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근대철학] 5장 ‘경험주의와 주체성’
namu
/ 2018-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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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근대철학] 5장 ‘경험주의와 주체성’ 발제 namu 6/15/2018
1. 주체성의 정의에 관한 질문: 주체는 운동에 의해, 그리고 운동으로서 정의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펼치는 운동이다. 스스로 펼쳐지는 것이 주체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체성이라는 관념에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내용은 매개와 초월이다. 흄은 그러나 스스로 펼쳐지는, 또는 다른 것이 되는 운동이, 주체가 자신을 넘어서는 것과 주체가 자신을 반성하는 두 가지 차원을 인간본성의 근본적 성격으로 제시; ⓵추리와 발명. ⓶ 믿음과 인위적 고안. 요컨대 믿는 것과 발명하는 것이 주체를 주체로 만듦.
발명된 주체, 그는 곧 발명하는 존재이다. 바로 이것이 주체성의 이중의 역량, 즉 믿는 것과 발명하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자연의) 비밀의 힘들을 추정하는 것이고, [발명한다는 것은] 추상적이고 구별되는 힘들을 전제하는 것이다. 주체는 규범적. 이런 이중의 역량, 일반규칙의 이런 이중의 실행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의 정초, 권리 원리를 찾아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문제이다.
믿는다는 것은 자연의 한 부분을 주어지지 않은 다른 부분으로부터 추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발명한다는 것은 힘들을 구별한다는 것이며 기능적 총체들, 즉 더 이상 자연에 주어지지 않은 총체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문제는 주어진 것 안에서 어떻게 주어진 것을 넘어서는 주체가 구성되는가 하는 데 있다. 발명하고 믿는 이 주체는 주어진 자기 자신을 하나의 종합, 하나의 체계로 만드는 방식으로 주어진 것 안에서 구성된다.
2. 주어진 것이란 무엇인가? 이는 감각적인 것의 흐름, 인상과 이미지 다발, 지각의 집합이다.(흄) 이는 나타난 것의 총체, 외양과 동등한 존재이며, 또한 그것은 동일성도 없고 법칙도 없는 운동이고 변화이다. 우리는 인식능력이나 조직화의 원리가 아니라 어떤 집합, 어떤 다발로 지시함으로써 상상력과 정신에 대해 말한다. 경험주의는 다발에 대한 이 경험에서, 구별되는 지각들의 움직이는 계속繼續으로부터 출발한다. 사실 경험에 어떤 위상을 부여하는 구성적적 원리는 “모든 각각의 관념은 하나의 인상에서 유래”하며, 그 감각은 다만 규제적일뿐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분리 가능한 것은 구별 가능하고, 모든 구별 가능한 것은 서로 다르다. 차이의 원리.
따라서 경험은 관념들이 서로 다른 것인 한에서 분리 가능한 관념들의 계속이자 운동이고, 또한 이들은 분리 가능한 것인 한에서 서로 다르다. 우리는 이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la[고유명사로서의 유일무이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주체, 실체 내포 배제.
정신은 정신 안의 관념과 동일하다. “모든 지각은 각각 하나의 실체이며, 지각과 구별되는 각각 부분은 모두 하나의 구별되는 실체.”
정신은 주체가 아니다. 정신에겐 그 자신[정신]을 정신으로 삼을 주체도 필요하지 않다.(---) 다른 한편, 정신은 더 이상 자연의 표상이 아니다. 지각은 유일한 실체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대상이다. (---) 경험의 철학은 실체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자연의 철학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따라서 관념은 어떤 대상의 표상이 아니라 인상이다. 인상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표상적이지도 않으며, 매개된 것도 아니고, 본유적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자연이 있고, 실재적인 작용이 있으며, 물체들은 힘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는 “대상들의 실재 본성과 작용에 관한 논의로 들어가는 대신 감관에 나타나는 대상들의 외양에 우리의 사변을” 한정해야 한다. (---) 그러므로 진정한 문제는 다만 적당한 계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외양들에 좌우되지 않는 미지의 힘과, 주어진 것 안에서 주체의 구성을 결정하는 초월적 원리 사이의 일치, 자연의 힘과 인간본성의 원리 사이의 일치, 자연과 주체 사이의 일치를 사유하는 것이다. 주어진 것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그 자체로써 그리고 [주어진] 바로 그것으로서 전자의 표상도 후자의 변양도 아니다. 주어진 것, 정신, 지각의 다발은 자신이 아닌 다른 것(유기체의 조직화)을 내세울 수 없다.
