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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 발제] 젠더 트러블 마지막 시간 발제 (0531)
삼월 / 2018-05-31 / 조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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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몸의 각인, 수행적 전복

 

몸의 각인, 몸의 경계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페미니즘 이론에서 정체성의 구성물이 되고, 정치학에서는 인식론적 출발점으로 작동해왔다. 그러나 버틀러는 페미니즘이 내세우는 ‘여성들’이라는 정치적 형태에 대해 회의한다. 섹스/젠더의 구분과 성의 범주가 전제하는, 성별화 이전의 ‘몸’의 일반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반화에 따르면 몸은 문화적으로 구성된 젠더가 각인될 수 있는 무엇이다. 그러나 버틀러가 앞의 논의들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몸은 젠더 이전의 무엇이 아니라 문화적 구성물이다. 섹스와 젠더의 구분 역시 그 문화적 구성물을 인과적이고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버틀러는 이 책 《젠더 트러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몸의 사실성에 대해 질문한다. 몸은 어떻게 의미화에 선행하는 순수한 사실성이 되는가?

푸코의 계보학적 작업에서도 몸은 역사에 의해 각인된 것이며 나아가 파괴될 것으로 언급된다. 몸의 파괴는 발화주체와 그 주체의 의미 생산에 꼭 필요하다. 몸은 언어를 통해 기술되고, 지배와 각인을 통해 약화된다. 역사가 무자비한 글쓰기라면, 몸은 ‘문화’가 등장하면서 파괴되는 매개물이다. 그러나 몸에 대한 이런 구획은 역사나 주체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장을 확산적·능동적으로 구조화한 결과이다. 몸을 특정한 규제망 안에서 인식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의미화 실천이다. 몸의 경계를 설정하는 담론들은 모두 몸의 구성을 규정하는 적합한 경계와 태도, 특정한 금기들을 만들어낸다.

몸의 질서는 오염의 가능성을 통해 구축된다. 몸은 체계의 경계에 비유된다. 모든 사회체계들은 주변부에서 취약성을 보이고, 가장자리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특히 남성들 간의) 항문성교와 구강성교는 지배질서가 허가하지 않은 몸에 대한 침투를 확증하며, 여기서 동성애가 오염되었고 위험하다는 인식이 부각된다. 몸의 안정된 경계는 몸을 분명하게 만드는 금기의 결과일 뿐이다. 크리스테바는 배제를 통해 구성되는 주체인 ‘비체’를 언급한다. ‘비체’는 몸에서 추방되고 배설물로 방출된 것을 지칭한다. ‘나 아닌 것’(타자)을 주체화(비체화)하면서, 나 자신을 추방하고 뱉어내며 비체화한다.

몸의 경계도 원래 정체성의 일부였던 것을 더러운 타자로 방출하거나 전환하면서 확립된다. 성차별, 동성애 공포, 인종차별 등 몸에 대한 거부는 지배적 정체성의 토대이고, 정체성을 강화하는 혐오감으로 인한 추방이다. 혐오작용은 배제와 지배를 통해 타자를 만들어내는 ‘정체성들’을 강화한다. 내부와 외부가 완전히 구분되려면 몸의 전체표면이 침투 불가능해야 하며, 그 표면의 봉합이 매끈한 주체의 경계를 구성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 봉합은 배설물의 더러움으로 인해 반드시 파열하게 되어있다. 파열되기 전의 내부와 외부는 일관된 주체를 안정화하고 통합하는 이분법적 구분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이런 이분법이 장악력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내면성에서 젠더 수행성으로

푸코는 법을 내면화되는 것이 아니라 합체되는 것으로 보며, 법 스스로 의미화한 몸을 생산한다고 주장했다. 법은 자아, 영혼, 양심, 욕망을 통해 드러나지만, 동시에 완전히 숨어있다. 법은 결코 자신이 주체로 만든 몸의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몸의 내부(영혼)공간이라는 구조의 효과는 몸을 생명력 있고 신성한 봉합으로 의미화하면서 생산된다. 영혼은 사회적 의미화를 통해 몸 위에 각인되는 내적 심리공간에 대한 비유가 된다. 몸이 영혼의 감옥이 아니라, 영혼이 몸의 감옥이다. 금지된 법은 젠더라는 몸의 양식화를 발생시킨다. 이때 젠더의 규율적 생산은 이성애 구성과 섹슈얼리티 규제를 통해 젠더를 잘못 안정화시킨다. 일관성은 젠더의 불연속성을 은폐한다. 그러나 이 불연속성은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엇갈리는 것처럼 보이는 이성애, 양성애, 동성애 맥락에서 무성해진다. 이 몸의 질서 와해가 이성애적 일관성이라는 규제적 허구를 분열시키면, 표현적 양식은 자신의 서술능력을 상실한다. 규범이자 허구인 규제적 이상은 자신이 기술하고자 하는 성의 영역을 규정하는 법, 진행 중인 법으로 자신을 위장한다.

