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철학사] 세미나를 끝내며 +4
기픈옹달
/ 2018-06-02
/ 조회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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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3개월간의 긴 여정을 끝냈습니다. 세미나에 참석하셨던 분들, 마치 사전처럼 두꺼운 이 책을 읽느라 수고하셨어요. 이 두꺼운 책을 읽으면서 중국의 고대 사상사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도 늘어났기를 바랍니다. 저도 수년만에 다시 읽으면서 조금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물론 늘 그렇듯 욕심만큼 잘 정리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책꽂이에 꽂아두기만 하는 건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세미나를 마치면서 그간 촬영(!)해놓았던 영상을 다 정리했습니다.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5z5qgRR7h55DIvIv7hks0wQ-xVVd-A6n 평균 2시간씩이니 24시간이 넘는 분량입니다. 편집없이 그냥 라이브로 촬영했던 영상입니다만, 그래도 누구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미나를 마치며 두가지 숙제를 남겼습니다. 펑유란이 명명한 '자학시대'라는 시대를 매듭지으며 그 이후에 펼쳐진 국가철학의 시대, 즉 '경학시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하권을 읽으며 그 물음에 답해야겠지만 일정을 조금 미룹니다. 날씨가 선선해지면 하권의 내용으로 만나뵙겠습니다. (불학에 대해서는 백조님의 큰 도움을 기대합니다. ^^) 또 다른 하나는 펑유란 이후의 철학사, 혹은 그 이후의 눈으로 해석한 중국철학의 문제가 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다른 세미나를 통해, 다른 공부 자리를 통해 이 문제를 다뤄보는 시간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긴 여정을 끝내며 옛 글을 들춰봅니다. 벌써 약 10년 전에 쓴 글인데요, <펑유란과 중국철학사>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지금은 결코 쓰지 않을 형태의 글이기는 한데, 그래도 허튼 소리는 그리 많지 않을테니 아래에 붙여 나눕니다.
세미나에 참여하신 도반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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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펑유란과 <중국철학사>
#. 펑유란의 삶과 학문여정
펑유란(풍우란馮友蘭: 1895~1990)은 1895년 중국 허난성(河南省)에서 사대부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진사進士출신의 청나라 관원이었다. “국학을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그 어떤 것을 배워도 소용이 없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펑유란은 어릴 때부터 전통적인 방법으로 삼자경을 비롯하여 사서오경과 같은 한문 고전을 배웠다. 그가 <중국철학사>에서 다양한 고전원문을 인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전통적인 공부 때문이었을 것이다. 철학과 관계를 맺은 것은 1915년 북경대 철학과에 입학하면서 부터였다.
그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 중국에는 새로운 개혁의 목소리가 한창 드세 지고 있었다. 펑유란의 대학 스승이기도 한 후쓰(호적胡適: 1891~1962)는 새로운 개혁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펑유란보다 고작 4살 위였지만 그는 이미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당대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10년, 약관의 나이로 미국 유학을 떠난 후쓰는 코넬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한다. 졸업 이후 전공을 바꿔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다. 1917년, 귀국하자마자 북경대 교수가 된다. 그가 북경대 교수가 된 것은 북경대 개혁의 일환이었다. 1916년, 북경대 총장이 된 차이위안페이(채원배蔡元培: 1863~1940)는 북경대를 근대 학문의 산실로 만들고자 했다. 그 노력 가운데 하나가 20대 후반의 젊은 유학파인 후쓰를 교수로 초빙한 일이다. 후쓰는 이후 북경대에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중국철학사를 강의한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중국 고대 철학방법의 진화사進化史」였다. 이후 그는 1919년 이를 새롭게 고쳐서 <중국철학사대강中國哲學大綱>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한다. 후쓰의 <중국철학사대강>은 이후 펑유란이 <중국철학사>를 저술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1918년, 대학을 졸업한 펑유란은 이듬해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후쓰가 졸업한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후쓰의 스승이기도 했던 존 듀이John Dewey에게서 철학을 배운다. 1923년, 펑유란은 박사 학위 과정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미국 유학중에 「어째서 중국에는 과학이 없는가」라는 논문을 쓴다. 자신을 5.4운동세대라고 말했듯이 그의 근본적인 질문은 왜 서구 열강의 침입에 중국이 이토록 힘없이 무너졌는가 하는 데 있었다. 과학(塞Sai선생)과 민주주의(德De선생)를 배워야 한다는 신문화운동의 세례를 그 역시 받았던 것이다.
