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틀러] 젠더 허물기 :: 1장 발제 (0614)
삼월
/ 2018-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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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나 자신을 잃고: 성적 자율성의 경계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9·11 테러 이후 애도와 함께 공동체의 윤리적 관계성을 모색하면서 이 책을 썼다. 그 관계성에는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을 통해 지적했던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비롯하여 인종, 계급, 종교 등 신체적이고 문화적인 모든 배타적 관계들이 포함되어 있다. 살기 좋은 세계에 대한 버틀러의 질문은 개인의 삶을 향한다. 개인들이 각자 자신의 삶을 견딜 만 하다고 느끼는 가에 대한 문제로. ‘삶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누군가에게 떨어질 때, 그 질문은 긍정의 대답을 끌어낼 수 있다. 반면 어떤 이에게는 증오나 분노를 끌어내거나, 조롱과 공격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때 ‘삶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윤리적인 동시에 철학적이고, 충분히 정치적인 질문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함께 질문을 해 보자. 삶은 가능한가, 당신의 삶은 견딜 만한가.
버틀러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특정한 관점이 개입되어야 함을 지적한다. 먼저 삶이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적인 삶을 구성하는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와 마주한다. 상실을 통해 타인과의 유대를 사유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게 된다. 유대가 상실되면 우리는 종종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게 된다. 버틀러는 유대의 상실을 통한 슬픔이 자아를 구성하는 사회성, 정치공동체를 사유할 기반을 드러낸다고 본다. 슬픔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타인은 ‘자율적인 나’라는 개념에 저항하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설명을 방해한다. 우리는 서로에 의해 허물어지며, 누구도 항상 온전한 상태로 있을 수 없다. 젠더나 섹슈얼리티도 마찬가지로 나의 소유물이 아니며, 타자를 통해 가능해지는 존재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버틀러는 타자를 통해서야 가능해지는, 자기 자신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범위를 더 폭넓게 그리고 정치적인 의미로 바라본다. 성적인 열정, 감정적 슬픔, 정치적 분노를 정치적 곤경의 맥락에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곤경은 우리가 ‘권리’를 개인적인 문제로, 차별에 대한 보호는 집단이나 계급의 문제로 주장하는 데서 온다. 이런 주장의 맥락에서는 우리를 제한되고 인정 가능하며 설명 가능한 존재, 법 앞의 주체, 동일성으로 규정된 공동체로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은 법으로만 설명되지 않으며, 오히려 열정이나 슬픔을 통한 타자와의 유대를 통해 정치공동체가 조직되기도 한다. 물론 타인을 향해서 말을 걸 때도 분명하게 존재하는 우리와 타인의 차이를 무너뜨릴 방법은 없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문제적 표현인지를 깨달을 뿐이다. 우리는 그 ‘우리’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며, 그것은 해결할 수 없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몸이 정치 차원에서 수용될 것을 촉구하지만, 오히려 우리 자신은 몸을 통해 사회적이고 문화적 맥락 속에서 노출된다. 몸이 된다는 것은 이미 사회적인 것이고, 타자와 관계 맺는 일이다.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 운동에서 몸의 자율성에 기대지 않고 자기결정권을 요구하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버틀러는 ‘몸의 자율성’이 살아있는 패러독스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몸의 자기결정권을 요구하면서도, 몸이 딱히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몸의 공적 차원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유대를 악용하여 몸을 매개로 나타나는 공동체의 폭력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공동체의 유대 속에서도 우리는 각자의 몸으로 서로에 대해 외부에 존재한다. 그 외부성과 몸의 근본적 사회성을 통해 타인의 몸이 삶에 연루되는 방식을 이해할 가능성을, 버틀러는 슬픔에서 찾는다.
