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3장 자기 자신에 대한 푸코의 비판적 설명_발제문
이사랑
/ 2018-12-30
/ 조회 7,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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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폭력 비판 / 자기 자신에 대한 푸코의 비판적 설명_발제문 / 작성자 이사랑
자기 자신에 대한 그 질문을 제기한 상대방에게 한 설명이다.
이 설명은 그 설명이 일어난 대화 장면 밖에서는 이해될 수 없다.
푸코의 두개의 전개과정 : 주체 개념-반성적 주체 / 담론적 구성
1. 진리 말하기 - 고백의 문제
푸코는 고백이 규제적 권력에 봉사하는 실천이라고 고발한다. 규제 권력은 성적 진리를 강제적으로 추출하고, 주체를 자신의 욕망에 대한 진리를 말해야만 하는 이로 생산한다. 푸코는 고백이 자아의 표명을 강제하고 고백의 구성적 외양은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푸코는 고백을 자기-언어화의 발화 행위로 읽는다. 즉, 자아는 자신을 구성하기 위해 나타나야만 하고, 오직 주어진 말걸기의 장면, 사회적으로 구성된 관계 안에서만 자신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 말하기를 통해 자아는 본연의 자기가 된다. 고백은 고백의 행위 자체에 근거해서 영혼을 재구성한다. 자아의 표명은 자신의 내면성을 용해시키고, 자아의 외면성 속에서 자신을 재구성한다. 언어적 행위인 바, 고백이 진리의 증거이고 표명이다. 표명은 자아를 표현하는게 아니라, 자아의 자리를 차지한다.
2. 인간 주체는 어떤 형태의 합리성을 통해, 어떤 역사적 조건을 통해서,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 자신을 지식의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 수 있게 된 것일까?
주체의 반성적 행위가 있을 것이고, 2)그 행위가 따르려고 하는 합리성이 그 행위를 야기시킬 것이다. 3)이 합리성은 다른 합리성을 폐제하고, 4)그 결과 우리는 오직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특정 합리성의 용어들 내부에서만 자신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고, 5)역사의 흐름 속 다른 방식들은 메시지를 전달받지 못한 채 있게 될 것이다.
3. 자신에 대한 진리를 이야기할 수 있기 위해 주체가 지불하는 비용은?
합리성을 스스로에게 적용할 때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우리를 이해가능하게 만들고, 우리가 우리를 알고, 우리를 타자에게 제공하는 합리성은 대가를 지불하고서 확립되었다. 진리를 구성하는 것이 합리성의 양태들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말하는 한 우리는 진리의 기준에 순응하고, 기준이 우리를 속박하길 수락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리를 이야기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란 진리체제와의 비판적 관계의 중지이다. 그렇기에 자신에 대한 진리를 말할 때 비판적 능력을 중지시켰던 것은 아닌가를 물어야 한다.
개인을 주체로 만드는 인식은 권력의 한 형태이다. 합리성의 다양한 형태들은 담론적 실천들, 주체화의 형식들과 단단히 결속된다. 따라서 “권력은 무엇인가” 가 아닌, “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권력은 어떤 형식을 취하는가, 권력을 무엇을 하는가”만을 물을 수 있다.
4. 권력에 대한 질문과 자신에 대한 진리를 말하라는 요구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진리를 말해야 한다는 요구 때문에 권력에 대한 질문을 한다. (누가 나한테 질문함?) 즉, 누군가가 다른 이들에게 행사한 지배의 결과로서 자신에 대한 진리 말하기가 가능했다. 따라서 윤리적 요구가 정치적 설명을 불러일으키고 윤리는 비판적이지 않을 때 신용을 잃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 만약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진리를 말한다면 나는 권력관계를 통해 나를 주체로 구성한다.
