각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꽤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느티나무를 뽑은 노지심, 호랑이를 때려죽인 무송, 게다가 호랑이 4마리를 죽인 흑선풍 이규까지. 나름 매력적인 인물이 여럿 있다. 헌데도 이야기는 어수선하고, 인물들은 어지럽다. 이른바 '백룡묘 소집회'(4권 174쪽)에 이르면 어수선하기 그지없다. 몇 명이 모였는지 세기도 귀찮고, 일일이 그들의 출신과 등장 장면을 찾아보기도 귀찮다. 사실 몰라도 책을 읽는데 크게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호전>의 등장인물은 커다란 공통점을 지닌다. 저마다 사연은 다르지만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다. 그렇다고 아주 반사회적인 인물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작그작 사회의 귀퉁이에서 살던 인물들인데, 대체로 홧김에 문제를 일으키고는 양산박으로 굴러 떨어지는 이들이다. 


사람을 죽여도 곱게 죽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독살 혹은 교살은 이들의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로 칼로 살인을 저지르며, 그래서 현장에는 피가 낭자하다. (그런 면에서 사람을 '때려죽인' 노지심의 살해는 가장 소박한 축에 속한다.) 칼로 찌르고 베고 찢는데 그치지 않는다. 심장과 오장을 드러내며 인육을 먹기까지 한다.


"칼로 허벅지부터 잘라 좋은 것을 골라 즉시 숯불에 구워 안주로 삼았다. 한 조각을 자르면 바로 구웠다. 황문병의 살점을 잘라냈고, 어느새 이규는 칼로 가슴을 찔러 심장과 간을 꺼내 두령들과 해장국을 끓였다."(4권 190쪽)


이 대목을 읽고는 '짐승이다'라는 탄성이 나왔다. <수호전>의 작가는 무엇하러 이런 잔인한 장면을 곳곳에 배치했을까? 피 맛에 굶주렸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 <수호전>이 짐승들의 이야기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수호전>의 인물이 몰려드는 양산박은 조직도 체계도 없이 느슨하게 구성된다. 양산박은 순전히 짐승들의 공간이다.


절반을 넘게 읽었는데 각 인물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 이유를 알겠다. <수호전>은 사건을 통해 성격이 드러나고 서사를 통해 역할이 구체화되는 식이 아니다. 인물 간의 관계 역시 모호하다. <수호전>의 주요 인물들은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지도 않는다. 차라리 노지심파와 송강파가 갈라져 싸운다면 각 인물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예를 들어 <삼국지>에서 '장비 - 허저 - 전위 - 여포' 따위를 생각해보자. 저마다 이른바 '무쌍을 찍는' 호걸들이지만 각각을 구분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수호전>은? 굳이 비교하면 <서유기>에서 수 없이 등장하는 요괴들과 비슷하다. 그게 그거 같고 저게 저거 같다.


이규가 호랑이 넷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송강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호랑이 네 마리를 죽였으나, 오늘 우리 산채에는 살아 있는 호랑이 두 마리가 늘어났으니 축하해야겠다."(4권 262쪽)


이규가 어머니를 잃었음에도 송강은 두 호랑이, 청안호 이운과 소면호 주부를 얻은 것만을 즐거워한다. 김성탄은 이렇게 기술한 것을 볼 때 작가가 송강을 심히 미워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꾸로 이는 하나의 실상이기도 하다. '철우', 이규 역시 한 마리의 짐승 아닌가.


보통 짐승의 표상은 인간성의 상실로 해석되곤 한다. 이러한 판단은 인간이 짐승과는 다르다는 자기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자기규정은 인간 안에 짐승의 특성이 있음을 가리는 것이기도 하다. 과연 인간과 짐승은 얼마나 다른가. 실상은 똑같은 행위인데 거기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아닐까?


