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발제] 사회주의와 중국의 미래 <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 후반부 (0704)
삼월
/ 2018-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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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유교의 전면 비판자 천두슈(1879~1942) VS 중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리다자오(1888~1927)
천두슈와 리다자오 두 사람은 중국공산당 창당 시기에 활동한 중요한 인물들이다. 천두슈는 1927년 공산당에서 제명당한 후 죽을 때까지 당에 돌아가지 못했으나, 리다자오는 중국공산당의 칭송을 받았다. 천두슈는 《신청년》이라는 잡지를 통해 신문화운동을 이끌고 근대적 지식의 장을 제공했다. 중국공산당 초대 서기를 맡기도 했던 천두슈는 1927년 국공분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1927년 당에서 제명당했다. 그 후에는 죽을 때까지 민주주의자, 세계주의자로 살았다. 리다자오는 청년 지식인들의 책임과 실천을 강조하며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식 사회주의로 변환·적용하려고 했으나, 1927년 군벌 장줘린에 의해 처형당했다. 마오쩌둥과의 인연 때문에 중국의 공산당정권 수립 이후부터 혁명순교자 영웅으로 숭배되어왔다.
천두슈와 리다자오의 삶에서 중요한 해인 1927년, 스탈린은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소련과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했다. 스탈린은 국공합작 실패의 책임을 천두슈에게 물었고, 천두슈는 소련의 스탈린식 전체주의적 독재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천두슈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해 죽을 때까지 고민했다. 이들이 살았던 5·4운동 시기는 과학·이성 숭배와 혁명에 대한 들끓는 격정이 공존했던 모순과 다양성의 시대였다. 약한 국가라는 역설적 조건이 지식인들에게 다양한 논의를 할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과 전후 강대국들이 보여준 제국주의적 태도는 당시 중국 지식인들이 대안으로 고민했던 서구 문명에 대한 회의를 불러왔다. 서구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자 그 자리를 마르크스주의가 채웠다. 당시 중국 지식인들에게 마르크스주의는 봉건주의와 서구자본주의를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힘으로 이해되었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온 리다자오는 1918년 베이징대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연구회’를 만들었다. 마오쩌둥이 1918~1919 사이에 리다자오의 사서보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리다자오는 중국현실에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을 적용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낙천적 인생관으로 지식인들의 염세적 태도를 경계하기도 했던 리다자오는 전통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지 않았다. 리다자오의 중국식 마르크스주의가 독특한 점은, 마르크스가 비판한 민족주의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려고 했다는 데 있다. 오히려 중국의 경제적 후진성이 러시아에서처럼 사회주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될 수 있다고도 믿었다. 많은 지식인들의 입장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에 경제결정론 혹은 역사결정론보다 인민의 능동성에 대한 강조가 더해졌고, 이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마오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다.
5장 ‘계급 중국’을 꿈꾼 마오쩌둥(1893~1976) VS ‘윤리 중국’을 구상한 량수밍(1893~1988)
마오쩌둥은 현재 중국에서 신처럼 숭배되는 동시에, 문화대혁명 해석에 대한 논쟁을 낳는 인물이다. 마오쩌둥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곧 중국사회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첸리췬은 마오쩌둥이 중국 역사에서 보기 드문 유토피아 사상가이자 독재자라고 평했다. 반면 량수밍은 유교적 가치를 새롭게 해석하여 실천하는 삶의 태도를 보여준 ‘최후의 유자’로 평가받는다. 량수밍은 공자의 사상에 충실하여 유교가 자기개혁의 ‘불온한 사상’이 될 가능성을 스스로의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마오쩌둥과 량수밍은 각각 ‘계급 중국’과 ‘윤리 중국’을 구상했다.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했던 시대에도 량수밍은 학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베이징대학에서 천두슈·리다자오와 잠시 함께 했던 마오쩌둥은, ‘반전통’의 필요를 확신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열린 공산당 창당대회에 참여한 15인 중 1인이었던 마오쩌둥은 유학이 아닌 농촌생활로 정치경력을 쌓아갔다. 1927년 리다자오가 군벌 장줘린에게 처형되고 공산당 지도자들이 일제히 검거되면서 중국의 공산주의운동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때 마오쩌둥은 농촌으로 들어가 마오주의의 기반을 마련했다. 1934~1935 ‘대장정’ 이후 마오쩌둥은 공산당의 핵심지도자로 부상했고, 1935년 쭌이회의에서 소련유학파들을 물리치고, 당정치국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마오쩌둥의 등장으로 중국공산당은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권위에서 벗어났고, 이후 마오쩌둥은 중국 혁명역사의 중심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지식인의 ‘지식’을 불신하고, 농민의 ‘지혜’를 흠모했다. 때문에 문화대혁명과 함께 하방과 하향이 가능했고, 이후 문화대혁명의 트라우마는 중국 지식인의 행동과 사유에도 영향을 미쳤다.
