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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 후기] 젠더 허물기 :: 슬픔의 정치학 (0614)
삼월 / 2018-06-23 / 조회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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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가 《젠더 허물기》를 쓰게 된 계기는 9·11테러였다. 2011년 9월 11일 이후 버틀러는 유대의 상실과 정치적 자원으로서의 슬픔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했다. 질문은 개인의 삶을 향했다. 살기 좋은 세계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당신은 자신의 삶이 견딜 만 하다고 느끼는가? 우리 모두에게, 삶은 가능한가? 질문은 어떤 이들에게 조롱이나 공격으로 다가갔고, 증오나 분노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버틀러는 윤리적인 동시에 철학적이고, 충분히 정치적인 질문을 계속한다. 우리가 ‘인간적인 삶’을 말할 때, ‘인간’은 무엇이고, ‘삶’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인지를 규정할 때,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남는가? 그런 문제를 무릅쓰고서라도 ‘인간적인 삶’을 주장할 이유들이 우리에게 있는가?

 

2001년 9월 11일, 나는 대학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다가 텔레비전 뉴스로 테러 소식을 들었다. 무역센터 건물에 비행기가 부딪히고, 고층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반복되었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스펙터클이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하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적어도 세 명의 선·후배 혹은 동기들과 밥을 먹고 있었는데, 한 선배가 그 장면을 보고 ‘속시원하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가끔 그 당시에 흔했던 반미집회나 신자유주의 반대 집회에 참가했었다. 무슨 이유로 그날 그 시간에 모여 밥을 먹고 있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우리 중 취업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우리는 어떻게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좋을지 몰라 막막했다. 그렇다고 대학생활이나 공부가 좋았던 것도 아니다. 당시의 우리는 공동체의 유대를 이해하기에는 각자가 부딪힌 삶이 지나치게 팍팍했으며, 슬픔이 어떻게 정치적 자원이 되는지도 알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내가 공동체와 함께 떠올리게 되는 말은 ‘한계’나 ‘불가능성’같은 말들이었다. 삼십대의 나에게 공동체는 늘 한계 속에서 시작되고, 불가능성에 대한 확인으로 끝났다. 그런데도 공동체는 계속되었다. 만들었다가 부수어버리고, 소속되었다가 뛰쳐나오는 일의 반복들. 공동체가 계속되는 게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나의 어떤 열망이나 집착 같은 게 계속되었고 반복되었다. 한편으로는 회의감이나 냉소도 차곡차곡 쌓였다. ‘인간’을 분류하는 기준에 대한 분노와, 적정한 ‘인간’의 분류기준 안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동시에 존재했다. 회의감이 극에 달했을 때, 아주 중요한 어떤 사건과 마주쳤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의 침몰.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과 연민과 혐오가 내부에서 뒤엉켰다. 그것들을 설명하고 싶었고, 뒤엉킨 것들을 풀어내고 싶었다. 내 삶과 영 인연이 없을 것처럼 보이던 인문학공동체에서의 공부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세월호 사건을 바라보는 내 관점의 주요한 부분은 국가에 대한 의심 혹은 불신이었다. 푸코를 열심히 읽게 된 계기가 여기에 있다. 한편으로는 거기에서 공동체의 유대와 상실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관계는 대부분 익명과 화폐교환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타인의 죽음을 공동체 유대의 상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내가 유대를 맺었는지 의식하지도 못한 타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상실을 깊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은 우리 사회가 앓고 있던 유대의 무감각을 꿰뚫고 슬픔을 통해 잊혔던 공동체의 감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버틀러가 말한 대로, 슬픔이 정치적 자원이 되어 정치공동체를 사유할 기반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것을 ‘슬픔의 정치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버틀러는 우리 모두가 타자와 구분되는 동시에 타자에 구속되어 있으며, 타자를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이해할 때, 정치나 권리의 의미는 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개인의 삶은 늘 정치적이라 할 수 있고, 권리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공동체를 사유하는 방식도 변화해야 한다. 공동체의 ‘한계’나 ‘불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삶이 가능해지는 방식으로 공동체를 다시 사유해야 한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고정되거나 균질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거의 언제나 공동체에 소속되기를 원하고, 홀로 있을 때보다 그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말하기 쉬워진다. 역으로 개인의 삶이 가능하지 않거나 권리를 말하기 어려워질 때,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는 다시 정립되어야 한다.

 

‘인간’이라는 규정, 혹은 공동체의 규범이 폭력적이라고 설명하는 일은 역사적·이론적으로 아주 쉽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우리가 ‘인간’을 알았던 적이 없음을 알고, ‘인간’에 대한 규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일. 그러면서도 현실에서 ‘인간’ 규정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일. 그리고 우리가 규범을 실천할 때, 규범이 우리를 억압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변형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 그래서 우리는 결국 확실성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모든 불확실성, 미지의 가능성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규정도, 규범도 미지성을 소거할 수 없다. 알 수 없는 미래가 우리로 하여금 방향을 잃게 하고,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음을 알게 될 때 변화도 가능할 것이다. 지금 여기 누군가의 삶이 가능하지 않다면, 언제고 다시 물어야 한다. 삶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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