중국에 돌아온 이후 중산대학, 광동대학, 연경대학 등을 거쳐 1928년에는 청화淸華대학 교수가 된다. 이후 1931년과 1934년에 각각 <중국철학사中國哲學史> 상하권을 내놓는다. 그의 <중국철학사>는 세상에 나온 직후부터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물론 그가 중국철학사를 최초로 연구한 사람은 아니었다. 펑유란의 <중국철학사>에 앞서 그의 스승이자 선배인 후쓰의 <중국철학사대강>이 있다. 그러나 후쓰의 <중국철학사대강>의 경우 고대부분에 치중한 반쪽짜리 철학사였다. 또한 철학적 문제에 대한 탐구보다는 문헌고증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다. 때문에 철학사로서는 펑유란의 <중국철학사>보다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펑유란의 <중국철학사>를 ‘중국인에 의한 최초의 중국철학사’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34년 그가 <중국철학사> 하권을 집필하고 있을 당시, 북경은 일본군에 포외 되어 함락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는 훗날 전쟁에 대한 걱정 때문에 빨리 책을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기억하기도 했다. <중국철학사> 하권을 마치고, 그해 펑유란은 혼란스러운 국내 상황을 뒤로하고 체코와 소련 등을 방문할 기회를 얻는다. 소련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역사유물주의에 대한 강의를 하지만 국민당의 분노를 사 난처한 처지에 처하기도 한다. 중국의 복잡한 정치상황 속에서 당대 대부분의 지식인이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처럼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펑유란은 청화대학을 따라 쿤밍(곤명昆明)으로 피난을 떠난다. 그는 쿤밍에서 있으면서 철학적 이론작업을 대표하는 저서들을 쏟아낸다. <신리학新理學>(1939년), <신사론新事论>, <신사훈新事訓>(이상 1940년), <신원인新原人>(1943년, <신원도新原道>(1944년), <신지언新知言>(1946년). 이 여섯 권을 모아 정원육서貞元六書라고 부른다. 일본의 패망으로 전쟁이 끝나자 1946년, 청화대학은 다시 북경으로 돌아온다. 이 해에 펑유란은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의 요청으로 미국으로 떠난다. 그가 펜실베니아 대학의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쓴 책이 <간명한 중국철학사A Short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였다.
1948년, 그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뒤 이듬해에는 중화민국이 세워진다. 이후 중국 공산당 정권아래에서 그의 학문적 성과는 미비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이순耳順의 나이를 바라보는, 자신의 해석에 따르면 천명에 순종하여 더욱 자유로운 삶을 누려야 할 시점에 펑유란은 오히려 정치적 공세에 시달린다. 더 나아가서는 문화혁명의 이상에 따라 이전 작업들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 역시 자아비판의 희생양이었다. 1980년, 문화혁명의 불길이 사그라지고 나자 그는 <중국철학사신편中國哲學史新編>을 쓰기 시작한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할 때 그의 나이는 이미 여든넷. 이미 눈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중국철학사신편>은 1989년 총 7권으로 완성된다. 바로 이듬해 펑유란은 세상을 떠난다.
