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후기] 삶을 위한 철학수업 :: 6/18 후기 +5
빠른거북이
/ 2018-06-25
/ 조회 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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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가 끝나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이 책의 내용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나누었던 토론도 대화도 아니었어요.
이 책을 재미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세 명이나 된다는 사실이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저는 이 책이 발간된 직후에 읽어서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진경의 책이니까 좋은 책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두님을 비롯한 제 좋은 세미나 친구들이 이 책이 별로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작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간간이 이 책을 객관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습니다.
이 책을 읽은 직후에 단상을 남긴 메모를 읽었어요.
'자유보다는 오히려 만남과 고통에 대해 인상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더 투쟁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진경이 철학계의 간디로 변한 것 같아 당황스럽다. 더 싸웠으면 더 강하게 주장했으면...'
아마 2013년 말에 남겼을 거예요. 메모를 읽어 보니 그때도 아쉬움이 느껴지는 책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5년 동안 스승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그래서 이진경도 자주 인용하는 임제록의 한 구절처럼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는' 순간이 다가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내게는 괜찮은 책이지만 비판의 시선으로 보려 합니다.
먼저 더 뜨거웠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건이나 매혹 같은 주제처럼 뜨거움이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2부 매혹의 주제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데일 것 같은 뜨거움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요. 니체가 말하듯 '피로 쓴 글만이' 독자를 울릴 것입니다. 이진경이 요즘 불교철학에 빠져서 '무아'를 논하는데 철학자 혹은 사회운동가에겐 불교철학이 독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독한 구석이 빠진 글은 바람 빠진 풍선 같거든요.
그는 자신의 고통이 큰 행운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내게는 와닿지 않았습니다. 아마 독자들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고통을 너무 안일하게 표현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진경의 삶이 어떤 고통으로 점철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지만 그런 고통을 이겨낸 이진경이 말한다고 해서 독자가 고통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고통은 고통입니다. 이 책의 독자 타겟이 (아마도) 철학입문자라서 깊은 논의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애당초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쓱~ 넘기는 방식도 적절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고통을 다루려면 더 진지하게 혹은 더 감각적으로 다루는 편이 낫습니다.
고통하니 떠오르는데, 강연 중에 자주 언급하는 박경석씨 사례도 그만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장애는 장애일 뿐, 이것이 축복의 대상도 기적의 대상도 아닙니다. 그의 성공사례보다는 평범한 장애인의 평범한 삶이 더 와닿습니다. 제가 인터뷰했던 어느 중증 장애인 여성은 '내 장애를 사랑해요'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장애가 자신을 마음 아프게 하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러나 그런 마음 아픈 장애를, 아픈 자식 대하듯 사랑하는 장애인이 흔한 건 아닙니다.
우리사회에서 장애는 대체로 '장애물'입니다.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지만, 특별히 박경석씨처럼 좋아할 이유도 없습니다. 비장애인 철학자로서, 들뢰즈 전문가로서 장애를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고민이 되는 건 이해하지만 장애는 아직은 그냥 장애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미화가 될까 우려가 됩니다.
특히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안 드는 건 너무 자주 나오는 ^^ 표시입니다.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요. 독자는 난데없이 썰렁한 아재 개그 들은 것 같아 당황하게 됩니다.
이렇게 연이어 비판을 해야지 생각했습니다. 더 비판할 거리가 없을까를 계속 생각했지요.
그런데 오늘 오후에 성북동을 걸었어요.
그곳을 걸어서는 처음 지나갔는데 마치 해외여행을 하는 것 같았어요. 풍경이 낯설었거든요. 이진경은 자주 새로운 감각, 낯선 감각에 대해 말하곤 합니다. 내 삶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달라진 풍경을 만나니 시야가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딴 이야기지만 감각에 대한 그의 강연은 명강연이지요.
