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근대철학] 5장 ‘경험주의와 주체성’ 후기 +9
namu
/ 2018-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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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근대철학] 5장 ‘경험주의와 주체성’ 후기
저는 지난 세미나 내용을 정리하기보다는 지금까지 공부한 흄의 텍스트 내용 가운데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몇 구절을 통해 흄과의 첫 만남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1] “내 손가락이 긁히는 것보다 전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이성에 반하지 않는다(It is not contrary to Reason to prefer the destruction of the whole world to the scratching of my finger).” (44쪽)
이 말은 언뜻 양주(楊朱)의 “一毛不拔(일모불발)”을 떠올리게 합니다. 즉, 그는「털 한 가닥을 뽑아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어도 하지 않겠다(拔一毛而利天下, 不爲).」고 한 인물이지요. 어찌 보면 극단적인 개인주의자 혹은 유아론자란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지혜가 귀중한 이유는 나를 보호하기 때문이며, 완력이 천한 이유는 사물을 침범하기 때문이다(智之所貴, 存我爲貴; 力之所賤, 侵物爲賤).” 양주는 개인의 권리와 존엄을 존중하고,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을뿐더러 사물에 해를 끼치는 것도 반대한 위대한 사상가이기 때문입니다.
흄은 위 구절에 대해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도덕적 구별은 정념을 불러일으키고 행위를 산출하거나 막기 때문에, 이성을 통해 발생되지는 않는다.” (45쪽)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이라 정의하였고,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정언명령’이라 하여 정념을 배제했잖아요. 흄은 도덕감의 토대는 쾌, 불쾌를 유발하는 정념이란 것입니다. 그에게 이성은 정념에 맞는 대상들을 찾아 정념을 돕고, 즉 욕망충족의 수단을 찾아내고, 그 대가를 알려줍니다. 이성은 정념을 거스를 수 없으며, 오직 정념만이 정념을 거역할 수 있지요. 이성은 정념의 도구인 것입니다.
2] “자살은 신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거역하는 것이 아니며, 사회에 대한 의무를 위반하는 것도 아니다. 자살은 ‘집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경하지 않은’ 인간의 힘이며, 예외적 정황 속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예외는 자연의 대상이 된다.”(143-144쪽)
흄은 「자살에 관하여」라는 짧은 시론에서 자살이 신, 사회,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의 파기라는 입장으로 구분해 각각 반론을 전개했다고 하는데요. 여기에서는 각주를 참고로 하여 신의 섭리에 대한 범죄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살펴보겠습니다.
<<만물은 그것을 둘러싼 외부와의 상호작용 가운데 놓여있으며 어떤 것도 신이 부여한 일반법칙에서 벗어난 것은 없다. 인간의 자살 역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연적 판단력과 분별력에 따라 선택한 자연적 행위로 보아야 하며, 신의 섭리를 위반한 것이 아니라 우주를 지배하는 일반법칙 내에 있는 것이다. 만일 자살이 신의 섭리나 일반법칙을 거스른 행위라면, 집짓고 땅을 개간하고 바다를 여행하는 것 역시 자연의 정상적 과정(신의 섭리)에 개입해 인위적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므로 모두 범법행위가 될 것이다. 즉 자살은 집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행위이므로 유독 그것만 예외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
흄은 마치 신의 섭리를 배려(?)하는 듯 위와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또 다른 책에서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무신론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인간은 헤로도토스와 마찬가지로 자기 형상대로 신을 만들었고, 신에 대한 관념은 자기 안에서 발견한 최선을 무한확장한 것이다. 말들이 신을 믿는다면 슈퍼말super-horse이 되는 이치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한술 더 떴는데요. “신의 다양한 속성 중에서도 가장 가엾은 것은 자살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3]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꾸고, 어떤 특정한 사람들로 하여금 정의를 준수하는 것이 가까운 이익이고 정의를 위반하는 것이 더 먼 이익임을 알게 만든 것뿐이다.”(84쪽)
흄의 윤리학 내지 정치철학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프랑스 계약론자들, 가령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처럼 윤리적 문제의 출발을 이기심에 두고 계약을 통해 사회를 구성한다는 의미는 결국 이기주의는 제한되어야 할 것으로, 개인을 구속하거나 억압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무리의 인간, 공동체의 인간임을 염두에 둔다면, 제도를 매개로 한 공감(편파심, 치우친 동정심)의 확장을 통한 사회구성이야 말로 공감이 자신의 모순과 자연적 편파성을 넘어 통합의 문제가 될 것이며, 이는 적극적인 도덕적 세계를 내포하며, 그런 세계의 적극적인 발명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4] ‘‘또한 이런 종류의 일반 규칙이 일단 수립되면, 사람들은 그것이 처음 생겨나게 한 원리너머로 이를 확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총각들은 그 자신이 얼마나 방탕하든간에 여성이 호색적이거나 정숙하지 못한 사례를 보면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02쪽)
