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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말과 사물> 9.인간과 인간의 분신들_1213 발제
아라차 / 2018-12-12 / 조회 6,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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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물_9.인간과 인간의 분실들_2018.1213발제

 

  1. 언어의 귀환

고전주의와 근대의 문턱은 말이 더 이상 재현과 교차하지 않고 사물의 인식을 위한 자율적인 격자를 제공하지 않게 되었을 때이다. 일단 재현에서 떨어져 나온 언어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분산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분산으로 인해 특권적인 지위는 아니지만 적어도 노농이나 생명의 경우에 비해서는 특이한 듯한 운명이 언어에 부과된다. 언어는 거의 철학적 성찰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19세기 말에야 언어는 사유의 영역 안으로 직접 되돌아갔다. 니체가 최초로 철학의 과제를 언어에 과한 철저한 성찰과 밀접하게 관련짓지 않았다면 20세기에야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이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누가 지칭되는가, 누가 말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었다. 실제로 언어가 전적으로 결집되는 것은 바로 거기, 담론을 행하고 더 심층적으로는 발언권을 갖는 사람에게서이다. 

언어의 분산은 사실 담론의 소멸로 지칭할 수 있는 고고학적 사건과 근본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하나의 단일한 공간에서 언어의 광범위한 작용을 재발견하는 것 또한 이전 세기에 구성된 지식의 방식을 종결하는 것이자 전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사유를 향해 도약하는 것일지 모른다. 

 

2. 왕의 자리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인물을 마지막 순간에 마치 인위적인 반전 때문인 것처럼 끌어들이는 것이 관건이다. 이 모호한 자리의 주인은 주체이다. 고전주의적 사유에서 재현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재현 속에서 묘사되지만 이미지나 방영으로 식별되는 사람, 이 ‘그림으로서의 재현’에서 모든 선이 교하는 사람은 결코 재현에 현존하지 않는다. 18세기 말 이전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은 지식의 조물주가 고작 200년 전에 손수 만들어 낸 아주 최근의 피조물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에서 ‘자연’의 기능과 ‘인간’의 기능이 일대일로 대립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연과 인간은 어느 하나가 없으면 재현될 수 없다. 인간은 경제학, 문헌학, 생물학의 법칙들에 따라 살아가고 말하고 일하면서도, 세계의 한계에서 솟아오를 수 없었다. 존재물들의 연쇄는 자연의 작용에 의해 인간과 연결되면서 담론이 된다. 대립적이지만 어느 하나가 없으면 실행될 수 없으므로 상보적인 두 기능에 입각한 자연과 인간의 소통은 이론에 폭넓은 영향을 미친다. 

재현과 사물의 공통담론, 자연과 인간이 교차하는 장소로서의 고전주의적 언어로 인해, ‘인간 과학’일지 모르는 어떤 것이 완전히 배제된다는 점. 이 언어 안에서 맺어지는 것은 재현과 존재이므로, 서양 문화에서 이 언어를 사용하는 한, 인간의 삶을 그 자체로 문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전주의적 담론이 지속되는 한 코기토에 함축되어 있는 존재방식에 관한 검토는 명료하게 표명될 수 없었다. 재현을 피해가는 문제의식만이 상이한 담론을 표명할 수 있다. 


3. 유한성의 분석론

자연사가 생물학으로, 부의 분석이 경제학으로, 언어에 관한 성찰이 문헌학으로 바뀌고 존재와 재현의 공통의 장소인 고전주의적 담론이 사라질 때, 이와 같은 고고학적 변동의 깊은 동향 속에서, 인간은 지식의 대상인 동시에 인식의 주체라는 모순적인 입장을 띠고 출현한다. 생물, 교환의 대상, 말이 그때까지 말의 당연한 현장이었던 재현을 떠나 사물의 심층 속으로 물러나고 생명, 생산, 언어의 법칙에 따라 자체 안으로 들어박힐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존재와 함께 재현의 능력을 지니고서, 생물과 교환의 대상 그리고 말이 떠난 버린 빈 공간에서 솟아오른다. 

우리는 뇌의 해부학적 구조나 생산비의 메커니즘 또는 인도유럽어족의 동사 변화 체계를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의 유한성은 실증성의 가장 완벽하게 정화된 순수한 본질이 아니라, 실증성이 나타날 수 있는 출발점이다. 한계는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부과되는 한정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사실로 서 실재한다는 점에만 달려 있고 모든 구체적인 한계의 실증성 쪽으로 열려 있는 근본적인 유한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경험성의 핵심 자체에서 유한성의 분석론으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내려갈 의무가 드러나는데, 거기에서 인간의 존재는 인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인간에게 보여주는 모든 형태의 실증성에 근거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근대적의 사유의 미래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는 이 유한성의 분석론이 곧 보게 되는 것은 바로 근본적인 것 내에서 실증적인 것의 반복에 의해 열린 좁고도 드넓은 공간 안에서이다. 선험적인 것이 경험적인 것을, 코기토가 사유되지 않은 것을, 기원의 회귀가 기원의 후퇴를 반복하는 것을 연속적으로 곧 보게 되는 것도 바로 거기에서이며, 고전주의적 철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동일자에 대한 사유가 곧 명확히 드러나게 되는 것도 바로 거기에서이다. 