행복했어요. 세상은 어제와 다르고, 풍경도 어제와 다르고, 나도 어제와 다르고, 이렇게 살아가는 게 재밌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고통을 겪어내고 이 우주 내에 존재하는 무수한 철학과 예술을 이해하는 철학자가 보기에 이 세상은 더 아름답고 재밌는 곳일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지 위에서 항상 미소를 짓고 계신 이진경 선생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이 미지근한 온도의 대중철학서가 이해가 되었습니다.
5년 만에 다시 읽는 책이라서 내 시선의 온도도 극과 극으로 오르내렸습니다.
더 비판할 거리가 있다면 4주 후에 하겠습니다.
이진경샘을 넘어서서 바라보겠습니다.
댓글목록
엇결과 순결님의 댓글
엇결과 순결
새 책을 들어가면서 느꼈던 몇가지 소회를 적어볼까 합니다.
부디 또하나의 간증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ㅎㅎㅎㅎ
1. 대장정의 끝은 또다른 심연을 남긴다.
- 우리는 지난 6개월간 정말 높은 산을 등반했습니다. 각자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나,
어쨌든 우리는 큰 산을 하나 넘었습니다. 이제 이진경씨의 '삶의 철학'을 넘어가려고 합니다.
저는 책을 잡기 전에 먼저 질문 하나를 만듭니다. 그 질문에 이 책이 얼마나 대답해 줄지를 기대하면서 읽으려고 하지요.
솔직히 저도 '짜라는'에 비교했을때 '삶의 철학'은 가벼운 텍스트로 느껴졌습니다. 망설여졌지요. 등반할 이유가 무엇일까?
- 오라클님의 소개에도 불구 저만의 이유를 찾아야 했습니다.
나귀제 이후 2주간의 휴식기간중 선악의 저편을 강독한 고병권씨의 '다이너마이트 니체'를 읽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고귀한 자의ㅡ 고독의 시간은 언제 끝나는가?
니체는 이 질문에 대해 단계적 접근을 답으로 제시합니다.
1) 건강을 회복한 자 1 : 변신의 단계로서, 은둔하되, 도약을 위한 도움닫기 거리 확보하는 시기.
불신조차 어떤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믿음으로 전환시킴.
2) 건강을 회복한 자 2 : 임신의 단계
역겨움에 의한 구토가 아닌 자기 안에 고귀한 존재를 느끼는 구토
우울함 없이도 고독을 즐기면서, 사람들 트메서 물흐르듯 어울릴 만큼 충분히 강해진 단계
3) 즐거운 지식 : 번개 가까이에 이르는 단계
자신의 때가 늦게 온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며, 내안의 번개가 치고 있음을 깨닫는 단계
4) 진정한 철학자 : 끊임없이 체험하고 의심하고 꿈꾸는 인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짜라를 읽은 우리가 바로 건강을 회복한 자 1단계가 아닐까?
이제 겨우 건강을 회복했을 뿐, 아직 세상 속에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기에는 나약한. 언제 깨질지 모르는 그런 단계.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너 아직 충분히 강하지 않다. "
이런 생각에 이르자 아직은 니체 곁에 있어야 겠다는 저만의 확신이 생겼습니다.
2. 더 강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 고병권씨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니체을 안다는 것과 니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
니체도 한 술 거듭니다. 철학자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라고. 철학적 지식을 논하는 것은 철학노동자가 할 일이라고.
- 짜라의 그 수많은 말들은 다시 나의 삶 속에서 나의 언어로 재창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경험으로. 그 과정에서 우리는 또다시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하겠지요.
그 경험을 타인과 공유한다면 실패의 경험도 그만큼 쌓이는 것이 아닐까요?
- 저에게 세미나 시간은 작가의 말을 잘 이해하기 위한 자리는 아닙니다. 저에게 더 많은 깨달음을 준것은
함께하는 팀원들의 경험담이었습니다. 수치심이 어떻게 사랑과 같은 감정에서 나오는가? 이해할 수 없었던 구절은
또다른 사변적 설명으로는 절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옆의 동료가 삶 속에서 겪은 것을 말해줄때
번개가 뇌리에 꽂히는 경험을 통해 경구는 삶속에 이해되곤 했습니다.