이 부분은 케테르님이 “상상력 안에서의 의무의 규칙”을 말씀하시며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주었는데요. 여기서 일반규칙이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있어 의무관계를 말하는 것이고요. 남편은 결코 자녀가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아이임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여성에게 정절을 요구하고, 이것이 여성의 특수한 미덕으로 요구되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규범 혹은 제도가 된다는 것인데요. 저는 특히 “그리하여 총각들은---”이란 마지막 대목을 읽으며 엉뚱하게도 평생 독신으로 산 흄의 결혼제도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엿볼 수가 있었고요. 또한 결혼제도에 대한 이 부분은 무죄판결을 받은 하녀와의 스캔들을 자조적으로 반영한 위트와 기지가 번득이는 통찰은 아닐는지.
5] “정신이 유한한 능력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상상력은 최소부분에 도달’한다는 말이다. 이 최소부분을 흄은 단위, 분할 불가능한 점, 원자 또는 입자의 인상, 한계짓는 관념이라 부른다. (---) 가장 작은 관념이나 가장 작은 인상은 수학적 점도 물리적 점도 아닌 감각적 점이다. 물리적 점은 이미 연장되어 있고, 또한 분할 가능하다. 수학적 점은 무néant이다.” (180-181쪽)
흄의 정신의 물리학^흄의 원자론&^ 관념의 최소 단위# 원자$%#@! 이 원자란 것이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실재한다니요. “감각적 점 또는 원자는 가시적이고 가촉적이며, 색을 가질 뿐 아니라 견고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연장을 갖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존재한다.” 저는 이러한 말에서 원한을 품은 귀신이 차마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공간은 가시적이고 가촉적인 대상들의 배치 속에서 발견된다. 흡사 시간이 변화하는 대상들의 지각 가능한 계속 속에서 발견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간과 시간은 정신 안에 있다.” 아아! 저는 이 대목에선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려움으로 몰아넣는다(The eternal silence of these infinite spaces frightens me).」라고 엄살(?)을 떨었던 파스칼이 불쌍했습니다. 아무튼, 관념의 최소단위인 원자들로 인하여 인간의 본성의 원리인 연합의 원리와 정념의 원리가 발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지각의 다발인 정신, 상상력의 넘쳐남---어쩌구 저쩌구---경험과 습관, 신체를 매개로한 믿음과 발명--- “허구가 원리가 될 때 반성은 반성을 멈추지 않지만 단지 더 이상 교정할 수 없다. 반성은 착란적 절충 속으로 뛰어든다.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정신은 단지 착락이고 망상일 뿐이다. 상상적이지 않은 완성된 체계, 종합, 또는 우주론은 없다(159).” “그러므로 환상은 승리한다. 환상은 정신의 본성이 되어 자신의 본성에 대립하고 자신의 환상을 이행시킨다. 여기서는 가장 미친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체계는 광기의 착란이다(160).” 체계를 거부한 아포리즘의 대가이자 광기의 철학자. 니체가 떠오르고! “망상은 정신에 관련된 인간본성이다. 흡사 양식良識이 인간본성에 관련된 정신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둘은 서로의 이면으로 존재한다(163쪽).” “고대철학은 ‘어둠 속의 유령’이며, 새로운 철학 역시 나름의 유령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들뢰즈의 말에서는 “철학은 오류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불가피한 착각의 고발인 것이다(14쪽)”란 말이 오버랩되고요. 이 부분에 대한 논리적인 서술은 제게 무리인 것 같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믿음과 발명’이 인간의 최후의 보루이자 최선의 방침이다, 로 알아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5번 항에 대해 보충 말씀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음 시는 흄의 이상야릇한 존재인 ‘원자’ 개념으로 인해 착란적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경 계
_신현정
나, 해태상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나는 모든 것의 경계에 섰노라 하고
외쳐보려고 한다 해태의 눈을 하고
이빨을 꽝꽝꽝 내보이며
뿔을 나부끼며
경계가 여기 있노라
연신 절을 하려고 한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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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님의 댓글
선우
나무님 잘 읽었습니다. 5번항이 지난 주 내용 관련한 질문이신거죠?
