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0609 <래디컬 페미니즘> 1장 발제문
소리
/ 2018-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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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디컬 페미니즘>의 서문에 쉴라 제프리스는 자신의 페미니즘적 노선을 우리 세미나에서 함께 읽었던 <성의 정치학>을 통해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궁금했던 그것, “남성들의 성적 폭력을 종식시키고자 했던 이 페미니스트들의 시도가 왜 패배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성적 평등에 가까이 왔을 때 어떤 이유로, 어떤 상황 속에서, 왜 그 거대한 원동력을 잃고 흩어지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것부터 짚어가기 위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금욕주의자들, 성적 엄숙주의자들이라고 불리던 페미니스트들을 먼저 알아보게 되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이후 성해방 담론이 찾아오고 퀴어라는 단어와 함께 거대 퀴어 담론이 출현합니다. 퀴어라는 통합적인 단어는 남성의 성 정치학을 설명하기 위해 채택되었던 것이고 퀴어라는 지붕 아래에 들어가기 위해, 레즈비언들은 자신의 이름을 넘겨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룰 중요한 얘기들은 바디 아트, 꾸밈 노동에 관한 새로운 시각에 대해 다루고, 성매매에 대한 부분도 다룹니다. 또한 트렌스 젠더가 여성의 안전권과 존엄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도 다루게 됩니다.
쉴라 제프리스를 페미니스트의 길로 이끈 <성의 정치학>은 대단한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퀴어와 포스트 모던 경향에 맞지 않기 때문에 현재에 무시당합니다. 우리는 이 책의 강력한 동력, 그 통찰의 힘과 분석의 힘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는 제프리스의 분석을 알아봅시다. 그는 현재 대학을 은퇴하고 영국에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운동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레즈비어니즘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레즈비어니즘은 여성들 간의 연대적 의식이 강한 사조로서, 성적 지향성과는 무관합니다.)
1. 역사와 섹슈얼리티
그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먼저 조작된 역사를 먼저 짚습니다. 1880년~1914년 사이 남성의 섹슈얼리티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거대한 운동이 있었습니다. 이 진보적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참정권 운동, 여성 교육, 직업 교육, 법률 개정 등의 진보적인 행보를 보였으나 영국 여성 운동 역사에 자세히 기술되지는 않습니다. 똑같은 페미니스트들인 이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주장은 성 엄숙주의자의 것이며, 금욕주의자의 것이라고 여겨지며, 성적 쾌락과 성적 자유에 대해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퇴보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여성운동가들을 모두 다루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세 가지 범주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다루기로 합니다.
섹슈얼리티의 역사에 있어 역사학자들의 역사 기술에 깔려 있는 기본 관념 중 잘못된 전제 관념이 있습니다. 지난 100년 간의 역사가 빅토리아시대적 성 엄숙주의라는 어둠에서 성적 자유의 빛으로 나아가는 진보의 시기라는 것. 자유를 향해가는 섹슈얼리티의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 여기서의 본질은 자연적이라고 일컫는 이성애적 삽입 성교입니다.
잘못된 또 다른 전제로 여성과 남성 사이의 섹슈얼리티의 권력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침실을 둘러싼 세계 속의 권력관계가 구성되는데 있어 성적 행동이 그 자체로 역동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의 모든 것은 권력관계 안에 있고, 개인적인 것은 단순 사적 영역의 것이 아니라 권력 투쟁의 장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역사 기술에서 벗어나 위에서 언급한 페미니즘 활동 영역 3가지를 분석합니다.
첫 번째, 1880년대와 1890년대의 남성의 성매매 여성착취와 아동 성학대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려 했던 사회정화 운동입니다. 페미니즘 세미나 전 커리큘럼의 책 <섹슈얼리티의 매춘화>를 통해 우리는 ‘전염병 예방법’에 대해 자세히 배웠습니다. 이 내용이 또 나옵니다. 성매매 여성에 대한 성병검사를 통해 여성을 ‘순결한’ 여성과 ‘타락한’ 여성으로 구분하여 여성들 간의 자매애를 통한 결속을 방해하고, 여성 시민권을 침해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여성 운동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전작에서 배운 조세핀 버틀러와 새로 나오는 제이 엘리스 홉킨스가 있습니다. 이 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활동가로서 버틀러는 자주 언급되지만 홉킨스는 잘 언급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제프리스는 홉킨스에 주목합니다.
