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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중 '니체에 관한 강의' 7/5자 발제
gkpaul / 2018-07-09 / 조회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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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세미나]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발제(*진리의 인식(?)으로는 마땅히 발제가 아니며, 단지 겨우 오로지 지식을 향한 '의지'로서..일뿐인;;)    2018년7월5일 장석관

 

‘니체에 관한 강의’(1971년4월 몬트리올 맥길대학교 강연)

-어떻게 니체와 더불어

진리에 의거하지 않고

진리의 역사를 사고할 수 있는가

 

1. 인식의 발명

 

1/ 인식은 인간 본성에 새겨져 있지 않다.

인식의 가능성은 형식적 법칙이 아니고, 인식은 자신과 전혀 다른 것(즉, 이성, 지식, 경험이 아니라 본능; 긍정, 확실성, 장악, 평온이 아니라 의심, 부정, 파기, 지체)이 문제가 되는 게임 공간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2/ 인식에는 모델이 없다.

인식은 신적 지성 같은 어떤 것에서 외부 보증을 얻지 않는다. 인간 인식에 선행하는 인식의 어떤 원형도 없다(플라톤: 상기설(X)).

3/ [인식은] 독해, 해독, 지각, 자명한 이치로서 세계의 구조에 절합되는 것이 아니다.

사물은 보이거나 인식되기 위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4/ [인식은] 복잡한 조작의 결과이다

(비록 스피노자는 ‘비웃지 말고, 탄식하지 말고, 저주하지 말고, 인식하라’고 했지만).

 

복잡한 조작의 메커니즘은

a-그것은 악의(비웃기, 무시하기, 저주하기)와 비슷하다.

그것은 사물에서 자신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거리를 두고, (비웃음을 통해) 사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가치절하(무시하기)를 통해 사물과 차이를 두며, 사물을 물리치거나 파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여 이 차이를 두는 인식은 神의 영역에도 善의 영역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b-그것은 인식하는 자를 향하는 악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인식하는 인간은] 정신의 성향에 반해, 그리고 가끔은 자신의 마음에서 원하는 소망에 거슬리면서까지 인식하는 것을... 긍정하고, 사랑하고, 숭배하는 것을... 스스로의 정신에 강요한다.” 니체, <선악의 저편>

이것이 의심, 지체를 도입하는 것이다.

 

*인식은 게임이다. 인식은 유용성에 대립한다. 인식은 찬성과 반대에 자리를 내주어야만 한다.

 

**현상의 친절한 부드러움에 맞서 지식의 살인적 가차 없음을 세워야 한다.

a-본능, 이해, 게임, 투쟁은 인식이 모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b-인식은 항상 관점주의적[원근법적]이며, 미완성이다.

c-그로부터 전체적으로 두 가지 커다란 단절이 생긴다. 존재와의 그리고 善과의.

 

1-2. 인식하기와 진리를 인식하기

 

인식은 발명됐다. 하지만 진리는 훨씬 뒤에야 발명됐다.

진리와 인식 사이에 기원상의 귀속이 있다.

-진리는 인식의 대상이다.

-진리 없는 인식은 참된 인식이 아니다.

-진리, 그것은 인식의 진리이다.

 

니체는 거침없이 이 함축을 풀어버린다.

첫 번째, 인간도 사물도 세계도 인식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식은 나중에 온다.

두 번째, 인식은 진리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진리는 나중에 온다.

 

 

2. 진리 이전의 인식이란 무엇인가?

 

a-진리와 연결되지 않은 인식. 니체는 그것을 참인 것으로 향하는 인식의 도식화, 단순화에 대립되는 순수한 ‘인식 의지’로 묘사한다.(‘사물을 제어하는 것’, ‘욕구가 결정적’)

인식을 위한 인식이라는 이 모독에 인식이 맞선다. 좋은 인식, 적절한 인식, 실용적 인식, 관대한 인식, 융통성 있는 인식, 도움이 되는 인식, 다시 말해 인식 활동과 다른 것을 하는 인식.

b-모든 진리에 앞서고 욕구에 온통 지배당하는 일차적, 신체적 인식.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식이 아니라 삶, 투쟁, 사냥, 음식, 경쟁이다.

