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근대철학] 경험주의와 주체성 후기 +1
케테르
/ 2018-06-14
/ 조회 1,549
관련링크
본문
[경험주의와 주체성 3-4장 세미나 후기 늦게 올립니다]
세미나가 거의 한달 째 접어들면서 분위기가 더욱 밝고 열띤 대화로 세미나가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지난 목요일 세미나는 들뢰즈가 철학자 흄에 대해 다룬 ‘경험주의와 주체성’ 3장과 4장을 다루었는데요, 3장은’도덕과 인식에서의 상상력의 힘’이란 제목이 붙어있는데, 이는 2장에서 다룬 내용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지난 주 2장 [문화의 세계와 일반규칙] 의 내용을 다 다루지 못하여 먼저 2장과 3장을 공부하고, 말미에 4장을 공부했습니다.
[2장]
흄이 ‘일반규칙’이라고 부르는 것은 제도입니다. 이는 유용성 속에서 그 원리를 발견하는 적극적이고 기능적인 체계인 것이지요. 사회란 유용성에 근거한 관행의 집합이지, 로크가 이야기했듯이 상호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나 유용성만으로 제도를 다 설명할 수 없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흄은 이상과 관습이 제도의 본질과 특수한 성격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고, 또한 상상력이 그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버려진 도시를 차지하려면 성문에 창을 던져 꽂아두는 것으로 충분한가? 충분하지 않은가? 79쪽에 있는 표현에 대해 토론을 많이 했는데, 이 질문은 들뢰즈의 이 책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질문입니다. 비어있는 성을 차지하기 위해 1) 단지 투창을 하는 방법, 2) 문을 두드려 절차적 과정을 거치는 방법, 어느 것이 적합하고 타당한 방법일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그 정황이 좌우한다는 것이지요. 즉 소유권을 확정하거나 주장하는 어떤 정황 말입니다. “투창, 이것이 정황이다.” 투창만으로 그 성을 차지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경향이나 정황이 있는데, 이러한 정황은 상상력에 의해 반성됨으로써 가능하다고 이해했습니다.
다음의 말은 흄의 정치철학이나 도덕에 대한 이해를 잘 드러낸다고 생각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바꿀 수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꾸고 ~~”(84쪽)
“도덕성은 인간의 본성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을 발명함으로써 그 본성의 나쁜 점이 승리할 수 없도록 하는데 있다.”(84쪽)
제도나 도덕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관습과 상상력의 작용에 의해 인간 본성의 작용을 조율하고 올바르게 작동하도록 어떤 객관적인 조건을 조성하는 것이지요. 즉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도 아니요, 어떤 절대적인 이념이나 이상에 기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란 것이지요. 인간의 경험, 어떤 조건에 의해 형성된 것이란 것입니다.
[3장]
3장의 내용은 발제문 자료를 참고하세요.
101-102쪽의 상상력의 작용에서의 ‘의무의 규칙’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흄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 예로 들었는데요, 남자는 자식이 결코 자신의 아이임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상상력 안에서의 반성), 여성에게 정절을 요구하고, 이것이 여성의 특수한 미덕으로 요구되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규범 혹은 제도가 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일반 규칙이 일단 만들어지면, 사람들은 이를 처음 생겨나게 한 원리너머로 이를 확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이는 결정하는 규칙의 규칙의 확장성을 뜻합니다). 이러한 확장의 결과, 총각들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방탕하고 호색한인 것과 무관하게 여성이 정숙하지 못한 사례를 보면 충격을 받게 되고 편견을 갖게 된다는 것이지요(이를 반성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반성은 교정하는 규칙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정념의 반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상상력인 것이지요.
흄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인 오성이란 무엇인가? 이성과 오성은 무엇이 다른가? 등과 관련하여 117쪽에 근거하여 대화를 하였고, 덤 님이 잘 정리해주었습니다.
