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권 혁명과 예술 (4/27) 후기
삼월
/ 201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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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선서>
벌써 3권의 막바지, 낭만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배경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계속되는 혁명기의 프랑스입니다. 유럽, 특히 프랑스의 18세기는 모순의 시대였습니다. 예술가와 예술은 그 시대의 모순을 온몸으로 드러냅니다. 우리는 나폴레옹과 화가 다비드를 통해 유럽의 18세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낭만주의에 대한 설명은 고전주의로 시작합니다. 혁명이 낳은 예술사조가 낭만주의라면, 혁명을 이끈 예술사조는 고전주의입니다. 시민계급은 궁정과 귀족들이 낳은 예술인 바로끄와 로꼬꼬 대신 고대 로마의 정치와 예술을 불러옵니다. 고대 로마의 공화정과 함께 고전으로서 로마 예술도 다시 살아납니다. 시민계급은 절대왕정의 정치체제 뿐 아니라 그들의 예술도 거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비드, <브루투스>
다비드의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의 정치성이었습니다. 다비드의 그림들은 혁명에 필요한 정치성을 의식화하며 정치상황에 맞게 변화하였습니다. 특히 다비드를 유명하게 만든 그림인 <호라티우스 형제의 선서>나 <브루투스>에서 강조하는 애국이라는 주제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선서>에서는 남자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한 편에서 여자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브루투스>에서는 반역을 꾀한 아들들을 죽인 집정관 브루투스가 등장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들의 시체를 보며 어머니는 오열하지만, 아버지 브루투스는 그림 밖의 우리를 응시할 뿐입니다.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지듯 말입니다. 시민계급이 왕과 귀족에 대항하여 만들어낸 근대의 국가는 이렇듯 애국을 강조하며 형성되었습니다. 국민을 지켜주는 국가가 아니라 국민의 생명을 내놓으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며, 가족의 생명마저 포기하면서 지켜야 하는 국가로 말입니다.
다비드는 뛰어난 예술가인 동시에 정치가의 면모도 보여줍니다. 공화정을 지지하던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되자, 나폴레옹의 궁정화가가 됩니다. 우리가 아는 나폴레옹을 찬미하는 대부분의 그림들이 그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들라크루아가 다비드를 일컬어 ‘모든 근대미술 유파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처럼, 다비드는 프랑스 회화를 전 유럽의 회화로 만들고 ‘미술계의 나폴레옹’이 됩니다. 다비드의 예술에서는 강한 정치성을 띌수록 오히려 창조적인 재능이 극대화되었습니다. <마라의 죽음>은 찰나의 이미지를 통해 한 인간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선전을 극대화하는 놀라운 효과를 낳습니다.
다비드, <마라의 죽음>
혁명이 예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기 예술이 정치에 의해 위축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혁명을 지지했고, 부르주아지와 지식인들이 귀족들 대신 새로운 구매자층으로 등장합니다. 예술시장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예술계의 근대화도 이루어집니다. 아카데미가 해체되고, 공교육이 시작되며, 미술전람회가 활기를 띠고, 이 시기에 루브르가 미술관으로 이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혁명은 긴 혼란기를 거치며 비관주의와 환멸, 불신을 낳기도 했고, 시민계급 전체보다는 부르주아지가 주도한 혁명으로 보아야 합니다. 당시의 부르주아지는 프랑스 왕실보다도 훨씬 부유했고, 혁명에 동조한 다른 시민계급을 이용하기만 했지 혁명의 동료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들이 주장한 거래의 자유와 평등의 이념은 혁명 이후의 시대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제 예술은 그 자체로 개인의 문제가 되었고, 자유는 예술의 새로운 원천이 되었습니다. 프랑스혁명은 사회를 근본적이고 지속적으로 변혁시켰던 최초의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이 만든 제도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입증해준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