 

이 인식의 맞은편에, 또 이 인식 이후에, 두 번째 금욕적 인식이 구성된다. 그것은 신체의 관점을 제거하고 유용성을 중지시키며 일면성과 한계를 지우고 공평무사한 눈으로 만사를 보고자 하는 순수하고픈 인식. 진리 이전의 인식은 비밀에 대한 폭력적이고 악의적인 인식, 폭로하는 모독으로서 정의될 때도 있고, 삶에 봉사하는 폭력적이고 유용한 인식, 지배하고 성장케 해주는 일면성으로서 정의될 때도 있다. 폭력의 이 ‘전혀 다른 것’은 인식 활동의 골조 구실을 하며 인식 속에서 스스로를 연출한다.

 

니체가 “인식 자체는 없다”고 말 할 때, 즉자의 인식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인식의 폭력 속에 인식 활동이 전개하면서 실행해야 할 불변의, 본질적이고 사전적인 관계는 없다는 말이다. 주체-객체 관계(그리고 그 관계의 모든 파생물, 이를테면 선험, 객관성, 순수 인식, 구성하는 주체)가 사실상 인식의 토대 구실을 하는 게 아니라 인식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명확히 하자.

a-인식은 관계들의 망에 바탕을 둔다.

-형식이 다른 관계들: 파괴, 전유, 징벌, 지배

-준거점, 관련짓는 항이 다른 관계들: 신체-다른 신체, 집단-다른 집단, 개인-사물,동물,신

인식의 기반은 이 차이들의 게임이다. 세계는 본질적으로 관계의 세계이고, 그 관계는 그 자체로 인식 불가능하다. 인식의 뿌리에는 인식이 없다(니체에게서 사유는 우리가 의식의 형태로 즉각 접근 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사유는 그 자체로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사유는 사유 이외의 것들로 인한 효과이다. 자연적 결과로서가 아니라 폭력과 환영으로서의 효과이다).

b-이 관계들 중 한 무리의 특징은 차이들에 동일한 표식을 찍는다는 사실에 있다. 이 표식에는 이중의 속성이 있는데 권력 의지(사용, 지배)와 현실(회귀, 반복, 동일성-관계의 식별)이다. 하지만 이의지가 권력 의지일 수 있는 것은 사물을 구성하고 사물의 현실을 정립하는 표식이 있을 때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c-이로부터 다음의 것들이 구성될 것이다.

ㄱ.주체. 주체는 의지가 발생하는 지점이자 변형과 관점의 체계이며 지배의 원리이다. 그리고 그 대신 단어, 인칭, 대명사, 문법의 형태로 객체의 동일성 및 실재성의 표식을 받는 것이다

ㄴ.객체. 객체는 표식, 기호, 단어, 범주가 적용되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 대신 실체, 이해 가능한 본질, 본성 또는 창조의 형태로 주체의 의지와 연관되는 것이다.

 

모든 철학이 주체와 객체 사이에 미리 수립된 관계 위에 인식을 세웠다. 그런 철학의 유일한 근심은 주체와 객체를 (코기토의 순수 형태 속에든, 감각을 최소화하는 형태로든, A=A의 동어반복으로든) 최대한 근접시키는 것이었다. 니체는 주체와 객체를 최대한 떼어놓으며 인식을 해명하고자 했다. 인식이 만들어낸 첫 번째 주된 환영이 바로 주체와 객체가 존재한다는 환영이다. 니체는 코기토의 장소와 자리에 바로 표식과 의욕의 게임, 단어와 권력 의지의 게임, 또는 기호와 해석의 게임을 도입한다. 해석이 혼돈에 사물의 기만을 도입하는 만큼, 기호는 해석이다. 그리고 해석은 기호를 사물화하는 게임을 통해 혼돈에 가해진 폭력이다.

