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공백] 진은영의 시 읽기 :: 0729(금) +10
희음
/ 2016-07-25
/ 조회 7,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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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2016-0729(금) pm2:00~5:00
일 정 : 진은영의 시 (당번_오라클 : 詩소개-후기-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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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비 : 월 2만원 (세미나 첫날 반장에게 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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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원 : 희음, 오라클, 케테르, 아침, 선우, 책비, 무긍, 흴옹, 이응, 반디, 토라진, 소소, 찬영
반 장 : 희 음 (시인 문희정. 010–8943–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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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왼쪽 귓속에서 온 세상의 개들이 짖었기 때문에
동생 테오가 물어뜯기며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
나는 귀를 잘라버렸다
손에 쥔 칼날 끝에서
빨간 버찌가
텅 빈 유화지 위로 떨어진다
한 개의 귀만 남았을 때
들을 수 있었다
밤하늘에 얼마나 별이 빛나고
사이프러스 나무 위로 색깔들이 얼마나 메아리치는지
왼쪽 귀에서 세계가 지르는 비명을 듣느라
오른쪽 귓속에서 울리는 피의 휘파람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커다란 귀를 잘라
바람 소리 요란한 밀밭에 던져버렸다
살점을 뜯으러 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
두 귀를 다 자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멍청한 표정으로 내 자화상을 바라본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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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창백한 달빛에 네가 나의 여윈 팔과 다리를 만져보고 있다
밤이 목초 향기의 커튼을 살짝 들치고 엿보고 있다
달빛 아래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빨간 손전등 두개의 빛이
가위처럼 회청색 하늘을 자르고 있다
창 전면에 롤스크린이 쳐진 정오의 방처럼
책의 몇 줄이 환해질 때가 있다
창밖을 지나가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여기에 네가 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가 있다
늪 위로 쏟아지는 버드나무 노란 꽃가루가 있다
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이 있다
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을 때가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깨진 나팔의 비명처럼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처럼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처럼
집 둘레에 노래가 있다
『훔쳐가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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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
스위치를 올려주소서
깜깜한 방 속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대신, 왜 그랬을까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밤거리로 나가 무신론자,
그는 어디로 굴러가는지 모르는
속이 빈 커다란 드럼통을 요란하게 굴렸을까
유신론자는 겸손해진다
신이 푸른색 양피지에 적어
돌돌 만 수수께끼 두루마리를
끝도 없이 자기 앞에 늘어놓을 때
그러나 무신론자, 그에게는 다만 즐거운 일
여름이 되면 장미 정원에서
수만 개의 꽃송이가 저절로 피어나듯
수수께끼들이 뿜어내는 향기를 맡으면 되는 일이다
피지 않고 떨어지는 꽃봉오리도 그런대로 좋은 법
유신론자는 매일 확인한다
어디에나 똑같이 찍힌 신의 엄지손가락 지문을
돛단배 사무사과와 기란 화산 무지개
수염고래가 뿜어내는 투명한 물줄기에서
잠자리 날개의 은빛 무늬에서
그런 관점을 비웃을 틈은 없다
사물의 바닷가에 기기묘묘하게 그려진 모래 그림을 관찰하느라
무신론자, 그는 항상 바쁘니까
순간의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잠깐 동안에