홉킨스는 기사도 정신과 예의에 입각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의 주장은 당대 페미니스트 운동보다 훨씬 단호했고, 전투적이었습니다. 사회정화운동을 했던 그는 여성의 지위 격하에 대한 남성들의 책임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했으며, 성매매와 성에 관한 이중기준을 없애기 위해 세 가지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전문 단체를 전국에 설립하여 사회 안전망을 만들었습니다. 아동 성 학대와 근친 강간에 대해 분노하고, 그가 만든 협회와 함께 관련 범죄를 처벌하는 법률을 통과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회정화 운동은 초기의 시작부터 페미니즘 운동과 반대되는 흐름이 있어왔습니다. 성매수 남성과 함께 성매매 여성들도 함께 처벌했고, 여성 성착취를 비판한 한 초기와 달리 종교 계열의 도덕주의자들과의 연합으로 그 운동성이 크게 변질되어 막을 내리게 됩니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페미니즘 사상
섹슈얼리티의 영역에서도 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울슨홈 엘미와 프랜시스 스위니가 나옵니다. 둘 다 여성의 성적 종속이 남성에 의한 여성 억업의 근본이라고 보았습니다. 해결책으로 스위니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신체적인 성행위를 가능한 많이 없애고, 남성들이 스스로 억제하도록 홍보하는 것, 그리고 정신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울슨홈 엘미는 여성 스스로 신체를 통제할 권리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의 통제는 성행위를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 아이를 가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생각은 부부 강간의 개념을 법제화하는데 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나 이는 실패합니다.
(현재 부부강간 죄가 인정되는 한국과 달리 외국은 남편에 의한 아내 강간이 불법인지?)
울슨홈은 임신 목적 외에는 삽입 섹스를 하지 말자는 의견도 펼칩니다. 남성들의 육체적 섹스에 대한 집착으로 여성이 단순히 성적인 기능으로 폄하되는 방식에 분노했습니다. 이러한 목소리를 19세기 중반부터 1920년 대 까지 반복해서 들리는 말입니다. 성적 자기 통제와 정신적 사랑을 통해 신체를 동물적 용도로 격하시키는 것에서 벗어나 남자들이 장악했던 삶의 모든 영역을 온전히 되찾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후대에 그녀를 묘사하는 말들은 성 엄숙주의자나 그녀가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날조한 이야기들만(월경이 남성에 의한 성학대로 나온다는 당대 남성 의사들의 생각) 인용하여 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위니는 여성 억압을 남성들이 여성을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워줄 노예로 만들기 위해 모권제를 파괴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성적인 존재로 여성을 환원시키는 것에 대해 비판하며 특히, 여성들이 성적인 속박으로 인해 남성이 원할 때면 언제든 삽입성교에 응하게 강요당하는 것을 비판합니다. 현재에 의학계에서 입증된 삽입 성교로 인한 성병의 발발, 그리고 정액과 자궁경부암의 상관성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동시에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해서도 강력히 반대하며, 금욕과 자연법이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섹슈얼리티와 여성 참정권 운동 1906-1914
두 번째, 1890년대 결혼제도 내외의 성행동에 대한 문제 제기와 여성 억압의 기반인 여성 성 노예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히려 했던 운동입니다. 섹슈얼리티 영역의 투쟁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참정권 운동 기간에 추진력을 더해갔습니다. 6개 이상의 다양한 신조를 가진 여성 단체들이 성에 대한 이중 기준과 성매매 문제에 거의 동일한 어조로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이 시기에 많은 운동가들은 여성이 투표권을 가지면 남성이 정조를 지키게 할 수 있고, 성매매를 통한 여성 학대를 종식시키며, 여성성 상품화 및 아동 성학대를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성 노예화를 근절하기 위해여 남성과의 성관계를 보이콧 했던 제1차 세계대전 이전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입니다. 남성 섹슈얼리티를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의 중심에 <여성 사회 정치 연합(WSPU)>이 있었고, 이 단체의 옹호자인 루시 리발렛은 여성 참정권 운동 뒤에 있는 ‘근본적인 문제’와 ‘중요성과 필연성’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시기에 성병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고, 관련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여성에게 투표권을, 남성에게 금욕을”이라는 문구가 대두됩니다.
반 페미니스트들과 섹스 개혁가들은 늘 그렇듯 남성의 욕구는 통제 불가하며, 삽입섹스가 남성 건강에 필수적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남성의 성적 욕구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재훈련이 가능하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 지속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남성과 어떠한 성적 관계도 갖지 않기를 선택합니다. 남성의 성행동을 비판하는 것과 남성의 자기절제를 촉구하는 운동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부는 남성과의 관계에서 여성이 억압 당하는 방식에 대한 저항으로 이런 선택을 했으며, 일부는 독신 여성들이 다수 존재하는 사회에서만이 여성의 지위가 향상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략은 반 페미니스트들에게 적지 않은 불안을 야기시킨 점을 고려해 검토해볼만한 주제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1911년에 여성의 인구는 남성의 인구보다 많았고,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 결혼율은 낮았습니다.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가장 유명한 에밀리 팽크허스트의 딸인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는 여성들의 독신이 정치적인 결정이자, 여성이 성 노예로 전락한 현실에 대응한 의도적인 선택임을 단언합니다.
시슬리 해밀턴은 <거래로서의 결혼(1909)>을 통해 여성들의 혁명에 독신주의가 왜 정치적으로 필요한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독신 여성들만이 여성운동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내와 어머니의 지위 상승과 관련된 성과들은 결혼제도 밖에서 만들어졌으며 대부분은 독신에 만족했던 여성들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독신 여성들의 지위가 높아지자 결혼제도의 위신이 손상되었고, 여성들이 결혼을 선택하게 하기 위해서 결혼제도를 손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독신 열풍이 붐을 이루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