어쩌면 이진경씨가 '삶의 철학'에서 시도하려는 것도 이런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니체의 언어를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을 통해 건강을 회복한자 2단계로 넘어가려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비로소 저에게는 '삶의 철학'을 읽어야겠다. 그것도 아주 잘 읽어야겠다는 의욕이 생기더군요.
추신 : 저는 개인적으로 고병권씨의 철학자와 하녀, 이진경씨의 삶의 철학......이런 류야 말로 진정한 그들의 철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철학자가 자신의 삶을 드러낼 수밖에 없고 그것을 통해서만 철학자가 된다는 니체의 말이
옳다면 말이지요. 그들 나름 철학적노동자에서 철학자로의 변신 이라고까지 평한다면 오버일까요? ^^
3. 제가 바라는 세미나는 더욱 더 활발하게 과감하게 지독하게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 경험은 책과 다른 내용이어도 좋을테고 결을 같이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경험을 통해 책에서 한발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경험을 말하는 것, 쓰는 것은 자신과 정직으로 마주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도, 재미를 주기 위해서도 아닌 자신과 대면하는 것이지요.
혼자 방에서 대면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걸 공개적으로 언급할 때, 우리는 자신을 가장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험도 덤으로 얻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럼 세미나 시간에 뵈어요......열정 뿜뿜하며. ^^
모로님의 댓글
모로건강을 회복한 자는 글도 일취월장하시네요 ㅎㅎ
모로님의 댓글
모로
그 3인 중에 저도 포함되는거죠? ㅎ
어쨌든 작은 충격이 빠른거북님께는 다시 한번 위버멘쉬의 기회로 작용한 것 같네요.
저는 지난 챕터에서 '차라'때 갖고 있던 의문(위버멘쉬 후 약자에 대한)이 다시 한 번 되살아났는데,
세미나 시간에 풀리지 않아 일주일 동안 고민한 결과 현재는 나름 정리 단계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전쟁의 시간이 있으면 좋겠네요 ㅎㅎㅎ
연두님의 댓글
연두
저는 지난 6개월간 차라투스트라에, 니체에 매혹되었지요.
사랑이 끝났는데, 아직 끝난 사랑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그런 상태일지도.
저는 그에게 매료된 상태로 일상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으므로.
저를 자아의 감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 줄 다른 매혹의 담지자 혹은
더 뾰족하거나 단단한 망치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저의 신체의 호흡, 운동/정지의 리듬과 세미나의 텍스트가 잘 맞지 않아요.
그래서 계속해서 비판적인 생각들이 떠오르고 있는지도 몰라요.
논리적인 핑계를 대기 위해서죠. 왜 내가 마음을 열지 않는지 설명하려고.
마치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에게 내가 당신을 거절해야 하는 이유, 거절하는 이유를 알려주는 것처럼요.
관점을 바꿔서 그를 완전히 새롭게 봐, 라고 친구들이 얘기한다고 해서 호감이 일진 않죠.
이것이 지금의 저의 진실.
그래도 선물같은 존재들 덕분에 끝까지 갑니다.
빠른거북이님의 댓글
빠른거북이
모로님 지난 시간 때 의문이 구체적으로 뭐지요? 어떻게 정리가 되셨는지도 궁금하네요.
연두님 이진경샘 지금 텍스트는 철학입문서 같은 성격이라 말랑해서 니체의 강한 어조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안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그의 강연이나 다른 저작은 새로운 감각을 쌓는 데에 좋을 겁니다. 은근히 강해요, 권해드리고 싶네요. 그의 저서 중에 저는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을 좋아합니다
엇결과 순결님 간증은 그만... 농담입니다라고 말할 줄 아셨죠? ^^ 건강을 회복하신 것, 우리가 다 함께 한 것이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