일관성은 이상화이며, 이상화는 육체적 의미화의 효과이다. 의미가 해석되는 행위, 제스처, 실행들은, 정체성이라는 육체적 기호나 담론적 수단을 통해 유지되는 조작물이라는 의미에서 수행적이다. 젠더화된 몸은 젠더의 실제를 구성하는 행위들과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 그 젠더의 실제가 본질인 양 조작된 것이라면, 내면성은 공적이고 사회적인 담론의 효과·작용에 불과하다. 이렇게 욕망을 표현하고 실행하는 행위와 제스처는 젠더를 조직하는 내면이라는 환영을 창출한다. 조작이고 환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젠더는 안정된 정체성이라는 담론의 효과로 생산되는 것처럼 보이며, 참이거나 거짓일 수 없다.

젠더의 조작기제 중 하나로 연기(흉내·위장)를 꼽는 이도 있다. 드래그, 부치/팸의 성적 양식화라는 문화적 실천은 젠더의 우연성뿐 아니라 모방적인 구조도 드러낸다. 이 우연성 속에서 연기는 이성애로 일관된 법 대신에 탈자연화된 섹스와 젠더를 보게 만든다. 젠더 패러디는 패러디적 정체성이 모방하는 원본을 가정하지 않으며, 정체성이 원본 없는 모방본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원본에 대한 조롱이 강하게 나타나는 모방은 패러디보다 패스티시이다. 미학에서 패스티시는 원본의 정상성을 가정하고 있는 텅 빈 패러디, 유머를 상실한 패러디로 불린다. 그러나 버틀러는 ‘정상’과 ‘원본’이 하나의 모방이며 실패임이 드러났을 때, 웃음은 계속될 거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묻는다. 어떤 수행이 내부/외부의 구분을 전복하고, 젠더 정체성과 섹슈얼리티의 전제들을 재고하게 만들 것인가?

몸이 경계이고 몸에 대한 침투가 의미화의 실천이라면, 육체적 실행인 젠더를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위티그는 젠더를 ‘섹스’의 작용으로 이해하는데, 이때 ‘섹스’는 몸을 제한된 가능성에 복종하면서 물질화하라는 의무적 명령이다. 강제적 체계 안에서 젠더는 처벌의 결과가 따르는 수행이다. 젠더의 구분은 개인을 ‘인간으로 만드는’ 작업의 일환이다. 젠더 행위들은 젠더 관념을 창조하고, 젠더는 규제를 통해 자신의 기원을 감추는 구성물이다. 양극화된 젠더를 문화적 허구로 수행·생산·유지하는 전체 합의는 이런 생산물에 대한 신뢰와, 그에 수반되는 처벌 때문에 모호해진다. 젠더 규범들의 집적이 ‘자연스러운 성’이나 ‘진짜 여자’같은 사회적 허구들을 생산한다고 가정하면, 이 육체적 양식들은 몸을 물화된 형식으로 이분법적 관계 속에 자연스럽게 배치하는 듯 보인다. ‘원인’으로 보이는 이런 배치가 ‘결과’라는 사실을 폭로해줄 수행은 무엇일까?

젠더는 반복된 연기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행위이다. 반복은 사회적 의미들을 재실행하고 재경험하게 한다. 이 수행의 목적은 주체에 귀속되지 않으며, 주체를 통합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젠더는 행위를 유발하는 장소나 안정된 정체성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몸의 양식화를 통해 생산된 제스처, 동작들은 안정된 젠더 자아라는 환영을 구성하는 일상적 방법이다. 그러나 젠더는 결코 완전히 내면화될 수 없는 하나의 규범이기도 하다. 젠더 규범은 체현 불가능한 환영이며, 정체성의 토대 앞에서 ‘토대’의 토대 없음을 드러낸다. 젠더 변형의 가능성은 여기서 나타난다. 행위들은 반복된 실패, 형태-왜곡, 패러디적 전복의 가능성 속에 있고, 반복은 고정된 정체성이 빈약한 구성물임을 폭로한다.