중화라는 문명의 표상은 오랑캐를 타자화하는 것을 통해 성립한다. 통상적으로는 중화가 '아닌 것'이 오랑캐이지만 실상은 오랑캐가 '아닌 것'이 중화이다. '중국'이란 거기가 아니라 바로 여기가 중심이라는 말 아닌가. 따라서 '문명-인간성'이란 공들여 가꿔야 하는 것이다. 오랑캐가 아니기 위해서 애써 노력해야 한다. 이는 거꾸로 어느 순간 툭 떨어져 오랑캐, 나아가 금수禽獸 그러니까 짐승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수호전>의 인물들은 '인의예지'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이 짐승의 존재는 인간적인 덕목의 허상을 직면하게 만든다. 정도는 다르나 이런 인간 군상들의 모습은 조금씩 우리 일상의 주변에 있다. 누구든 마음 한켠에 호랑이든 표범이든 하다못해 살쾡이든 한 마리씩 자리 잡고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오늘날처럼 가상공간이 일상이 된 시대에는 어딘가 사이버 양산박이 있기 마련이다.


곳곳에 객잔이 등장하고 연회가 끊이지 않는 까닭을 알겠다. <수호전>은 먹고 마시는 식욕의 본능에 충실한 짐승들의 이야기이다. 식욕이란 짐승적인, 가장 짐승적인 욕망이다. 따라서 성욕을 다루는 부분의 차이에 주목하자.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성욕을 적나라하게 서술하지는 않는다. 성욕이란 국國-가家의 재생산을 지탱하는 욕망이라는 점에서 은밀히 긍정되어야 하는 욕망이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성욕을 권장하지는 않지만 욕망의 흐름이 국-가의 재생산을 위협할 경우 가차 없이 처단한다. 간통에 대한 잔혹한 처벌은 이를 잘 보여준다.


<수호전>의 여인, 염파석, 반금련, 반교운의 죽음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들은 외간남자와 사통을 하다 발각되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다. 이들의 죽음 역시 국-가의 재생산을 배신한 자에게 내려진 천벌이라 해야 할까? 그러나 <수호전>은 이들의 모습을 통해 또 다른 욕망을 은근슬쩍 드러낸다. 반금련과 서문경의 은밀한 만남, 반교운의 일탈을 엿보는 석수의 시선은 은근히 또 다른 욕망을 충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짐승들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펼쳐지는 섬세한 서술. 적어도 일탈을 다루는 <수호전>의 방식은 국-가의 재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짐승적인, 가장 짐승적인 이규는 문득 이렇게 속내를 밝혔다. 


"이렇게 많은 사람으로 반란을 일으키면 두려울 게 뭐가 있어? 조개 형님이 대송 황제가 되고 송강 형이 소송 황제가 되며 오 선생이 승상이 되고 공손 도사가 국사가 되면 우리 모두가 장군이 되어 동경으로 쳐들어가 개 같은 황제 자리를 빼앗고 즐기면 좋겠다. 여기 거지 같은 호숫가에 머무는 것보다 훨씬 좋지 않겠어?" (4권 199쪽)


헛소리를 그만 닥치라는 대종의 꾸짖음에, 쓸데없이 다시 헛소리를 하면 대가리를 잘라버리겠다는 대종의 엄포에 이규는 이렇게 대꾸할 뿐이었다.


"아이고, 만일 내 대가리를 자른다 해도 금방 다시 자랄 거요. 나는 술만 먹을 수 있으면 그만이야!" (같은 쪽)


이규의 저 말은 목이 잘린 뒤에도 황제黃帝를 대적했던 형천刑天을 떠올리게 한다. 문명의 수호자 황제는 형천의 목을 잘랐지만 그는 다시 창과 방패를 들어 황제와 맞섰다. <수호전>이 매력적인 것은 그렇게 목을 잘라고도 사라지지 않는 짐승의 덕목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딘가 황제의 자손이 있다면 또 어딘가에는 형천의 자손도 생생히 살아있을 테니. 그렇게 짐승들은 죽지도 길들여지지도 않고 있다.


수호전을 읽으니 형천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어서 술과 고기를 가져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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