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근대철학] 경험주의와 주체성 3-4장 발제문
케테르
/ 2018-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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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문 뒤늦게 올립니다. 각 장 중간의 번호에 따른 제목들은 제가 임의로 붙인 것입니다.
간단한 후기는 오늘 밤이나 내일 올리겠습니다.
경험주의와 주체성
3장. 도덕과 인식에서 상상력의 힘
1. 일반 규칙과 상상력
흄은 일반규칙이 본질적으로 반성과 확장의 통합이라고 말한다. 이 둘은 결국 동일하다. 정념은 그것이 반성되기 때문에 확장되며, 이와 같은 것이 규칙을 수립하는 원리이다. 또한 흄은 규칙의 두 종류를 구별하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하나는 결정하는 규칙이고, 다른 하나는 교정하는 규칙이다. 1) ‘결정하는 규칙’은 반성적이라기보다는 확장적이다. 이 규칙의 속성은 그것이 태어난 정황 너머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예외를 알지 못하며, 우연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 또는 본질적인 것과 혼동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2) ‘교정하는 규칙’은 확장적이라기보다 반성적이다. 교정의 규칙이 교정하는 것은 바로 결정하는 규칙의 확장이다. 우연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을 혼동하는 대신에, 그것은 우연성 자체를 또는 예외를 고려하는 일반규칙으로서 나타난다.
확장과 반성은 동일하면서도 상이한 두 관념이다(96). 두 종류의 규칙은 서로 구별되며 서로 교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동일한 기원, 동일한 구성원리를 가진다. 그렇다면 그 규칙은 어떻게 가능한가? 정념은 스스로 반성한다. 바로 상상력 안에서이다. 일반규칙은 상상력 안에서 반성된 정념이다. 본성의 원리로서 정념의 속성은 정신에 감응을 불러오고 정신을 특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정신은 자신의 정념을, 자신의 감응을 반성한다(97). 반성 안에서 정념은 스스로를 상상하고 상상력은 스스로에 몰입한다(98). 규칙은 가능하다. 일반 규칙의 실제 정의는 그것이 상상력의 정념이라는 것이다.
[규칙의 세 유형] 첫째, 취미의 규칙이 있다(98). “감정이 우리의 정념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취미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상상력을 넘어설 필요는 없다.”(99) 이와같이 취미는 상상력의 감정이지 마음의 감정이 아니다. 둘째, 자유의 규칙이다(101). 우리는 정념의 일종인 의지가 “어떤 방향으로든 쉽게 움직이며, 그것이 정착하지 않는 곳에서조차 스스로의 이미지를 생산”함을 느낀다. 셋째, 이해관계의 규칙과 의무의 규칙이 있다(101). “두 대상은, 하나가 다른 것의 작용이나 운동의 원인일 때, 전자가 후자의 원인일 때처럼 이런 [인과]관계에 놓여있는 것으로 고려될 수 있다.” 주인/종
그러므로 정념의 반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상상력이다. ~~ 상상력은 감응을 반성하고, 감응은 정신 안에서 울려 퍼진다. 도덕의 원리와 정념의 원리가 정신에 감응을 불러올수록 정신은 하나의 환상으로 존재하기를 멈추고 스스로 고정되며 하나의 인간본성이 된다(103). 그 자신은 고정시키는 형식들을 반성하는 가운데 상상력은 그것들을 해방시키고, 스스로 해방되면서 그것들을 무한히 확장시킨다. 즉 상상력은 한계로부터 환상의 대상들을 만들고 우연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그 한계를 본질적인 것처럼 가직 유희하며, 힘을 그것의 현실적인 실행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이 분리가 환상의 착각(가상)이라고 흄은 말한다(104).
