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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중국의 탄생, ‘중국’의 몰락 +4
기픈옹달 / 2018-06-22 / 조회 1,591 

본문

* 세미나시간에 읽은 내용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 기픈옹달의 브런치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zziraci/114

 

우리는 중국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개인적으로 수차례 중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 중국을 다른 눈으로 경험할 기회를 얻었다. 그 경험을 비추어보면 좀처럼 중국을 제대로 아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여전히 중국은 먼 나라, 미지의 세계, 적대적인 공간이다. 굳이 ‘적대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내가 보건대, 의식적으로 중국을 외면하고 있다 여기기 때문이다. ‘우향우’라고 하자. 


사람들의 뭇시선은 늘 동쪽을 향하고 있다. 미국적 가치가 지금도 맹렬하게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진단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서’ 구적 가치를 중시한다고 하지만 정작 서쪽의 이웃, 중국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언어, 문화, 역사 등등. 그러나 현재 중국이 점점 현실적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은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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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은 오늘날 중국의 기틀을 놓았던 여러 사상적인 투쟁을 담았다. 그러나 이는 단지 과거를 고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20세기 초에 논의되었던 여러 문제가 다시 되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근대와 전통, 그리고 혁명을 둘러싼 열등감에서 중국이 서서히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중국에서는 거의 모든 문제를 유학의 눈으로 다시보기를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현대세계에서 중국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유학의 재정위를 통해 고민하고 있다. 이 ‘당위적’ 근거는 중국의 경우 학문적인 데에 있다기보다는 “역사와 문화의 중단없는 계승이라는 역사적, 문화적 사실이 논리를 이겨낼 수 있다는 중국인의 확신”에 있다. (9)
현실이 이념을 압도한다. 20세기초 중국을 괴롭혔던 문제들이 완벽하게 해결되었는가 묻는다면 쉽게 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른바 ‘부강의 꿈(富强夢)’이 이루어진 시대에 과거의 문제는 새로운 방향을 향한 전진에 방해가 될 뿐이다. 저자의 말처럼 20세기 초 중국의 고민이었던 ‘전통’과 ‘근대'의 문제는 서구 열강에 대한 열등감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G2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 이미 ‘부강’을 이루었다면 이제 접어둔 문제를 다시 꺼낼 차례이다. ‘중국의 꿈(中國夢)’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세계사에서 과거에 제국이었던 나라가 부활한 사례는 현재까지는 없었다. 중국이 유일하다.(11)
저자의 진단처럼 제국의 부활은 이전의 문제를 새롭게 다시 되물어야 하는 상황을 불러왔다. ‘전통’과 ‘근대’는 ‘혁명’을 통해 극복되었는가? 결론을 간단히 이야기하면 그렇지 않다. 공자로 대표되는 전통은 여전히 살아있다. 전통이란 부정할 수 있는 대상이나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라 하기는 어렵다. 전통을 끊어내야 한다는 반봉건주의의 당위 대신, 전통이 얼마나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유학과 공자는 중국에서 이성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냉엄한 사실’(19)을 잘 보아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도덕화된 제도, ‘제도화된 도덕’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나, 그 문제의식에는 십분 동의할 수밖에 없다. 우리라고 어찌 크게 다르겠는가.

20세기 초 중국이 이야기한 근대는 곧 ‘국민국가’를 의미한다. 저자는 느슨한 문명 체계의 국가를 국민 국가로 대체하는 작업이 이루어진 결과라 이야기한다. 그 과정 가운데 국민은 발견되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양치차오와 쑨원의 작업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문명세계로서의 천하국가관을 버리고 근대적인 국가의 틀을 만들고자 힘썼다. 그 결과 ‘천의 초월성’이 박탈되었다. 그러나 거꾸로 여기서 되물어야 하는 것은 ‘혁명’의 위치이다. 잘 알려져 있듯 오늘날 국민국가로서의 중국은 혁명을 자신의 뿌리로 삼는다. 이때 혁명이란 한편으로는 전통을 극복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서구 근대의 극복이라는 명분을 띠고 출발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전통을 부정하는 동시에 서구의 침략에 저항하는 수단으로써의 혁명.