 

결론-패러디에서 정치성으로

페미니즘 정치학이 ‘여성들’이라는 범주의 주체 없이도 가능한가? 버틀러는 페미니즘이 말하는 ‘우리’가 환영적 구성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 환영적 구성물은 자신의 복잡성과 불확정성을 부정하고, 자신이 재현하려는 구성물의 일부를 배제해야만 자신을 구성한다. 그렇다고 이 빈약하고 환영적인 ‘우리’가 절망의 원인은 아니다. ‘우리’의 불안정성은 페미니즘의 정치적 이론화에 대한 근본적 제약을 문제시하며, 젠더와 몸뿐 아니라 정치학 자체를 다르게 배치할 길을 연다. 버틀러는 ‘행위 뒤의 행위자’를 전제하지 않으면서, 정치적 행동이 요구되는 정체성을 가정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주체가 문화적으로 구성된다고 해도 주체에는 보통 반성적 매개능력에 비유되는 ‘행위주체성’이 부과된다. 문화와 담론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지 않는 행위주체성에 대한 가정은 자칫 담론의 영향력을 폄하하거나 과도하게 보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주체는 문화적 구성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단언하고 있는 순간에도 자신의 구성물과 협상한다. 협상의 주체인 사유주체는 문화세계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지 않다. 페미니즘 정체성 이론들은 인종, 섹슈얼리티, 민족, 계급, 몸 등의 선언들을 나열하며 ‘등등(etc)'으로 끝을 맺고 노력은 종종 실패한다. ‘등등’은 정치적인 추동력을 낳는 게 아니라, 의미화와 소진의 기호이다. 그러나 이 ‘등등’은 스스로를 페미니즘 정치 이론화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제안한다.

정체성이 담론 안에서 지속적으로 의미화되는 것이라면, ‘행위주체성’은 의미화의 구조에 기대어 있다. ‘나’와 ‘타자’는 인식론적으로 대립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립 속에서 인식가능성과 행위주체성의 문제를 결정한다. 그럼에도 주체/대상의 이분법은 여전히 철학적 문제로 남아있다. 인식론적 양식의 전유, 도구, 거리두기의 언어들은 ‘나’를 ‘타자’와 반목하게 하는 지배전략에 속한다. 이분법적 대립은 주어진 의미화 실천에 들어있는 어떤 전략적 움직임이다. 이 움직임 속에서 이분법을 구성하는 담론의 장치는 감추어지고, ‘나’는 대립물을 통해 설정되며, 대립은 필연성으로 물화된다.

정체성에 관한 인식론적 설명의 초점을 의미화 관행으로 옮기는 일은, 인식론적 양식 자체를 가능하고도 우연적인 의미화 실천으로 여기게 만든다. 여기서 행위주체성의 문제는 의미화와 재의미화의 작동에 관한 문제로 재공식화된다. 결국 본질적인 ‘나’는, 자신을 감추면서 결과만을 자연스럽게 보이려 하는 어떤 의미화 관행을 통해 그렇게 보일 뿐이다. 게다가 본질적 정체성이라는 자격을 얻는 일은 매우 고단하다. 규칙이 생산해낸 정체성을 반복해서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의미화 실천으로 이해하는 일은, 문화적으로 인식 가능한 주체를 ‘규칙에 갇힌’ 담론의 결과로 나타난 효과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화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그 안에 인식론적 담론이 ‘행위주체성’이라고 지칭한 것을 품고 있다.

모든 의미화는 반복의 충동에서 발생하지만, ‘행위주체성’도 그 반복 속에서 변형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젠더의 가능성을 주장할 수 있다면, 정체성의 전복은 오직 반복된 의미화 실천의 내부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주어진 젠더가 되어야 한다는 명령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고, 자신을 생성해낸 명령을 능가하면서 그에 저항하는 배치물을 만들어낸다. 주어진 젠더가 되라는 명령 자체도 담론의 경로를 통해 발생한다. 이런 담론적 명령의 공존·융합은 복합적 재배치와 재전개의 가능성을 만든다. 초월이나 통합은 가능하지 않으며, 선택만이 남는다. 여기서 버틀러는 패러디적 실천을 선택한다. 원본의 정상성을 돋보이게 해 주던 실패한 패러디, 패스티시가 ‘원본 없음’을 드러내면서 주는 전복적 웃음. 거기서 강제적 이성애의 당연시된 서사는 사라지고, 확산된 젠더는 배치의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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