버틀러는 2001년 9월 11일 이후 미국에서 있었던 애도, 공포, 불안, 분노를 이야기한다. 폭력은 타인에 대한 인간의 나약함이 가장 공포스럽게 노출되는 방식이다. 우리 몸의 나약함은 타인에 대한 나약함을 늘 안고 있으며, 이 나약함은 특정 사회적·정치적 상황에서 심화된다. 이때 슬픔은 서로의 나약함(취약성)을 느끼게 하여 각자의 몸에 대한 총체적 책임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슬픔을 정치적 자원으로 만든다는 것은 취약성의 경험을 공유하여 타인의 취약성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은 명확한 것처럼 보인다. 처음부터 타인과 관계 맺고 개체화되어 있으며, 폭력에 취약하고 반드시 소멸하는 존재. 취약성은 ‘나’의 형성에 앞서 있고, 우리의 노력으로 ‘교정’할 수 없는 문제이다. 여기서 나타난 ‘인간’개념을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차별을 통한 신체적 폭력은 어떤 삶이 인간적인 삶으로 간주되고 있지 않음에 대한 폭로, 문화 속의 탈인간화가 작동되고 있다는 메시지이다. 폭력과 죽음에 극단적으로 노출되어 침묵과 우울로밖에 담론화되지 않는 그 삶에서 우리는 공통성의 이해로 작용할 취약성, 공통성의 해체도 읽어내지 못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는 이렇게 우리에게서 사라졌고, 그 상실에 대한 애도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규범으로서의 젠더가 몸을 통해 수행될 때, 몸으로서의 우리는 언제나 우리 이상의 것이며 우리가 아닌 어떤 것이 된다. 규범 밖의 섹슈얼리티는 언제나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그런 섹슈얼리티는 그 자체로 규범(결혼제도) 밖의 유대와 상실을 발견하고 상실에 공명하게 해 줄 것이다.
규범 안에서 ‘현실성’과 ‘진정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버틀러가 푸코를 인용해 주장하듯, 지식과 권력의 문제이다. 권력-지식의 결합체는 어떤 체계의 수용가능성을 구성한다. 그 결합체를 서술하려면, 대상의 구성 조건과 조건이 접한 경계선을 모두 보아야 한다. 조건들은 모방과 변형을 통해 상호작용한다.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성을 주장하며 규범 안에 동화해 들어갈 때, 현실로 확정된 것에는 균열이 발생한다. 균열을 통해 규범은 불안정성을 드러내고 새롭게 의미화된다. 성소수자운동 내에서도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운동은 각자의 우려와 요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몸의 체현은 정치적 영역에서 누가 생존 가능한 주체로 간주될지를 지배하는 일련의 논쟁적 규범을 의미한다. 몸이 경험되는 규범을 재조직하려는 노력은 몸에 대해 부과된 이상과 경합을 벌이면서, 장애인 정치와 성소수자 운동에서 핵심이 된다.
몸의 체현이 규범과 맺는 관계에는 잠재적 변형가능성이 있다. 현상태의 몸으로만 규제되지 않는 표명의 출발점으로 몸을 받아들이는 것을 환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환상은 가능성이 표출되는 부분이며, 생존 투쟁은 이 환상과 분리될 수 없다. 환상은 현실이 배제한 것이며, 자신을 현실의 외부로 만들면서 현실의 경계선을 정한다. 드랙, 동성애자, 트렌스젠더, 트렌스섹스는 이 환상을 통해 정치적 장으로 들어간다. 버틀러는 이들이 단지 억압받는 대상이라고 보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억압받는다는 것을 가시적 타자, 혹은 잠재적 주체로 존재한다고 보면, 성소수자는 비현실의 영역, 비가시적 영역에 있다. 이들은 인식조차 불가능하며, 인간이 될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버틀러는 새로운 젠더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그 가능성을 구분할 자격마저 규범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요점은 새로운 젠더 규범 정의에 있지 않다. 규범을 통한 인정에서 존재의 지속가능성을 발견한다면, 규범 없이 존재를 지속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규범도 변화하면서, 인정의 대상과 내용도 변할 수밖에 없다. 인정 규범은 변화하면서, 인간 개념을 생산하고 탈생산하는 작용을 한다. ‘나’를 존속시키는 근거는 탈아적으로 사회 규범에 달려있다. 동시에 우리 삶의 지속성은 이런 규범, 혹은 규범 안에서 규범과 타협할 가능성에 달려있다. 우리의 지속능력은 더 폭넓은 사회성에 의존하며, 의존성이 우리의 지속과 생존가능성의 기초가 된다. 나는 나에 선행하고 나를 초과하는 규범의 사회성에 기대지 않고서 내가 될 수 없다. 나는 처음부터 나의 외부에 있고, 생존 가능성을 위해 나 자신의 외부에 있어야 한다.
