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0707 <래디컬 페미니즘> 발제
이사랑
/ 2018-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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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레즈비언의 기이한 실종 _학계에서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이사랑
레즈비언 페미니즘은 레즈비언이 정치적 계급상 2등 시민인 여성이므로, 게이 남성과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퀴어 이론과 퀴어학에서 레즈비언은 게이 남성들의 문화와 정치학에 동화될 수 있을 때만 등장한다. 레즈비언이 해방되기 위해선 여성에 대한 남성 권력이 사라져야 한다.
캠프 : 여성성을 강조하거나 과장, 또는 희화하는 수행
대체로 동성애자 남성들이 생각하는 여성성의 개념에 기반한 것. 게이 남성의 여성성을 퀴어 이론과 실천 중심으로 가져가려는 경향도 있다.
여성성을 거부해 온 여성과 레즈비언들에게 게이 남성의 여성성을 찬양은 ‘퀴어적’ 연대라기보다, 모욕적으로 느껴진다. 여성에게 여성성이란 즐겁게 수행할 기회라기보다, 떠맡겨진 것, 탈출하려면 불이익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게이 남성들은 미디어와 패션 산업에 관여하면서, 여성성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의 권력 차이를 언급하는 일은 퀴어 이론에서 무례하게 여겨진다..
일부 퀴어 연구를 하는 레즈비언 이론가들도 캠프 실천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목표는 단순히 여성의 존재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게이 남성의 의제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레즈비언/ 게이학의 스타인 주디스 버틀러, 코소프스키 세즈윅은 여성과 남성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구별해서 보지 않으며, 레즈비언의 특수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수잔 무어는 젠더밴딩을 젠더 투어리즘으로 설명했다. 바르트, 들뢰즈, 가타리, 보드리야드, 리오타르 같은 남성 이론가들은 ‘여성스러움’ 개념의 핵심을 실제 여성들에게 해당사항이 없는, 타자성과 변형의 장소로 보았다. 여성은 ‘여성다움’을 재현하며, 남성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을 진짜가 아닌 것으로 만들고, 여성들이 ‘여성-되기’ 게임을 잘하고 있으며, 남성과 합류하고 싶다면 이 게임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1994년 시드니 동성애자 축제 마디 그라의 예시가 있다. 이 곳에서 여성들은 게이 남성들과 함께 플레이보이 바니걸 의상을 입었다. 이 의상에서 나타나는 성적 대상화는 여전히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여성스러움’을 수행하면서, 이것을 뒤집고, ‘패러디’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 바라보는 것은 ‘바니걸을 입은 여성’뿐이다. 이것이 ‘패러디’임을 인식하기 위해선 교육/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드랙과 캠프를 이해하고자 할 때 검토해야 할 것은 남성성이다. 트랜스 베스티즘(여성복장 도착)이 짜릿한 이유는 여성이라는 피지배 집단의 의복 아래 페니스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게이 남성의 여성성은 페미니즘이 해체하고자 했던 바로 그 남성성을 보호하고 장려한다. 여성성은 남성성 없이 존재할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케이트 데이비는 드랙이 남성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여성을 흉내내는 것은 여성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에 관한 것이며 남성들을 향해 있고 남성들을 위한 것이다. 여성 흉내와 남성 흉내 모두 남성의 목소리가 앞에 나와 있고 여성은 지워져있다.” 여성 흉내내기는 남성중심적 문화로 들어갈 수 있는 반면 남성 흉내내기는 그렇지 않다. 남성의 여성 흉내내기와 여성의 남성 흉내내기는 같지 않다. 옷 안의 성별이 중요하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남성우월주의 위계질서의 가치를 표현한다. 드랙과 캠프에서 재생산되는 전형적인 ‘여성스러운’ 행동은 대다수가 피억압자가 처벌을 피하기 위해 학습한 행동이다. 이런 행동은 스스로가 낮은 지위에 있음을 알고 잇다는 표시이며 힘있는 남성 계급에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젠더는 바꾸고,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억압에서 발생한 것이다. 젠더를 ‘가지고 노는’ 문제는, 젠더를 ‘놀이’로 두며 남성우월주의를 유지하는데 기여한다.
새로운 레즈비언/ 게이 학계/ 섹슈얼리티 학문
섹슈얼리티 연구를 페미니즘 이론에서 분리 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게일 루빈은 성행동의 많은 영역에 페미니즘 분석이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남성 우월주의로 인해 게이와 레즈비언이 처한 상황은 매우 다르다. 게이 남성들은 정치 시스템 속에서 모두가 사랑하도록 지시 받는 남성을 사랑하기를 선택하고, 레즈비언은 여성을 사랑하기를 선택한다. 이런 차이가 갖는 함의는 레즈비언/게이학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새로운 학문분야인 섹슈얼리티는 레즈비언/게이 연구의 이론가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분야에서 게이 남성의 성 정치학과 이해관계가 지배적이다. 이성애자 페미니스트, 레즈 페미니스트들이 섹슈얼리티 영역에서 여성주의적 통찰(성폭력, 아동성학대, 성매매 등)을 해왔지만 학계에서 주목받기 힘들다. 게이 남성 학자들을 당황시키면 안되고, 게이 남성에 무비판적으로 연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퀴어
퀴어학에서는 섹슈얼리티를 학문으로 다루면서 성폭력, 포르노, 성적 욕망, 실천과 같은 페미니스트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퀴어’라는 단어는 학계 퀴어 이론이든, 퀴어 정치학 바깥에서든 차별적이다. ‘퀴어’는 이성애 섹슈얼리티가 주류임을 수용한 19세기 성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분류에서 나왔다. 퀴어 정치학은 동성애의 소수자 위치를 받아들이고 이를 찬양한다. 이것은 레즈비언 페미니즘과 반대되는 정치학이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는 스스로를 이성애 주류 반대편의 소수자 집단으로 보지 않고 자유로운 여성의 모델로 본다. 이성애 섹슈얼리티를 해체하고자 하고, 그 전략의 하나로 레즈비어니즘을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장려하는 것이다.
이브 세즈윅은 퀴어함과 수치심의 연관성을 인식한다. 하지만 여성들은 퀴어가 수치심과 연관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여성은 수치심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혐오의 정치학도 같은 맥락이다. 남성의 여성혐오는 여성 살해로 이어지기에 여성 스스로를 혐호스러운 존재로 표현하는 것은 전혀 안전한 선택이 될 수 없다.
‘퀴어’정치학은 일탈의 정치학으로, 레즈비언과 게이가 언제나 소수자일 것으로 가정하며 이성애를 당연시하는 정치학이다. ‘모든 여성은 레즈비언이 될 수 있다’라는 레즈비언 페미니즘의 명제는 소수자 위치를 거부하는 함의를 가지고 있다. 전형적인 퀴어 정치학에는 여성주의적 분석이 배제되어 있다.
학계는 외부와 차단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대학 밖 세상을 반영하며 동시에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상업적인 게이 문화 속으로 레즈비언들이 사라지는 현상은 악화될 것이다.
결론
레즈비언/게이학은 여성의 경험을 반영하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레즈비언을 사라지게 만드는 ‘퀴어’용어와 지배적인 퀴어 이론의 정치학, 실천, 캠프의 정치학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레즈비언의 몸, 이해관계에서 게이 남성과의 차이를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는 압력에 저항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