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푸코] 이전과 똑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 <푸코의 맑스> 0627 발제2019-06-25 23:2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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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푸코의 맑스 마지막 부분 발제.hwp (33KB)

푸코와 뜨롬바도리의 대담이 끝났다. 뜨롬바도리는 푸코와의 이 대담을 통해, 유럽 저항운동 특유의 정신 및 뿌리가 프랑스 지식인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조망해보려 했다. 이데올로기적 방어만 고집하는 맑스주의의 취약성을 넘어서는 무엇을 발견하고자 한 것이다. 권력에 대한 푸코의 담론들은 확실히 고전적 맑스주의로부터 벗어나있다. 푸코는 이성을 그 자체로 폭력이라고 보며, 진리의 지배가 이런 사실을 은폐한다고 지적한다. 푸코의 고고학은 ‘사건들’에 대한 서술을 통해 주체성과 모든 ‘사상의 역사’를 넘어서려고 한다. (176쪽)

 

푸코를 향한 주된 비판 중 하나는 권력관계의 실재적 주체를 구체화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다. 푸코에게 개인은 ‘권력의 효과’인 동시에 ‘권력의 절합요소’이다. 이런 상황에서 투쟁의 의미는 무엇이며, 무엇이 ‘권력관계’의 조건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권력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푸코의 작업은 변증법적 비판 속에서 적대를 해결하지 못하며, 오히려 변증법적 해결책을 파기한다. 파기의 결과는 ‘실천의 분출’로서의 혁명 개념에 대한 거부이다. (179쪽) 이 지점에서 뜨롬바도리는 푸코의 이론이 일반적인 운동으로 확장될 수 없다고 확신한다. 푸코의 이론이 ‘정치에 대한 순수하고 단순한 거부’에 그칠 것이라 보는 뜨롬바도리는, 푸코가 구체적 대응방안을 가설화하는 데 실패했다고 단정 짓는다. 나아가 이것이 권력을 군주에게 다시 갖다 바치는 방식의, 정치적인 것으로부터의 자기 배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과 ‘정치적인 것’을 뜨롬바도리가 맑스주의적 의미의 ‘권력’과 ‘정치적인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행사되는 것이지 소유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행사를 유보하거나 제한당할 수는 있어도 권력을 양도할 수는 없다. ‘정치적인 것’도 우리의 일상과 신체에까지 산포되어 있기에, 푸코에게 있어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자기를 배제하는 일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푸코가 말한 ‘권력’과 ‘정치’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뜨롬바도리는 푸코의 연구를 실천과는 먼 도구적 성격의 꿈처럼 여긴다. 다만 이런 면이 푸코가 책을 계속 써나가는 원동력이라 본다. ‘자기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그리고 이전과 똑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183쪽) 뜨롬바도리는 푸코가 말한 ‘혁명’이 어떻게 시작되고 진행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뜨롬바도리의 지적대로, 푸코는 혁명을 ‘실천의 분출’로 보지 않는다. 푸코는 이론과 실천, 실천과 혁명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려고 했다. 푸코가 1972년에 들뢰즈와 나눈 대화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들뢰즈는 이론의 발전에 실천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여기서 실천은 이론의 적용이 아니며, 이론과 실천은 하나의 앙상블 내의 연계체계이다. 투쟁은 대의代議될 수 없다. 오직 이론과 실천을 연계하는 행동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들뢰즈의 입장이다. 푸코는 나아가 이론 자체가 하나의 실천이며, 투쟁이라고 본다. 68년 5월에 대중이 지식인들을 거부했을 때, 푸코는 그 거부에서 권력과 지식에 대한 거부를 동시에 읽어냈다. 지식인들이 자신의 역할을 더 이상 ‘계몽’에 두지 말고, 권력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푸코의 입장이다.

 

맑스주의자들의 우려와 달리 ‘혁명’에 대한 푸코와 들뢰즈의 입장은 단호하다. 이론은 투쟁을 위한 연장이며, 유용하고 기능적이어야 한다. 부분적 개혁은 어리석은 위선이며, 개혁의 결과는 권력의 재정비와 새로운 권력의 분배로 나아갈 뿐이다. 대의할 수 없는 개인들의 국지적이고 혁명적인 행동들에 의해 이론은 다양화된다. 들뢰즈는 푸코가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하는 것의 무례함’을 일깨우면서, 대의제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서 더 나아가 새로운 실천의 방식을 제시했다고 평가한다. 푸코는 ‘권력이 없다고 여겨졌던 이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 대항담론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권력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장소인 감옥과 수용소에 푸코가 주목하는 이유이다.