#. <중국철학사>, 포스트 경학시대의 길찾기
그의 학문적 성과를 흔히 ‘3사史 6서書’라고 부른다. ‘3사’란 펑유란 저작 가운데 세권의 철학사를 일컫는다. <중국철학사>, <간명한 중국철학사>, <중국철학사신편>이 그것이다. ‘6서’는 앞에 언급되었던 정원육서를 말한다. 이 가운데 그를 대표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국철학사에 관련된 저술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3사’ 가운데서도 특히 <중국철학사>와 <간명한 중국철학사>를 들 수 있다. <중국철학사신편>의 경우 수십 년간 자유로운 학문 활동이 금지뒤 나온 터라 이전과 비교해볼 때 크게 나아진 부분을 찾기 힘들다. 게다가 중국 공산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인지, 펑유란 자신의 사상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중국철학사신편>은 맑스주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기초로 하였다. 이런 점은 마오쩌둥의 중국혁명에 대해 서술할 때 강하게 드러난다. <중국철학사>에 만족하지 못하고 <중국철학사신편>을 다시 쓴 이유는 이전과 달라진 자신의 이론을 정리할 필요도 있었지만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이론적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철학사> 상권은 1931년에, 하권은 1934년에 중국에서 출간되었다. <간명한 중국철학사>는 미국에서 1948년 영어로 출간되었다. 근본적으로 <중국철학사>와 <간명한 중국철학사>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방대한 <중국철학사>의 핵심을 간단히 요약한 것이 <간명한 중국철학사>라고 할 수 있다. <간명한 중국철학사>가 1930년대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있는 탓에 철학사로서의 완성도는 <중국철학사>보다 낫다. 표면적으로 가장 큰 차이를 들자면 <중국철학사>의 경우에는 선록식 방법을 채택하여 다양한 원문을 함께 실은 반면 <간명한 중국철학사>에서는 가능한 이 원문들을 빼버렸다. 이는 <간명한 중국철학사>가 본래 영어권 독자들을 위해 쓴 책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국철학사 전반에 관해 전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간명한 중국철학사>가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외에 내용에 있어서의 차이는 크게 없다. <중국철학사>와 <간명한 중국철학사> 사이에 펑유란의 관점이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펑유란의 중국철학사 서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학시대子學時代와 경학시대經學時代를 구분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자학시대는 진한秦漢 이전까지, 흔히 춘추전국春秋戰國 혹은 선진先秦 시기라 부르는 기간이다. 그 이후부터 청淸말까지를 경학시대라는 이름으로 통괄하고 있다. 자학시대는 위대한 스승(子)들의 시대이다. 이른바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를 가리킨다. 펑유란은 이 시대야말로 중국 역사상 자유로운 사상활동이 가장 풍성하게 이루어진 시대라고 평가한다. 사마담司馬談의 이론에 따라 육가六家, 즉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도덕가(道家)의 기원을 추적하고 있다. 그는 이 가운데 유가를 가장 중요한 학파로 꼽는다. 한대 동중서에 의해 유가가 통치이념으로 수용되면서 이른바 유가 독존의 시대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진나라의 통일은 법가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지만 곧 무너지고 만다. 한나라에서는 건국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가를 통치이념으로 수용한다. 유가 독존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펑유란은 이를 경학시대라 부른다. 경학시대란 위대한 스승들(諸子)의 자리를 이제 경전들이 대신하게 되었다. 경전을 통해 성현들의 말씀을 해석하고 부연, 설명하는 학문이 등장하였다. 각 시대마다 존숭되었던 경전의 숫자는 차이가 있지만 경전이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경학시대는 이전의 자학시대와 비교해 볼 때 사상적으로 훨씬 안정적이고 통일적인 시기였다. 앞선 자학시대가 불과 500여년 밖에 안 되는 데 비해 이 경학시대는 약 2000여년에 이른다. 그러나 2000여년을 지배한 경전의 절대적인 권위도 서구열강의 침입에는 힘없이 무너지고 만다. 펑유란은 공교孔敎운동 등을 통해 경학시대의 새로운 부화를 기도했던 캉유웨이(강유위康有爲: 1858~1927)를 마지막으로 경학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평가한다. 더 이상 전통적인 사유가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 그것이 바로 펑유란이 당면한 시대적 상황이었다.
평유란의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 놓여있다. 경학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사유하며 살아갈 것인가가 펑유란이 풀어야할 숙제였다. 자학시대에서 경학시대로 넘어오는 시기가 중국철학사 가운데 제1의 변혁기였다면 펑유란이 겪은 서양의 충격은 제2의 변혁기라고 할 수 있다. 펑유란의 대학시절, 5.4 신문화 운동이 내건 표어가운데 하나는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이었다. 그것은 공가孔家, 바로 공자를 말하는 무리들을 척결하자는 운동이었다. 중국의 낡은 정신을 척결하고 새로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유가 전통은 척결해야할 낡은 정신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펑유란은 정 반대의 방법을 택한다. 즉 유가를 새 시대의 정신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가에게 철학이라는 근사한 근대의 의상을 입혀주는 작업이었다.