한 번에 똑같지 않은 그 기하학적 연속 무늬를
그는 어리석다, 유신론자가 보기엔
이미 만들어진 구름다리를 두고
차들이 과속으로 달리는 도로 속으로 들어가니까
노란색 페인트 통을 들고
자신이 지나갈 건널목을 멋대로 그리면서
유신론자처럼 무신론자도 죽는다
두 사람은 수줍게 머뭇거리며 나아간다
하느님의 두 손바닥으로
밤하늘 별로 만들어진 저울 위로
영혼의 무게는 똑같다
사이좋게 먹으려고 두 쪽으로 쪼개 놓은 사과처럼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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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로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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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사라졌다
위대한 악을 상속 받았던 도둑들은 모두 사라졌다
밤(夜) 속에 가득하던 전갈들도
혼자 바닷가를 걷다가
바위와 바위 사이 구멍에 끼인 발
부어올라 빠지지 않는,
밀물이 들어오는 시간
검은 비닐 봉지조차 가끔은
주황 지느러미가 빛나는 금붕어를 쏟아낸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이런 예언을 듣고,
모든 표정이 사라지는 한밤중에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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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사랑
만일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는 참 좋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를 위해 시를 써줄 텐데
너는 집에 도착할 텐데
그리하여 네가 발을 씻고
머리와 발가락으로 차가운 두 벽에 닿은 채 잠이 든다면
젖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이 든다면
너의 꿈속으로 사랑에 불타는 중인 드넓은 성채를 보낼 텐데
오월의 사과나무꽃 핀 숲, 그 가지들의 겨드랑이를 흔드는 연한 바람을
초콜릿과 박하의 부드러운 망치와 우체통과 기차와
처음 본 시골길을 줄 텐데
갓 뜯은 술병과 팔랑거리는 흰 날개와
몸의 영원한 피크닉을
그 모든 순간을, 모든 사물이 담긴 한 줄의 시를 써줄 텐데
차 한 잔 마시는 기분으로 일생이 흘러가는 시를 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얼마나!
너는 좋을 텐데
그녀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큰 빈집이 된 가슴을
혀 위로 검은 촛농이 떨어지는 밤을
밤의 민들레 홀씨처럼 알 수 없는 곳으로만 날아가는 시들을
네가 쓰지 않아도 좋을 텐데
『훔쳐가는 노래』
댓글목록
gkpaul님의 댓글
gkpaul
사내가 초록 페인트 통을 엎지른다
나는 붉은 색이 없다
손목을 잘라야겠다
봄이 왔다 / 진은영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초록 페인트통을 엎지른 사내와
노란색 페인트 통을 들고 자신이 지나갈 건널목을 멋대로 그리는 무신론자는
같은 사람 같지요. 페/인/트/칠/장/이! 혹은 페인트가게 알바생?
희음님의 댓글
희음짧은 시는 이렇게 쓰는 것이라는 걸(이 정도는 써줘야 한다는 걸) 보여준 시라고나 할까요^^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진은영 시 정말 재미있어요 신선하고 ~~ ^^ 고마워요 수고많아요 희음님 ~~
희음님의 댓글
희음
하필 오라클 님께서 대신 수고해 주신 날 이런 응원 댓글들이 달리다니 참 송구스럽고 부끄러워요.
오라클 님 시 고르시는 수준이 절 더욱 작아지게 만들고 말입니다. 다시금 감사를~^^
삼월님의 댓글
삼월
이 세미나에 참여하진 않아도 매주 월요일 시 공지가 올라오면 들어와서 봅니다.
전철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시를 읽을 때의 느낌은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아침 전철 안에서는 진은영 시인의 시들을 읽다가
잠시 제가 어디에 앉아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잊어버렸습니다.
희귀한 고대 유물처럼 제 안에서 무언가를 발굴해낸 기분입니다.
너무 흔한 말이지만, 감사합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이런 삼월 님, 지하철 안에서 점점 더 먼 데를 바라보는 시선이 되어가는 삼월 님을 그리며, 저 또한 아득해집니다. 무덥고 외롭고 깊고 빛나는 밤을 선물 받은 기분이랄까요.
거짓말 약간 보태, 모비딕을 따라서 끝을 알 수 없는 검푸른 바다 위를 밤도 낮도 모르는 채로 떠돌아다니는 그 느낌을 알 것도 같은...^^;;
흴옹님의 댓글
흴옹
죄송한 말씀드립니다.
집안행사로 인해 이번 세미나에 불참러가 되어야할 것 같아요.
무더운 여름 회원여러분들 모두 건강 조심하세요.
희음님의 댓글
희음다시 뵈올 날이 마이 기다려질 거랍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녜, 흴옹도 더위와 함께 잘 지내다, 곧 돌아오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