19세기 초엽에 형성되는 경험으로 유한성은 이제 무한에 관한 사유의 내부가 아니라 유한한 지식에 의해 유한한 삶의 구체적인 형태로 제시되는 경험 내용의 핵심에서 발견된다. 고전주의적 사유에서 유한성은 육체, 욕구, 언어, 그리고 이것들에 관한 가능하고 한정된 인식인 부정적인 형태들을 설명해 주는 반면, 근대적 사유에서 생명, 생산, 노동의 실증성은 인식의 제한된 성격을 생명, 생산, 노동 사이의 부정적인 상관관계로 정당화하며, 역으로 인식의 한계는 비록 한정된 경험속에서이지만 생명, 노동, 언어가 무엇인가를 알 가능성에 확실한 근거를 제공한다. 근대적 사유는 형이상학적 진전에 따라 반론에 봉착하고 생명과 노동 그리고 언어가 유한성의 분석론으로서 가치를 지는 한 생명, 노동, 언어의 관한 성찰에 의해 형이상학의 종언이 표면화된다는 것, 즉 생명의 철학은 형이상학을 환상의 장막이라고, 노동의 철학은 형이상학을 소외된 사유와 이데올로기라고, 언어의 철학은 형이상학을 문화의 부차적인 현상이라고 비난한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종언은 서양의 사유에서 일어난 훨씬 더 복잡한 사건의 부정적인 양상일 뿐이다. 이 사건은 바로 인간의 출현이다. 

 

4.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

유한성의 분석론에서 인간은 기묘한 경험적-선험적 쌍을 이루며 두 가지 종류의 분석이 발생한다. 하나는 인식의 본질이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선험적 분석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에 역사적, 사회적 또는 경제적 조건이 있고, 인간들 사이에 얽히는 관계의 내부에서 인식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 유형의 분석은 서로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아 보인다. 내용 자체가 선험적 반성으로 작용하므로, 두 가지 분석 모두 결코 바깥의 다른 근거에 기대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상 인식의 본질이나 역사에 대한 탐구는 비판의 고유한 차원을 경험적 인식의 내용쪽으로 몰아간다. 콩트와 마르크스는 바로 인간에 관한 담론의 다가올 객관적 진실로서의 종말론과 대상의 진실을 토대로 명시되는 담론의 진실로서의 실증주의가 고고학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의 증인이다. 육체의 경험과 문화의 경험이 다같이 뿌리고 내리고 있을 제3항을 매개로 이 양자를 맞물릴 수 있게 해 줄 분석으로 구실할 담론의 장소는 체험의 분석, 현상학이다.

 

 5. 코기토와 사유되지 않은 것

데카르트 철학과 칸트의 분석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반성의 형태, 즉 사유가 사유되지 않은 것을 겨냥하고 사유되지 않은 것과 맞물리는 이 차원에서 인간의 존재를 역사상 처음으로 끌어들이는 반성의 형태가 확립된다. 이것은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첫 번째는 부정적이고 전적으로 역사의 영역에 속하는 현상학이다. 현상학은 서양의 오랜 합리적 목표를 되찾은 것이라기보다는 18세기가 19세로 전화될 때 근대의 에피스테메에 발생한 깊은 단절에 관해 신중하고 정밀하게 작성된 조서이다. 현상학의 기획은 본래의 취지에도 불구하고 경험적인 체험의 묘사와 코기토의 우위를 회로 밖으로 몰아내는 사유되지 않은 것의 존재론으로 변모한다. 두 번째 결과는 긍정적인 것,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인간이 더 이상 반성의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사유하지 않을 때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과학적 사유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일 아닐까. 고고학의 층위에서 인간과 사유되지 않은 것은 동시대의 산물이다. 사유되지 않은 것은 역사처럼 인간 속에 자리하지 않는다. 사유되지 않은 것은 인간에 대해 타자, 인간과 동시에 탄생한 쌍둥이 형제같은 타자이다. 헤겔의 현상학에서는 대자와 마주하는 즉자였고, 쇼펜하우어의 경우에는 무의식적인 것이었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소외된 인간이었고, 후설의 분석에서는 암묵적인 것, 비현실적인 것, 침전된 것, 실행되지 않은 것이었다. 