 

2-결론

 

a-니체, 인식은 기만이다 이해된다. 먼저 인식은 현실을 왜곡하고, 관점주의적이고, 차이를 지우고 유사성의 과도한 지배를 도입하기 때문에. 다음으로 인식은 인식(주체-객체 관계)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에 기만이다.

b-니체, 다음의 것 동시에 언술 이해된다. 대체로 현실 관계들의 형태 속에 있는 인식은 실제로 인식이 아니다. 실제로 인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모든 현실 관계와 관련해 기만이다.

c-그런 이상 우리가 진리에 대해 말하기도 전에 우리는 인식의 중심에서 현실, 인식, 기만의 원환을 발견한다. 그로부터 도덕으로서의 진리가 도입될 수 있게 된다.

 

위와 같은 분석은 더 일반적으로 다음의 것들을 가능케 해준다. 현상학, 구조주의, 근원적 주체 따위와 별개로 기호와 해석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게. 기호 체계 분석을 폭력과 지배의 형태 분석에 절합하기. 주체-객체 관계보다 더 근본적으로, 진리에 관한 모든 문제틀에 앞서는 역사적 과정으로 인식을 사고하기.

주체-객체 관계에서 해방된 인식, 그것이 지식이다.

 

 

3. 진리의 사건

 

(1). 진리의 의지

 

니체는 진리의 뿌리와 존재의 이유를 의지에 둔다. 이는 철학 전통과 관련해 중요한 이동이다.

a-철학 전통에서 진리-의지 관계는 의지가 진리를 받아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특징으로 갖는다.(플라톤: 신에 동화됨, 칸트: 예지적 성격, 하이데거: 열려 있음)

b-니체에게 의지-진리 관계는 전혀 다르다. 진리와 의지를 절합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폭력이다. 이 이동으로 엄청난 효과와 역설들이 발생한다.

 

(2). 진리의 의지의 역설

 

a-진리는 자기 자신의 술어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 가능하다. 참은 참이 아니다. 모든 진리는 참-아닌 것에서 펼쳐진다. 진리는 참이 아닌 것이다. 진리의 존재론은 없다.

b-참이 아닌 진리의 주요 범주들을 분배하는 것이 가능하다.

-환영, 다시 말해 인식 방식으로서의 진리,

-오류, 인식에 가해진 폭력(따라서 비-인식)으로서의 오류,

-기만, 이 비-인식이 자기도 인식이면서 모든 인식의 환영을 일소하겠다고 자처하는 한에서의 기만.

 

이로부터 우리는 니체의 과제를 보게 된다.

진리의 역사를 진리에 의거하지 않고 사유하기.

[진리의 역사를]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 요소에서 [사유하기].

이 요소는 가상이다. 가상, 그것은 참의 무한정이다. 환영, 오류, 기만은 진리가 가상의 게임에 도입한 차이들이다. 그러나 이 차이들은 그저 진리의 효과들이 아니다. 그 차이들은 진리 자체인 것이다.

 

 

1. 2. 3.-요약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식에 대한 의지는 인식의 선행성에 붙들렸다. 그 의지는 인식(감각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인식)이 진리와 이미 관계를 맺었던 한에서만 가능했다.

니체에게, 인식은 진리라는 허위 언명이 야기하는 환영 효과이다. 인식과 진리를 한꺼번에 짊어지는 의지는 다음의 두 가지 성격을 띤다.

1) 인식에 대한 의지가 전혀 아니라 권력 의지.

2) 인식과 진리 사이에 상호 잔혹 및 파괴의 관계를 수립하기.

 

의지는 이중의 중첩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나는 진리를 너무나 바라기 때문에 인식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진리가 더 이상 없기를 바라는 지점, 그런 한계에 이를 때까지 인식을 바란다. 권력의 의지는 진리와 인식의 관계가 끊어지고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는 폭발 지점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이 권력 의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에서 해방된 현실, 즉 생성이다. 그리고 생성을 드러내는 인식은 존재를 드러내는 것아 아니라 진리 없는 진리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진리 없는 진리’가 두 가지 있다.

 

-오류, 기만, 환영인 진리. 참이 아닌 진리.

-이 진리-기만에서 해방된 진리. 진실한 진리, 존재와 상호성을 갖지 않는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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