흄은 관념들의 관계의 종류가 두 가지이듯이(확실한 지식의 대상이 되는 관계, 확실한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관계) 이성도 두 가지라고 말했지요. 1) 확실성에 따라 활동하는 이성(딱보면 아는 직관적 지식 또는 논증으로 파악 가능한 관념 파악), 2) 개연성에 따라 활동하는 이성(시공간적 인접성, 유사성, 인과성을 추정하게 하는 우발성 등 관련). 오성은 후자와 관련되어 있는데요, 오성을 영어로 ‘understanding’이라고 하듯이 주로 추리와 판단에 관련된 이성의 활동에 관련되어 있지요. 즉 개연성을 다루는 역할을 하지요. 흄은 오성을 보다 강조하는 편이고, 이를보다 실천적이고 실험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와 반대로 칸트가 강조했듯이, 이성은 어떤 절대적인 이성이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가정하고, 이성이 진리의 표준임을 강조하지요. 덤 님이 지적했듯이 이렇게 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관념적으로 되고, 독단적으로 되지요. 불변의 진리를 강조하고 자신이 진리의 판단자 심판자가 되니까요 ~~
[4장]
4장은 종교와 신에 대해 다루는 장입니다. 마무리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들 138쪽의 들뢰즈가 종교의 본질을 묘사한 명쾌한 표현에 감동을 먹은 듯 했습니다.
흄=들뢰즈의 핵심은 유일신 체계이든 다신교 체계이든 종교는 상상력의 산물이고 확장적 규칙의 세계란 것이지요. 하지만 종교 역시 반성적 규칙의 체계이어서 반성을 하게 되는데, 문제는 종교는 순수한 상상력 안에서, 그리고 오직 허구적인 환상 속에서만 반성되므로 종교가 그렇게 존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145쪽).
‘착란’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관련되는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체계는 착란이다. 허구가 원리가 될 때 반성은 반성을 멈추지 않지만 단지 더 이상 교정 할 수 없다. 반성은 착락적 절충 속으로 뛰어든다(159).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정신은 단지 착락이고 망상일 뿐이다. 상상적이지 않은 완성된 체계, 종합, 또는 우주론은 없다(159).
그러므로 환상은 승리한다(159). 환상은 정신의 본성이 되어 자신의 본성에 대립하고 자신의 환상을 이행시킨다. 여기서는 가장 미친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체계는 광기의 착란이다(160).
종교적 착락을 말하는 문맥에서이지만 자세히 보면, 모든 체계가 착란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철학의 체계조차 그러하다는 뉘앙스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종교만이 착락의 체계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 자체가 망상이며 이러한 정신에 의한 관념으로 만들어낸 철학 역시 망상의 체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160). 이는 거의 니체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들뢰즈는 “고대철학은 어둠 속의 유령이다”고 말하고 “새로운 철학(근대철학?) 역시 나름의 유령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흄의 말인지 들뢰지의 말인지 구분되지 않는 들뢰즈식 어법이지만, 흄은 당대의 철학 체계에 대해서도 날선 비판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확장과 반성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가 발견되어야 한다. 그 관계는 우리에게 더이상 지속적 존재를 긍정하는 대중적 체계가 아니라 구별되고 독립적인 존재를 긍정하는 철학적 체계를 제안한다.”(158). 이것이 흄/들뢰즈가 제안하는 진정한 체계입니다. 지속적 존재, 즉 신이나 자아니 하는 것들을 가정하고 이에 기반하는 대중적 관습적 체계가 이나라, 구별되고 독립적인 존재를 긍정하는 즉 지속적 존재라는 모든 망상과 착락을 벗어난 경험에 기반한 철학적 체계 말입니다. 이는 새로운 철학을 말한다기보다 모든 제도, 모든 원칙, 모든 정부, 학문과 철학 등 모든 것이 실증적 경험주의에 기반한 철학적인 체계가 되어야 한다는 말로 보입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
댓글목록
선우님의 댓글
선우
지난 주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정신의 바탕이 '망상'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음... 살수록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빼어난 이성의 완벽한 체계라... 안 와닿습니다. ㅎㅎㅎ
망상과 양식이 서로의 이면으로 존재한다는 말도 쏘~옥 들어왔고요.
그래서, "가장 미친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체계는 광기의 착란이다." 라는 문장에 밑줄 쫙쫙 그었습니다.
내일 세미나 전까지 후기를 올려야 한다는 케테르 님의 '양식' 이면에
어떤 '망상'이 있는지 살짝 궁금해졌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