2. 정념과 상상력의 관계
문제의 핵심은 정념과 상상력의 관계에 있다. 이 관계의 결정은 정념 이론의 진정한 독창성을 구성한다. 연합의 양태들이 그렇듯 정념의 원리는 정신을 넘어서며 그것을 고정시킨다. 그러나 정념은 연합의 양태들과 같은 방식으로 상상력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연합의 양태들이 관념을 가능한 상호적 관계를 준다면, 정념의 성질들은 그 관계에 한 방향과 한 가지 의미를 주며, 그것에 하나의 실재, 일의적 운동, 따라서 일차적 항을 부여한다.
상상력은 가장 멀리에서 가장 가까이고 움직인다. “인간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대상들에게 주로 관심을 가진다.”(113) 더구나 상상력의 성향은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연합은 상상력 안에서 관념들을 연결짓는 것이고, 정념은 이 관계에 하나의 의미를, 따라서 상상력에 하나의 성향을 부여한다.
주체성은 하나의 성질이 아니라 관념의 다발의 특성화이다, 주체성의 관념은 이제 상상력에서의 감응의 반성이며, 그것은 일반 규칙 자체이다. 주체성의 관념은 여기서 더 이상 사유의 대상, 어떤 사물의 성질이 아니며 표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하나의 규칙, 도식, 구성의 규칙이다(115). 이와같이 오성의 측면에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자아의 문제는 오직 문화 안에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해결을 발견한다. 사실상 이제 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감응 자체와 그것의 반성의 종합이며, 상상력을 고정시키는 감응과 감응을 반성하는 상상력의 종합이다.
3. 실천적 이성과 이론적 이성
실천적 이성은 문화와 도덕성 전체의 수립이다(116). 어떻게 이런 [문화와 도덕성의] 수립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도식화하는 상상력이다. 또한 그런 도식론은 상상력의 세 가지 속성을 나타내고 번역한다. 즉 상상력은 1) 반성적이고 2) 본질적으로 넘쳐나며 3) 외관상 구성적이다. 그러나 반대편 극단에서 ‘이론적 이성’은 자연의 세부사항, 말하자면 계산에 종속되는 부분들에 대한 결정이다. 이 결정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는 분명 문화와 도덕성의 수립과는 다른 방식을 취할 것이다. 이론적 이성에 특수한 도식론이 있어야.
이성은 본성이 된 상상력이며, 연합의 단순한 결과, 일반관념, 실체, ‘관계’의 전체이다(117). 관계의 종류가 두 가지이기 때문에(확실한 지식의 대상이 되는 관계 = 유사성, 양의 관계, 성질의 정도, 반대, 확실한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관계 = 시간과 장소, 동일성, 인과성 또는 우발성) 이성에도 두 종류가 존재한다, 1) 확실성(직관 떠는 논증)에 의해 활동하는 이성, 2) 개연성(실험적 이성, 오성)에 의해 활동하는 이성으로 나뉜다. 이 두가지 이성은 관계의 종류에 따른 두 가지 사용일 뿐이며, 이들은 [관념들의] 비교를 공통의 뿌리로서 갖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확신은 서로 무관한채로 있을 수 없다(확실성과 믿음).
[믿음을 산출하는 습관의 원리]
1) 인간본성은 자연에 대한 관찰, 자연의 경험을 우회한다, 흄에 따르면 이것이 핵심이다, “연합을 산출하는 습관은 대상들의 잦은 연접을 통해 발생하므로 그 습관은 점차 완전성에 도달하여야 하고 우리가 관찰하게 되는 각각의 사례들로부터 새로운 힘을 획득해야 한다,”(119) 여기서 인과성이 개연성에서 유래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습관의 역설은 그것이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동시에 인간 본성의 원리라는 데 있다, “습관은 자연/인간 본성의 원리들 중 하나일 뿐이며, 습관의 모든 힘은 자연이라는 기원에서 유래한다.”