그 문장은 들뢰즈가 5장의 1번 결론 "주어진 것은 더 이상 주체에 주어지지 않으며,
주체가 주어진 것 안에서 구성된다." 에 뒤이어 2번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그렇다면 주어진 것은 무엇인가-가운데
나오는 건데요. 나무님의 질문이 정확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5장의 2번 내용 전체와 연관하여 설명해야
이해될 듯 합니다.(셈나 때도 모래 한 알의 관념, 근육의 인상 이야기 나왔던 부분이지요. 근육의 인상
이야기 하면서 공간 관념 설명하는 건 아직도 아리송합니다.^^)
큰 틀에선, 주어진 것 즉 정신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해나가는 것이고요.
그러면서 결국 주어진 것은 "요소의 분할불가능성과 요소들의 분배, 즉 원자와 구조다"라는 답을 끌어냅니다.
분할불가능성 이야기에서 한계짓는 관념, 최소단위, 원자라는 말들이 나오고요,
(왜냐하면 주어진 것, 정신의 불변성은 가장 작은 관념으로만 설명이 되니까요. / 모래 한 알 비유)
구조에 대한 이야기에선 시간과 공간의 관념이 나옵니다.
들뢰즈는말합니다. "공간 안에 주어진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이 먼저 있어서 거기에 주어진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겠죠.
"공간이 주어진 것 안에 있다. 공간과 시간은 정신 안에 있다." 지각의 형식으로 선험적으로 미리 주어진 것도 아니고요.
주어진 것이란 무엇인가? 지각의 다발 즉 정신인데, 정신은 요소들의 분할불가능성(원자)과 요소들의 분배(시간과 공간, 구조)로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주어진 것, 정신 안에서 주체는 구성된다.
namu님의 댓글
namu
네, 고맙습니다. 원자와 구조, 주어진 지각의 다발인 정신 안에서 주체는 구성된다. 이 한마디에 경험주의와 주체성이란 함축 의미가 다 들어간 듯하군요.
그리고 정신의 착란 부분?
홍시님의 댓글
홍시
1. ’이성은 정념의 도구’ 지금 저에게 명확하게 와닿는 문구예요^^ 저는 늘상 이유를 찾는 인간인데 그게 나쁜건가?하면 그렇지 않다는 확신을 얻었어요. 앞으로도 이기기 위해서 이유를 찾을거예요. 이기기 위해서 논리를 쓰고 이성을 발휘할 겁니다. 그러나 논리가 배제-소회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는 것, 혼자 이기지 않는 것을 나름의 과제로 삼고있어요. 결과적으로 서로 이기는 지혜로운 사회를 꿈꿉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이긴다'는 것이 정념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 그건 저에게 중요한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2. 자살에 관한 이야기에서 떠오른 건 붓다가 신을 철저하게 발라버린(?) 일화예요. '신’과의 한판승에서 '영원성(신의 속성)'으로 신을 이겼다는 일화를 어디선가 줏어들었거든요... 자살이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것은 신을 이길 수 있는 비책으로 볼 수도 있는거죠, 그러나 니체의 말처럼 신은 죽었습니다. 신은 없습니다. 신은 이겨야 할 존재가 아니라, 같이 살아가야 할 (유령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 또 요즈음에는 꼭 필요한, 나만의 신을 발명해야 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스스로 신이 되는 것도 괜찮을거 같고요. 아니 어쩌면, 지금껏 말한 모든 것에 이미 해당되는지도 모르겠어요. 과연 인간이 한가지만 고수하면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3. 자신의 편파성, 치우친 동정심을 공감을 통해 넘어서는 것, 적극적인 제도의 발명… 멋진 개념이에요, 나름대로 열심히 구상중입니다.