정신의 일관성이란 무엇인가? 더구나 우리가 정신을 정신으로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질의 관점이 아니라 양의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이 단계에서 도입하는 것은 관념의 표상적 성질이 아니라 그것의 분할가능성이다. 경험주의의 근본적 원리인 차이의 원리에 대해 우리는 이미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 의미였다. 정신의 불변성은 이러저러한 관념이 아니라 가장 작은 관념이다. “정신의 능력이 무한하다는 것을 부정하면서, 우리는 정신이 그 관념 분할의 끝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가정한다.” 그런 관념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것 또는 저것을 표상한다는 것이 아니라 분할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관념 자체나 인상을 분할의 기준에 관련시키는 이런 반성을 정신의 계기라고 부른다. 정신과 주어진 것은 이러저러한 관념이 아니라, 모래알을 표상하는데 소용되든 그 부분을 표상하는데 소용되든 가장 작은 관념을 내세운다. 이것이 정신의 위상이라는 문제가 공간의 문제와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 다른 한편으로 분할 불가능한 관념이 분할 불가능하다고 고려되기 때문에 구성하는 특정한 방식, 그것이 연장이다. 이 두 개의 논제를 흄은 긴밀히 연결된 한 체계의 두 부분으로 제시한다. ①정신이 유한한 능력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상상력은 최소부분에 도달”한다는 말이다. 이 최소부분을 흄은 단위, 분할 불가능한 점, 원자 또는 입자의 인상, 한계짓는 관념이라 부른다. ②가장 작은 관념이나 가장 작은 인상은 수학적 점도 물리적 점도 아닌 감각적 점이다. 물리적 점은 이미 연장되어 있고, 또한 분할 가능하다. 수학적 점은 무néant이다. 감각적 점 또는 원자는 가시적이고 가촉적이며, 색을 가질 뿐 아니라 견고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연장을 갖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존재한다. “플루트로 연주한 다섯 음은 우리에게 시간의 인상과 관념을 제공하지만, 시간은 청각이나 다른 감각에 나타나는 여섯 번째 인상은 아니다. ” 공간은 가시적이고 가촉적인 대상들의 배치 속에서 발견된다. 흡사 시간이 변화하는 대상들의 지각 가능한 계속 속에서 발견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간과 시간은 정신 안에 있다. 그러므로 두 가지 객관적 특성을 통해 주어진 것을 정의해야 한다. 요소의 분할불가능성과 요소들의 분배, 그러니까 원자와 구조다.
3.주체를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상상력이 단순한 다발에서 하나의 인식 능력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분배된 다발이 하나의 체계가 되는 것이다. 정신은 인간 본성이 된다. 주체는 발명하고 믿는다. 바로 이것이 종합, 정신의 종합이다. 세 가지 문제 제기. 1) 믿음 안에서, 발명 안에서 주체의 특성들은 무엇인가? 2)주체는 어떤 원리에 의해 구성되는가? 어떤 요인들의 작용 아래서 정신은 변형되는가? 3)정신 안에서 주체에 의해 작동되는 이 종합의 다양한 계기들은 무엇인가? 체계의 계기들은 무엇인가?
첫 번째 문제(184쪽). 또한 우리가 이전에 ⓵자기와의 관계 ②감각들과의 관계 ③시간과의 관계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정신을 탐구해온 만큼 우리는 정신 자체가 주체가 될 때 이 세 심금들이 무엇이 되는지 물어야 한다.
우선 시간과의 관계에서, 이 지각들이 나타나는 양태 속에서 고찰된 정신은 본질적으로 계속繼續, 즉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