2) 원리는 바로 습관들을 수축시키는 습관이다. 본성의 한 원리인 습관이 점진적으로 형성된다는 말은 우선 경험이 그 자체로 본성의 한 원리라는 말이다. “경험은 과거 대상들의 몇가지 연접에 대해 나를 가르치는 원리이다. 습관은 미래에도 동일한것을 가대하도록 결하는 또 다른 원리이다. 그리고 경험과 습관은 공모해 상상력에 작용한다.” (121)
3) 다음으로 습관이 경험을 전제하는 동시에 경험과는 다른 원리라는 점을 기억하자. 경험에 의해 우리는 특수한 연접들의 관찰자가 된다, 그 본질은 유사한 경우의 반복이다(유사성). 그 결과는 철학적 관계와 같은 인과성이다. 상상력이 오성이 되는 것이다. “대상들이 오성에 통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관념들이 환상 속에서 통합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원인에서 결과로 추론을 이끌어낼 수 없을 것이며 어떤 사실의 문제에서도 믿음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123) 바로 이것이 습관이 ‘다른 원리’로 나타나는 이유이다, 혹은 인과성이 자연적 관계로서, 관념들의 연합으로서 나타나는 이유이다. 이런 또 ‘다른 원리’의 결과는, 상상력이 믿음이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123)
4) 다른 한편 습관은 경험을 전제한다(124). 습관은 그것이 오성이나 상상력에 의해 한 대상의 관념을 산출하는 한 경험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복을 응시하고 반복이 새로운 인상을 산출토록 하는 정신을 고찰한다면, 그 때 반복은 점진적 과정이 되고 생산이 되기까지 한다(124).
5) 인위적 고안물(도덕적 세계)과 습관(인식의 세계) 사이에 유비가 성립한다, 이 두 심급이 작동하는 방식은 다르다. 도덕의 체계 안에서 규칙들의 조건은 상상력 안에서의 본성 일반의 원리에 대한 반성이 된다, 그러나 인식의 체계 안에서 그 [규칙들의] 조건은 한 원리의 매우 특수한 성격 안에 있으며, 이는 그 원리가 이 경험(혹은 등가적인 어떤 것)을 전제할 뿐 아니라 그것이 형성되어야 할 때도 그렇다. 믿음은 신중한 자연의 원리라고 흄은 말한다. 정의상 우리가 믿는 관념은 현재의 인상과 연합되어 있는 관념, 따라서 상상력을 고정시키는 관념, 인상이 자신의 생생함을 전달하는 관념이다, 이 전달은 유사성과 인접성의 의해 강화되지만, 본질적으로 인과성에서, 습관에서, 그러므로 결국 두 대상들 사이의 경험에서 관찰되는 항상적 연접이라는 경우의 반복에서 자신의 법칙을 발견한다.(124) 습관은 위조된 경험을 내세워 가장할 수 있고,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은 반복에 의해 믿음을 산출할 수있다,
이렇게 산출된 오성의 믿음은 엄격한 실행이라는 관점에서 불법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가피한 것으로서 흄이 ‘비철학적 개연성’이라고 부른 확장적이고 일반적이며 넘쳐나는 규칙들의 집합을 형성한다(126). 불법적인 믿음, 경험에서 발생하지 않은 반복, 비철학적 개연성 등은 언어와 환상이라는 두 개의 원천을 가진다(128). 이것들(언와와 환상)은 허구적 인과성이다, 1) 언어는 관찰된 반복을 발화된 반복으로, 현재 대상의 인상을 우리에게 생생한 관며을 떠올리도록 하는 결정된 말의 청취로 대체하면서 스스로 믿음을 산출한다. 말은 믿음의 허상, 믿음의 위조를 산출한다. 2) 환상은 본질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을 혼동케 한다(129). 믿음의 위조는 사실 언제나 우연적 성격에 의존한다. 그것들은 대상들의 관계가 아니라, “그 사람의 현재 기분과 성향”에 의존하는 것이다. 환상은 어떤 대상에 수반된 그저 우연적인 정황의 나타남을 경험 안에서 그 대상의 반복으로 해석한다. 결국 도덕의 체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오성의 체계 안에서도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넘쳐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