4. 흄이 평생 독신이었다는 사실, 최근 들어 겪는 일들과 더불어 독신이 두렵지 않을 - 용기를 얻고 있어요. 성별을 넘어서 함께 사는 공동체를 꿈꾸지만, 의심이 많은지라 실상, 막상 용기가 잘 나지 않아요.
5. 가장 작은 인상이 감각적 점이라는 말… 이해할 듯 말 듯 아리송하네요. "공간과 시간이 정신안에 있다" 는 말은 확실히 와닿습니다. 그럼 최소 단위(원자)의 감각, 즉 인상들이 모여 시간과 공간을 만들고 그것들이 정신안에 있다는 것인가요? (원자 개념과) 정신은 물론, 시간과 공간 모두 착란이라는 거구요? ㅎㅎㅎ
세미나 끝나고 귀가하는 길에 나무님께서 계속해서 흄이 '대단하다'고 강조하셨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그런데 이 발견은 붓다가 제자들에게 설파했던 내용의 핵심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 맥락에서 보면 거의 3000년(너무 후려친건가요?)이 다 되어가도록 인류의 의식에는 작은 변화들만 있었다 싶어요. 흄 - 들뢰즈… 읽기가 고생스럽지만 참 흥미롭고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나무님의 '말’ 을 이해하게 도와주는 후기, 고맙습니다.
선우님의 댓글
선우
앗, 홍시님 이 댓글이 왜 비밀글로 설정 되었을까요?^^
나무님과 다른 멤버들도 볼 수 있도록 풀어주셔요~(저는 읽었습니다만. . . )
홍시님의 댓글
홍시수정중이라 잠시 비밀글로 해 두었어요^^
선우님의 댓글
선우아, 넵!! 낼 봬요~
홍시님의 댓글
홍시소회 > 소외로 수정을 하고, 세미나를 > 푸코 세미나로 싶은데 수정을 할 수 없게 되어있어요, 다른 댓글은 안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혹시 댓글에 무슨 권한 설정같은게 있어서 변경이된건가요? ㅠㅜ 그런데 이 댓글은 또 수정이 가능하고... 소회를 소외로 고쳐쓰지 못한다고 해서 뭐 큰 문제가 있겠냐만요 마구 궁금해집니다... 이 이유를 찾는 습관, 을 어쩔까요~~~~(시스템의 문제일거라고 예상됩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홍시! 댓글에 답변이 달리면, 댓글을 수정할 수 없게 기능을 만든 거지요!
'이 댓글'은 답면이 달리지 않았으니, 수정이 가능한 거고요^.^
아마 제가 답변을 달았으니 이제는 '이 댓글'도 수정이 안되겠네요. ㅎㅎ
홍시님의 댓글
홍시
그렇군요 오라클~! 역시~~~~~! 궁금증을 해소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오라클의 답변에 바로 답변을 달 수가 없어요~
답변에 대한 답변의 횟수에도 한도가 있는가 봅니다.^^
'이긴다'는 것은 제 입장에서 '만족감' 인데, 문제 해결의 만족감 같은건데(결국 인상, 정념) 그 말을 덧붙여 수정하고 싶었는데 수정이 안되니 여기다가 살짜쿵 덧붙여 봅니다. 이런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이것도 그냥 자기 만족감^^ 편집 일하면서 생긴 편집증~~~ (개인적으로 댓글 시스템에는 페이스북 처럼 댓글 수정의 히스토리가 저장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