실천의 층위에서나 이론의 층위에서나 혁명은 사회주의와 더불어 전통과 대립하는 개념이자 사회 변혁의 수단이었다. 혁명과 사회주의가 전통을 부정하고 서구 열강의 침략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채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 또는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와 혁명은 애초부터 전통과 서구 근대의 극복이라는 명분을 띠고 출발했으며, 이로써 서양의 근대는 추구해야 하는 목표이자 극복해야 하는 걸림돌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6)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혁명이 결코 근대적 개념에 머무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혁명革命’이라는 말 자체가 보여주는 것처럼 혁명이란 중국에서 오래된 전통적 변혁 방식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혁명은 전통 혹은 현재 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되, 이를 새롭게 주조하는 방식으로 매듭지어진다. 중국을 혁명한다 했을 때조차 혁명은 중국 아닌 다른 것을 낳을 수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 혁명이란 그 출발부터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것이다. 한 시대의 과업이 완수된 지금, 천하라는 문명세계의 문제는 다시 되돌아오고 있다.

캉유웨이와 옌푸는 각각 전통을 변형, 극복하고자 하는 인물이었다. 이 가운데 20세기 초 더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을 꼽자면 옌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진화론이라는 관념을 중국에 들여왔다. 새로운 역사의식을 중국에 심은 것만으로도 그의 역할은 지대하다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캉유웨이는 더 전통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공자교 운동을 주도했고, 당시의 공화주의 혁명에 비춰보면 보수적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문명 중국’의 새로운 부상은 캉유웨이를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 요구하고 있다.

일본의 어느 연구자는 청말 위기의 이중성은 문명 환상의 상실과 혈통 환상의 발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여기서 문명 환상은 캉유웨이로, 혈통 환상은 쑨원으로, 계급환상은 마오쩌둥으로 대변될 수 있다. 지금 마오쩌둥으로 상징되는 ‘계급 중국’이 방기되는 현실 속에서 문명 중국의 모델과 혈통 중국의 모델이 충돌하고 있는 형국이다. ... 중국인이 자기 정체성을 다시 세우려 한다면 무턱대고 유학을 저주하거나 그 존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은 이미 중국에서 유파와 관계없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캉유웨이는 공자가 지속적으로 부상하는한, 중국에서 지속적으로 주목받는 사상가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82)
캉유웨이, 옌푸와 비교할 때 량치차오와 쑨원은 보다 혁명가의 이상에 부합하는 인물이다. 량치차오는 입헌군주제를 쑨원은 공화제를 주창했다. 서구 열강의 침입을 맞아 이 둘이 선택한 입장은 서로 달랐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캉유웨이, 옌푸가 전통을 무너뜨린 배경 위에서 근대에 어떻게 발을 디딜지를 고민했던 인물이었다. 둘 가운데 역사적으로 더 많이 기억되는 것은 쑨원이겠다. 그는 중국, 타이완, 홍콩 등에서 두루 존경받는다. 이른바 혁명의 아버지. 그의 삼민주의는 꽤 유명하다. 

저자는 이들의 한계를 함께 언급한다. 쑨원의 경우 대아시아주의를 천명했으나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내용상 자국의 팽창을 주창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것과 어떻게 다를까 되물을 수 있다. 국민국가의 탄생이라는 과업에 자국의 이익만을 앞세운 정략적 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량치차오와 쑨원의 국민이란 한족 중심의, 나아가 친족의 혈통적 토대에 기반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가부장적 구조는 그대로 둔 채 국민의 출현을 바란 것이다. 

루쉰과 후스의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하다. 저자는 루쉰과 후쓰를 ‘자유’라는 이름에 묶지만 과연 이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른바 신문화 운동이라는 점에서 이 둘은 궤를 같이하기는 하나 지향했던 점도 달랐고 내놓은 결과도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루쉰의 지반은 독특한데 저자는 그의 계몽이란 ‘계몽을 회의하는 계몽’이라 말한다. 

계몽은 민중과 지식인을 연결한다. 그러나 루쉰의 경우 계몽은 일반적인 의미의 계몽이 아니다. 계몽을 회의하는 계몽이다. 즉 루쉰은 민중의 계몽에서 지식인이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일방적으로 계도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민중의 가능성을 두고 애愛와 증憎을 동시에 품었다.(142)

루쉰에 비해 후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계몽의 모습에 더 가깝다. 그는 미국을 유학한 지식인이었다. 저자는 그가 자유주의를 주장한 인물로 꼽는데, 이때의 자유란 근대적, 서구적 의미의 자유라 할 수 있다. 근대적 의미의 개인과 자유를 내놓았다는 점에서 후스는 앞선 앞선 지식인들과 크게 구별된다. 다만 그의 시도가 성공적이었는지는 의문에 여지가 있다. 그는 중국 혁명의 노선에 합류하지 못했고 오래도록 중국으로 강력한 비난을 받아야 했다. 소극적 자유, 소극적 개인의 한계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저자는 오늘날 새로운 평가를 해야 할 인물로 후스를 꼽는다.