어릴 때 알파벳을 배우는 등 반전통적 교육을 받았던 량수밍은 성인이 되어서야 유가 경전을 읽으며 전통의 사유방식에 주목했다. 서양의 문화나 유럽의 사회주의에도 유연한 태도를 보였으며, 자본의 해악을 이해하여 사유재산제도에 반대했다. 베이징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농촌에서 윤리 중심의 향촌건설운동을 벌였으며,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공자에 대한 비판을 거부했다. 량수밍은 무조건적 문화 수입을 경계했으며, 그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한다고 주장했다. 후기에 마오쩌둥의 정책이 농촌 중심에서 벗어나 공업화되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량수밍은 공자에게 학문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주목하고, 철학이 삶의 문제임을 다시 이야기했다.
6장 현대의 제갈량 저우언라이(1898~1976) VS 중국을 다시 일으킨 부도옹 덩샤오핑(1904~1997)
중화인민공화국에서 26년간 2인자의 자리를 지켰던 저우언라이는, 인민들에게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준 사람으로 기억된다. 반면 덩샤오핑은 여러 번 인생의 부침을 겪었으나 결코 쓰러지지 않는 늙은이가 되어 중국을 좌지우지하고, ‘흑묘백묘론’ 등을 주장하며 중국의 부강을 이끌었다.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과 프랑스에서 함께 유학했고, 덩샤오핑 정권과 마오쩌둥 정권을 연결하여 개혁개방을 가능하게 한 인물이기도 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3인은 서로 상호보완하며 중국의 현대사를 이끌어가는 묘한 3자 관계를 이뤘다. 저우언라이의 외교능력과 덩샤오핑의 실용주의는 냉전체제의 해체라는 정세와 함께 중국의 개혁개방을 실행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딜레마는 마오쩌둥이었다. 덩샤오핑이 계승하려는 신민주주의을 입안한 인물이 마오쩌둥이었고, 덩샤오핑이 비판하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장본인 또한 마오쩌둥이었다. 덩샤오핑 정권의 계승점과 비판점이 동시에 마오쩌둥에게 있었다.
덩샤오핑의 개혁은 공산당정부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대신하여 스스로 개혁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개혁대상이 추진하는 개혁에는 한계가 있는 법, 그 한계가 1989년 톈안먼사태를 초래했다. 덩샤오핑의 정책에 의해 새로 창출된 관료자본가 계급과 농촌 부르주아지로 인해, 중국의 빈부격차와 사회부패는 극에 달했다. 국가와 자본의 관계가 밀착되면서 지식인, 노동자, 학생들의 비판대상은 국가가 되었고, 과거의 혁명 자체가 비판과 부정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1990년대에는 중국 정부에 의해 비판담론이 아닌, 국가 전유의 ‘국가-지식복합체로서의 유학’이 나타나기도 했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운동을 덩샤오핑 정권이 6·4진압의 방식으로 종결시킨 후 지식인 대오는 흩어지고, 덩샤오핑 정권은 확실하게 자본주의와 귄위주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문화대혁명의 트라우마가 사라지지 않은 채 관의 말이 유일한 합법언어가 되자, 지식인들의 의식도 점점 좁아져갔다.
20세기 초 중국 지식인들에게 반봉건과 반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인식되던 사회주의는 20세기 말의 중국에서 더 이상 대안이 되지 못한다. 사회주의라는 기치 아래 서양의 자본과 중국공산당의 권위가 사회를 잠식했다. ‘형식은 좌파이나 실제는 우파인’ 덩샤오핑 정권 하 중국 사회의 구조 변동은 중국사회를 ‘계급 없는 계급사회’로 만들었다. 1990년대 중국 정부가 사상의 보수화와 지식의 전문화를 수용하면서, 지식인은 국가이데올로기의 합법성을 선전하라는 요구를 강력하게 받고 있다. 자신이 죽으면 유교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마오쩌둥의 예견은 이런 방식으로 적중했다. 2000년대 중국 지도자들은 중국의 미래를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나 서양의 역사관에 의탁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를 버리지 않은 채 자본주의를 실행하고 유교를 부활시키는 중국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반봉건을 혁명하고, 그 혁명을 다시 혁명하여 지금에 이른 중국이 맞닥뜨릴 앞으로의 혁명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