‘나’는 진리를 말하면서 단지 진리를 전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담론 속에서 권력을 작동시키고 있고, 복제를 권력을 이용하고, 권력을 유포하고, 권력의 중계와 복제를 위한 장소가 된다. ‘나’는 말하고 있고, ‘나’의 발화는 ‘내’가 참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전달한다. ‘나’의 말하기는 또한 권력 장 안에서 일어나고 권력의 행위를 구성하기도 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자아의 반성성을 부추기고 선동하는 것은 타자이고, 따라서 한 사람의 담론은 또 다른 사람을 자기반성으로 안내한다. 합리성의 형태들은 담론을 통해, 말걸기의 형식으로 전달되고, 부담과 요구로서 도착한다. 이 수동성이 시사하는 것은 우리는 오직 다른 사람의 말에 굴복했을 때에만 설명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말을 하면서 자신을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로고스를 전시 중 이기도 하다. 말하기가 이미 행동하기이며, 행동의 형식임을, 이미 도덕적 실천이고 삶의 방식인 형식임을 승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6. 주체는 자신에 대한 진리를 말할 수 있을까?
자신에 대한 설명은, 수행의 행위, 대화의 행위, 타자를 위한 타자 앞에서의 행동하기, 타자의 언어에 의한 행동하기-이다. 어떻게 말하는가-와 어떻게 사는가-는 분리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요구를 받고,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 우리는 요구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며, 어떤 유대감을 확립하려 하는 것이며, 메시지가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존중하려고 하는 것이다. 설명을 한다는 것은 보여주기 이다. 나는 나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거는 맥락에서 그렇다. 관계는 공표되고, 사회적 표명으로 구성된다.
7. 진리-말하기를 가능케하는 조건들
중요한 건, 누가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가, 왜 우리는 진리를 말해야 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진리를 말하는 대가로 우리는 자아의 형성과 진리의 사회적 위상과 연관된 싸움에 연루된다. 우리의 말하기는 형성적 역사, 사회성, 육체성에 의존한다. 나는 말하기에서 탈취당하고, 윤리적 요청이 힘을 가진다. 윤리적 요청은 말걸기를 통해서 존재하게 된다. 나는 내가 구조를 만들지 않은 세상에서 행동한다.
어떻게 인간이 구성되고 탈구성 되는지를, 즉 자신의 생존 방식 뿐 아니라 자신의 행위주체적인 자기-제작의 양태를 보여주기 때문에 도덕 철학의 문제이다. 말걸기의 양태가 도덕적 질문을 조건 짓고 구조화한다. 도덕적 질문은 특정 사회에서 반성적인 주체로 형성되는 것의 어려움을 상기시킨다. 자아는 질문을 제기하는 사회적 관습들 안에서 형성된다.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내가 제시하는 ‘나’가 자신의 형성의 많은 조건들을 제시할 수 없기에, 상당한 희생을 치루고 이루어진다.
8. 자신을 설명하라는 요구에 대한 반응은 주체의 형성과 동시에 주체가 책임감과 맺는 관계를 헤아리는 문제라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결코 완전한 설명을 할 수 없는 존재의 층위들에서 타자들과 연결되어 있기에 나온 결과이다. ‘나’가 사회적 삶의 흔적과 분리될 수 없다면, 윤리는 수사 뿐 아니라 사회적 비판 역시 전제로 하는 게 분명하다.
우리는 주체의 형성이 어떻게 윤리적 반응과 책임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틀을 함축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자아의 도덕적 탐구가 나르시시즘으로 우리를 돌려보내며, 그 나르시시즘이 윤리적 폭력을 낳는다면, 책임감의 질문을 “사회적 삶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 우리는 형성되는 것일까?”라고 물어야 한다. 윤리는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길 요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에 의해 훼손된다는 것은 일차적 필연성이지만, 메시지를 전달받고, 요청 받고, 나 아닌 것에 속박되고, 옮겨지고, 행동하고, 말을 걸고, 소유물로서의 자족적인 나를 비울 기회이기도 하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고 설명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무책임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