이제 성적 권리를 위한 투쟁은 인간으로 인지되기 위한 투쟁, 인간됨의 의미를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인간’개념은 늘 재규정과 재협상의 대상이어야 한다. 특히 환상의 양식으로 타인과 수동적 관계를 맺는 소수적 섹슈얼리티는 우리 존재의 탈아적 특성을 잘 드러내준다. 이로 인해 폭력과 위협에 노출된 성소수자는 제도적 보호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적 권리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개인이 의존하는 규범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권리에 대한 담론은 우리가 타인과 맺는, 혹은 타인에 대한 존재양식을 선언한다. 또 젠더 규범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행사되는 폭력은, 이 세계가 당연하거나 필연적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보려는 노력을 거부하는 부질없는 시도이다. 이런 폭력은 자연적 혹은 문화적이라 맹신하는 젠더 이분법 질서를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으로 유지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단순히 관점의 차이가 아니라, 인정 규범에 대한 저항가능성과 변화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일이다.
폭력에 대한 윤리적 문제는 차이에 대한 대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수용의 필요로 이어진다. 존재론적 확실성의 지점이 이동하는 것을 느끼고, 인간을 재표명하거나 수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단순히 인간의 변화를 수용하는 게 아니라 타자와 마주하면서 타자의 미지성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 미지성을 소거하는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범주는 누군가를 배제해 왔다. 우리는 ‘인간’을 안 적이 없었다. ‘인간’이라는 영역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인간이 생산·재생산·탈생산되는 방법에 대해 비판적·윤리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다. 이런 관점 없이는 윤리학에 대한 고민이나 사회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인간에 대한 규정은 지역적·국지적일 수밖에 없으며, 역사적·문화적 환경을 통해 달라진다. 인간의 기본 요건과 자격 역시 매체,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진 실천을 통해 알려진다.
버틀러가 인간 개념을 미래의 표명으로 열어둔다고 할 때, 이는 환원주의적 상대주의가 아니다. 버틀러는 우리가 인간이나 인권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나 인권,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표명할 것을 강요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적으로 이중의 길을 가야 한다. 우리의 정치생활에서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구성적 기능의 자격을 위해 ‘인간’을 사용해야 하며, 한편으로는 ‘인간’ 범주 자체가 비평적 엄밀성을 겪게 만들어야 한다. 인간이 되고 젠더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포괄하면서도, 이 경계를 열고 범주를 확대·파괴·수정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버틀러는 문화번역을 통한 재의미화의 가능성을 지적한다. 존재론의 기본 범주를 실행하는 것(인간, 젠더 등이 되는 것)은 기본 범주를 재표명하고 재의미화할 수 있게 한다. 문화 번역은 생소한 개념을 우리 것으로 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 범주를 생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개념도 오랫동안 이 문화 번역 속에서 만들어졌을 뿐이며, 문화 번역은 경계가 분명하고 뚜렷하며 통일된 두 단어 사이의 번역이 아니다. 번역은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양쪽의 언어 각각을 변화시킨다. 친숙하고 지역적인 것의 경계에서 양측은 변화를 겪고, 그 변화 속에서 방향 상실을 가져오겠지만, 변화의 가능성은 바로 그 상실에서 온다. 아무런 확실성 없이 그 미지의 기호들을 인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