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화개집> :: 2018-1017(수) 세미나 회원 모집 +2
기픈옹달
/ 2018-09-11
/ 조회 3,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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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화개집> :: 2018-1017(수)
[루쉰] <화개집> :: 세미나개요
시 간 : 2018-1017 ~ 1128 / 매주(수) pm2:00 (중간에도 참여가능)
교 재 : 《화개집 & 화개집속편》, 그린비
회 비 : 월 2만원(세미나 첫날 반장에게 주면 됩니다.)
월 2만원으로 다른 세미나에도 참가할 수 있습니다.
신 청 : 비밀댓글로 이름(닉네임), 휴대폰, 메일정보를 남겨주세요.
튜 터 : 기픈옹달 ([email protected] / O1O-51O1-57O7)
[루쉰] <화개집> :: 세미나소개
얼마전 중국을 다녀오면서 서점을 둘러 보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루쉰에 관한 책을 찾아보았지만 생각보다 힘들었습니다.
그의 글보다 후쓰, 장제스 등에 대한 글이 우선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편, 학생들을 위한 교재 가운데는 문언文言과 고문古文에 관한 책이 많았습니다.
루쉰의 글보다, 그에 대한 책보다 경전과 전통에 대한 글이 많은 것은 달라진 중국의 현주소를 보여줍니다.
전통의 파괴자. '중국 책은 적게 보거나 아예 보지 말아야 한다'는 루쉰의 말은 공염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루쉰의 글이 다시 적막을 향해 잠기는 이때야 말로 루쉰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지점입니다.
그의 반시대성. 한 시대의 운동의 기수로서가 아닌 철저한 반동의 투사로서 루쉰을 읽어야 합니다.
미래를 예견하거나, 선취한 계몽지식인의 모습이 아닌 늘 '현재'를 살아간 그의 분투의 흔적을 만납니다.
<화개집>, <화개집속편>, <화개집속편의 속편>은 1925에서 1927년까지 풍랑 위에 있었던 루쉰의 삶을 증거합니다.
루쉰은 베이징에서 샤먼으로, 샤먼에서 다시 광저우로 이동하며 다양한 삶의 굴곡을 마주합니다.
북방의 모래바람을 벗어나 남방의 바닷바람을 맞으나, 거칠기는 한결 같았습니다.
늘 그렇듯, 집요하고도 꾸준한 글쓰기.
웃고, 화내고, 울고, 욕하는 생생한 삶이 여기에 있습니다.
10.17_ 《화개집》 : <제기> ~ <문득 생각나는 것(5~6)>
10.24_ 《화개집》 : <잡감> ~ <여백 메우기>
10.31_ 《화개집》 : <KS군에게 답함> ~ <후기>
11.07_ 《화개집속편》 : <소인> ~ <황제에 대하여>
11.14_ 《화개집속편》 : <꽃이 없는 장미> ~ <반눙을 위해 '하전'의 서문을 쓰고 난 뒤에 쓰다>
11.21_ 《화개집속편》 : <즉흥일기> ~ <상하이에서 보내는 편지>
11.28_ 《화개집속편의 속편》
[루쉰] <화개집> :: '화개집華蓋集'이란..?
<화개집 : 제기>
내가 알기로, 위대한 인물은 삼세를 꿰뚫어보고 일체를 관조할 수 있으며, 대고뇌를 겪고 대환희를 맛보며 대자비를 베풀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또한 알고 있다. 이렇게 하려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고목 아래에 앉아, 고요히 관찰하고 말없이 생각에 잠겨 천안통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간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인간 세상을 더욱 깊이, 더욱 넓게 알게 되며, 그리하여 하시는 말씀마다 더욱 고상하고 더욱 위대해져, 마침내 천인사가 되셨음을.
나는 어렸을 적에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곤 했지만, 지금까지도 땅 위에 있으면서 사소한 상처조차 제때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마음과 뜻이 탁 트여, ‘정인군자’처럼 공평타당하고 공명정대한 주장을 펼 겨를이 있겠는가? 마치 물에 젖은 작은 벌처럼 진흙 위에서 이리저리 기어다닐 뿐이니, 감히 양옥집에 사는 통달한 이와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양옥집에 사는 통달한 이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나름의 슬픔과 노여움이 있는 법이다.
이 병통의 뿌리는 내가 인간 세상에 살고 또 보통 사람이기에. ‘화개운’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
내게 이런 단평을 짓지 말라고 권한 사람도 있다. 그 호의를 나는 매우 고맙게 여기고 있으며, 창작의 소중함을 모르는 바도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지어야 할 때라면, 아마 아무래도 이런 것을 지어야 할 것이다. 만약 예술의 궁전에 이렇게 번거로운 금령이 있다면, 차라리 들어가지 않는 게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막 위에 선 채 바람에 휘날리는 모래와 구르는 돌을 바라보면서, 기쁘면 크게 웃고, 슬프면 크게 울부짖고, 화가 나면 마구 욕하고, 설사 모래와 자갈에 온몸이 거칠어지고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며, 때로 자신의 엉킨 피를 어루만지면서 꽃무늬인 양 여길지라도, 중국의 문사들을 좇아 셰익스피어를 모시고 버터 바른 빵을 먹는 재미만 못하리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
지금은 한 해의 마지막 깊은 밤, 이 밤도 깊어 거의 끝나간다. 나의 생명, 적어도 생명의 일부는 이미 이 무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적는 데에 쓰여졌다. 하지만 내가 얻은 것은 내 자신의 영혼의 황량함과 거칠음뿐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이것들을 겁내지도, 덮어 두고 싶지도 않으며, 게다가 정말이지 조금은 이것들을 아끼고 있다. 이건 내가 모래바람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살아온 흔적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모래바람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살고 있다고 여기는 이라면 이 말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화개집속편 : 소인>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우주의 심오한 의미나 인생의 진리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내가 겪고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묵혔다가 이것이 아무리 깊이가 없고 극단적이더라도 가끔 붓을 들어 써 내려갔을 뿐이다. 좀 과정해서 말하자면 슬프고 기쁠 때의 울음과 노래 같은 것이다. 당시에도 이 글을 빌려 분을 풀고 감정을 토로한 것에 불과한데 지금 와서 누군가와 이른바 공리와 정의를 다툴 생각은 하나도 없다. 물론 당신이 이렇게 해야 한다는데 굳이 내가 다르게 하겠다고 한 적은 있었다. 일부러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이마를 조아리지 않겠다고 한 적은 있었다. 고상하고 장엄한 가면을 일부러 쓱 벗겨 본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를 제외한다면 대단한 행동이랄 것은 없다. 명실상부하게 ‘잡감’일 따름이다.
(…)
책 이름은? 해는 바뀌었지만 상황이 달라진 것이 없어서 여전히 <화개집>이라고 붙였다. 그렇지만 어쨌든 해가 바뀌긴 바뀌었으니까 할 수 없이 ‘속편’이라는 두 글자를 덧붙인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집요함과 꾸준함을 위하여!
신청합니다.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넵. 올해도 루쉰과 함께 한 해를 마무리하겠네요. ^^
열심히 읽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