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공백3] 최승자의 시 읽기 :: 0303(금)
희음
/ 2017-02-27
/ 조회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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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3] 최승자의 시 읽기 :: 0303(금)
일 시 : 2017-0303(금) pm2:00~5:00
일 정 : 최승자의 시 (당번_오라클 : 詩소개-후기-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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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원 : 성혜, 오라클, 정아은, 자연, 토라진, 마도요, 희음
반 장 : 희 음 (문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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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나는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이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_『이 시대의 사랑』 1부_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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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릎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 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아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_『이 시대의 사랑』 1부_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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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인의 종말
어느 빛 밝은 아침
잠실 독신자 아파트 방에
한 여자의 시체가 누워 있다.
식은 몸뚱어리로부터
한때 뜨거웠던 숨결
한때 빛났던 꿈결이
꾸륵꾸륵 새어나오고
세상을 향한 영원한 부끄러움.
그녀의 맨발 한 짝이
이불 밖으로 미안한 듯 빠져나와 있다.
산발한 머리카락으로부터
희푸른 희푸른 연기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일찍이 절망의 골수분자였던
그녀의 뇌 세포가 방바닥에
흥건하게 쏟아져 나와
구더기처럼 꿈틀거린다.
_『이 시대의 사랑』 1부_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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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 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헤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 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_『이 시대의 사랑』 1부_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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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오
_『즐거운 일기』 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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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_『기억의 집』 198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