사유는 사유되지 않은 것을 자기에게로 접근시키지 않는 한, 아니 사유되지 않은 것을 더 멀리 밀어내지 않는 한, 사유되지 않은 것을 발견하거나 사유되지 않은 것 쪽으로 움직일 수조차 없다. 여기에 우리의 근대성과 깊이 관련된 뭔가가 있다. 근대적 사유는 도덕성을 제안할 수 없었다. 이는 근대적 사유가 순수한 사변이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어떤 행위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유는 본질적으로 행위이다. 사드, 니체, 아르토, 바타유는 이 사실을 이해했으며,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게 확실하다. 정치적 선택이 없다면 결코 철학이 존재할 수 없다고, 어떤 사유이건 ‘진보적’이거나 ‘반동적’이라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6.기원의 후퇴와 회귀

인간의 존재방식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성찰을 특징짓는 마지막 요소는 기원에 대한 이해 방식이다. 18세기에 기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재현의 순수한 이중화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다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었다. 근대적 사유에서는 이와 같은 기원이 더 이상 이해될 수 없다. 노동, 생명, 언어의 역사 전체가 내부로부터 기원 쪽을 향할지라도 노동, 생명, 언어의 기원은 결코 정확하게 표현될 수 없었다. 역사성을 낳는 것은 이제 기원이 아니며, 역사성에 재재하고 동시에 역사성과 무관할지 모르는 기원의 필요성이 바로 역사성 자체의 구조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나게 된다. 인간은 이 역사성, 그리고 모든 사물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19세기 초에 구성되었다. 인간에게 기원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을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이미 시작된 것을 배경을 해서이다. 사물이 인간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는 사실, 인간의 경험이 또한 사물에 의해 전적으로 구성되고 제한되는 만큼 누구도 인간에게 기원을 지정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시간 속에서 생겨나고 아마도 시간 속으로 사라질 모든 사물의 한 가운데에서 인간은 모든 기원으로부터 분리된 채로 이미 현존한다. 그래서 사물의 시초가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서이다. 

유한성에 대한 실증성의 관계, 선험적인 것 속에서 이중화되는 경험적인 것, 사유되지 않은 것에 대한 코기토의 끊임없는 관계, 기원의 후퇴와 회귀는 우리에게 인간의 존재방식을 명시한다. 19세기부터 반성이 지식의 가능성에 대해 철학적 근거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 재현의 분석이 아니라 바로 이 존재 방식의 분석을 통해서이다. 

 

7. 담론과 인간의 존재

재현이 사유의 일반적인 요소인 이상, 담론의 이론은 모든 가능한 문법의 토대와 동시에 인식의 이론으로서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재현의 우위가 사라지자마자 담론의 이론은 해체되고, 누구나 두 가지 별개의 차원에서 이 이론의 비물질화되고 변모된 형태와 마주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고전주의적 담론의 실재와 근대적 사유에 제시되는 인간의 삶 사이에 현저한 양립불가능성을 밑바닥까지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담론의 분석이 유한성의 분석으로 바뀌는 변화는 또 다른 결과를 가져다준다. 

고전주의 사유에서 사물을 도표로 공간화할 가능성은 순수한 재현의 연속이 자기로부터 상기되고 이중화되고 연속적인 시간으로부터 동시성을 구성하는 속성과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즉 시간은 공간의 근거가 되었다. 근대적 사유가 여전히 시간을 사유할 수 있는 것, 시간을 연속으로 인식하고 시간을 완결이나 기원 또는 회귀의 약속으로 간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깊은 공간성 덕분이다.

 

8. 인간학의 잠

인간이란 무엇인가? 근대 철학을 특징짓는 중간 층위의 반성이 이 물음에 의해 구성되었다. 인간을 살아가는 존재나 일하는 개인 또는 말하는 주체로서 규정하려고 시도하는 근대철학에서 인간의 지배는 자연이나 교환 또는 담론의 인간을 인간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근거로 내세우기 위한 경험적-선험적 이중화이다. 철학은 이 주름 속에서 새로운 잠에, 이번에는 독단론의 잠이 아니라 인간학의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날의 사유가 필시 인간학의 근절을 위해 기울일 최초의 노력은 아마 니체의 경험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니체는 인간과 신이 서로에게 속하고 신의 죽음이 인간의 사라짐과 같은 뜻을 지니고 약속된 초인의 출현이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임박한 죽음을 온전히 의미하는 지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종말은 철학의 새로운 시작이다. 오늘날 인간의 사라짐에 의해 남겨진 공백 이외의 다른 곳에서 사유하는 것은 이제 가능하지 않다. 인간학은 해체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철학적 웃음, 일정부분 조용한 웃음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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