후스의 자유주의적 계몽은 중국 사회의 이성적 개조라는 목표를 설정해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계몽의 방식은 중국이라는 세계에 착근해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지식인으로서 계몽의 주체인 후스와 계몽의 대신인 중국(인)은 경계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 중국의 자유주의는 혁명 시기에도 사회주의 시기에도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현재 중국의 부강 또한 비자유주의적 수단을 통해서 획득한 것이다. 이것이 중국 자유주의의 이론적 난제이다. (187)
개인적으로는 중국과 ‘중국’을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유하려 한다. 중국이 근대 국가 즉, 중화인민공화국을 가리킨다면 ‘중국’은 문명 전통의 세계, 곧 천하라 해도 무방하다. 근대 국민국가로서 중국의 출현은 쉽지 않았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여럿 산재해 있었던 까닭이다. 유가라는 전통 사상, 만주족의 지배라는 민족적 침탈 상황, 아편전쟁 이후로 몰아닥친 서구 열강의 침입. 이런 까닭에 중국의 ‘반봉건=근대’란 복잡한 모습을 갖는다. 반봉건은 전통 사상을 부인하는 동시에 민족을 호출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 핏줄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사회는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근대란 서구적 가치를 수용하는 동시에 서구 열강의 침입에 대항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를 가로지르는 혁명이라는 주제까지 생각하면 더 복잡하다. 혁명이란 전통적인 사회 변혁을 가리키는 동시에, 새로운 이념적 체제를 수립하는 과업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 혁명은 민족과 결합하기도 했고, 서구를 극복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는 ‘중국적 혁명’의 전통적 양상과 ‘사회주의 혁명’의 중국적 양상을 따로 나누어 고찰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야 혁명을 둘러싼 근대를 향한 욕망과 그 극복의 본질적 요소를 함께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따져보면 이러한 양상은 우리에게도 그리 멀지 않다. 중국에게 요구되었던 과업은 과거 조선말 지식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었다. 물론 똑같이 전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과업이 더 수월하게 수행되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 과업에 남는 질문들, 전통은 극복되었는가, 국가는 완성되었는가, 혁명은 혹은 변혁은 어떤 방향이어야 하는가 등은 여전히 새로운 물음으로 돌아온다. 

최근 ‘번영’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말은 ‘평화’와 더불어 짝이 되어 언급된다. 떠올리는 그림은 저마다 서로 다를 것이다. 혹자는 평화라는 이름 위에 더 큰 ‘민족’을 그릴 테고 혹자는 더 큰 ‘국가’를 그릴 것이다. 혹은 다른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중국은 중국몽, ‘중국’의 꿈을 다시 꾸고 있다. 우리는 무슨 꿈을 꾸어야 할까. 앞으로 번영의 꿈이란 어떤 모습일까. 이를 중국몽의 환영 곁에서 읽어야만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이렇게 방대한 이야기를 쉽게 풀어주는 책이 있다니, 좋은 책을 소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중국을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문제로 보는 일.
중국과 '중국'을 분리하고, '중국'이라는 문명을 이해하는 일의 중요함을 여러 번에 걸친
옹달님의 정리로 다시 환기시키고, 정리하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읽을 부분도 정말 기대되는 책입니다.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댓글의 댓글

참 재미있는 책이지요. 루쉰을 보다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라 생각해요.
뒷 부분은 루쉰 이후의 이야기일텐데 그 또한 흥미진진합니다.

손미경님의 댓글

손미경

왜 공자가 다시 부활 할수 있는지 이해할수 있는 책이 될것같습니다.  그건 아마도 본문에 얘기되었던 과거의 제국이었던 나라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다시 나설수 있었던 키워드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역시 다음공부를 기대하겠습니다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댓글의 댓글

공자라는 문제를 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고 고민해야 할 시간이 점점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 생각해요.
더 치열한 독해가 필요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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