 

감옥은 권력의 실체(폭력)가 드러나는 장소인 동시에, 권력이 정의와 도덕의 힘으로 정당화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푸코는 반-사법 투쟁이 곧 권력에 대한 투쟁이라고 본다. 반-사법 투쟁은 부정의에 대항하는 투쟁이나 사법제도의 공평성을 증진시키는 투쟁이 아니다. 푸코의 문제제기는 ‘더 정의로운’ 결과가 아니라 그 사회 전체를 유지하는 정당성 자체를 향한다. 대중은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름으로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할 때, 이들의 권력은 잘못된 대표권을 다른 대표권으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행사되지 않을 것이다.

 

푸코는 투쟁의 어려움이, 우리가 권력을 잘 알지 못하는 데서 온다고 지적한다. 권력과 관련한 개념들은 분명하지 않으며, 작동방식도 명쾌하지 않다. 권력의 총체성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이 총체적이고 조직적일 필요는 없다. 투쟁은 우리가 접하는 권력의 특정한 원천들(소기업 사장·임대주택 경영자·노동조합 대표·판사·신문사 편집국장 등)을 둘러싸고 산개한 형태로 진행되어야 한다. 권력의 그물망 일부를 차지하는 그 원천들에 대한 고발과 투쟁은 권력을 전복하는 첫걸음이며, 또 다른 투쟁의 시작이다. 투쟁의 담론은 의식화 이전의 주체와 대립한다기보다 불명확함에 대립한다. 의도적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드러내는 노력이 바로 전복이며, 투쟁이다.

 

들뢰즈의 말대로, 현실의 혁명적 실천이 다양한 영역들에 퍼져있음은 약점도 결함도 아니다. 오히려 총체화하는 권력에 대한 개인들의 욕망은 파시즘과 같은 반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거대권력에 저항하는 결집을 촉구하는 맑스주의자들의 주장과 푸코/들뢰즈의 주장이 가장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권력이 총체화하는 경향을 가질 때, 권력의 거점으로서 개인들은 총체화를 수행하기도 하고 권력에 환멸을 느끼며 저항하기도 한다. 두 가지 경향이 한 인물 안에서도 동시에 혹은 번갈아가며 나타날 수도 있다. 문제는 저항의 방식이다. 급진적인 투쟁은 타협이나 개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투쟁이 권력의 총체화에 저항하려면, ‘진리’의 형식을 띤 이론적 총체화의 형식을 띠지 않아야 한다. 투쟁이 ‘진리’나 ‘정의’의 이름으로 전개될 때, 이는 총체화하는 권력과 동일한 체계 안에 있으며 동일한 권력을 재배치하는 데 불과할 수 있다.

 

권력은 사회 안에 통용되는 정당성이나 진리의 지배를 통해 총체화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신체와 일상에 분산되어 있다. 이 미시적인 형태의 권력, 분산된 전체에 저항해야만 권력의 적용지점을 건드릴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권력을 폭파하기 위한 투쟁이 사소한 요구에서 시작하여 나아가는 방향이다. 푸코는 이런 사소하고 부분적인 투쟁들이 분명히 노동자들의 계급투쟁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정의’와 ‘진리’가 계급 착취의 효율성을 중심으로 구성될 때, 이 싸움에서 실질적으로 투쟁을 이끌 수 있는 이들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이기 때문이다. 투쟁에 있어 완전히 다른 방식을 택했던 푸코가 맑스주의와 다시 연결되는 듯 보이는 중요한 지점이다.

 

물론 푸코는 맑스주의자들처럼 ‘주체의 의식화’를 투쟁의 동력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주체가 한 사회의 정당성을 의심할 때 전복이 시작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사회의 ‘진리’와 ‘정의’에 기대지 않고 다르게 사유하기. 푸코가 계속해서 책을 쓰는 이유라고 뜨롬바도리가 지적했던 바로 그 이유가 푸코에게는 혁명의 시작이다. ‘자기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그리고 이전과 똑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주체를 다르게 구성하기 위해 푸코는 사유하고 행동했다. 그 자신이 스스로의 대표자로서 다른 누군가가 대의할 수 없는 자기의 진실에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푸코의 혁명론은 어쩌면 대의제를 거부하는 윤리학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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