#. 펑유란에게 철학이란 무엇인가
젊은 펑유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을 꼽으라면 5.4 신문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 열강의 침입 아래 자기 변신의 노력이 일종의 ‘운동’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5.4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펑유란 역시 이 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결과가 미국 유학기간에 쓴 논문인 「어째서 중국에는 과학이 없는가」라고 할 수 있다. <중국철학사>에서는 이 문제가 다르게 변형된다. 그의 질문은 이렇다. 왜 중국에는 철학이 없는가. 그의 대답은 다른 의미로서의 ‘철학’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우선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중국철학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철학이라는 말은 본시 서양 말이었다. 중국철학사 강론에서 주요 작업의 하나가 중국역사상의 각종 학문 가운데 서양의 소위 철학이라는 것으로 이름 할 수 있는 것을 골라 서술하는 일이다.
펑유란은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관점을 빌린다. 그리스 철학자들에 따르면 철학은 다음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물리학(Physics), 윤리학(Ethics), 논리학(Logic).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우주론, 인간론,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구분은 탐구 대상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우주론은 ‘세계’에 대해, 인간론은 ‘삶’에 대해, 인식론은 ‘지식’에 대한 탐구를 가리킨다. 이 가운데 중국에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인식론이다. 인식론은 전국시대 명가名家 이후로 맥이 끊기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른바 중국의 철학이란 이 셋 가운데 하나가 결여된 절름발이란 말인가? 펑유란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지식 자체에 대한 탐구가 없는 대신 ‘지식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하는 문제를 다루는 전통이 있다고 보았다. 바로 수양론修養論이 인식론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그렇다면 중국역사에서 우주론, 인간론, 수양론을 아우른 ‘철학’이란 무엇일까?
앞에서 말한 철학의 내용을 보면 서양에서 말하는 철학은, 중국의 위진魏晉인이 말한 현학玄學, 송명宋明인이 말한 도학道學, 그리고 청淸인이 말한 의리지학義理之學이란 것과 연구대상이 대체로 같다고 할 수 있다.
<간명한 중국철학사>의 말로 옮기면 신도가新道家와 신유가新儒家가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펑유란이 신도가와 신유가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사유가 바로 세간과 출세간의 종합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중국철학사>에서 학문의 대상으로 ‘철학’이 무엇인가를 설명했다면 <간명한 중국철학사>에서는 학문의 목적으로 ‘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철학을 ‘생에 대한 체계적․반성적 사색’이라고 정의한다. 반성적 사색으로 얻고자 하는 것, 그것은 ‘초도덕적 가치’이다. 일상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 가치, 그것은 정신을 고양하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본다. 철학이 다른 학문과 구별되는 지점도 바로 이것이다. 학문의 목적이 실증적 지식을 늘리기 위한 것이라면 철학의 목적은 정신을 드높이는 것, 즉 도道를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
이 도道를 통해 우주론, 인간론, 인식론이 종합된다. 우주와 인간을 통괄하고 있는 이 도道를 구하는 것은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는 동시에 인간과 삶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을 구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 바로 인식론(의 자리를 대신하는 수양론)이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서구철학이 ‘지혜(혹은 진리)에 대한 탐구(혹은 사랑) - Philosophy’라고 한다면 펑유란이 말하는 중국철학의 정신이란 ‘도道를 체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펑유란이 이렇게 다른 ‘철학’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우주와 인간의 위상이 서구의 전통과 비교할 때 달랐기 때문이며, 궁극적 목적인 도와 진리 혹은 지식의 표상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 철학이 지혜-진리의 문제를 둘러싸고 종교, 과학의 틈바구니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다면 중국 철학에서는 이런 다툼이 없다. 종교나 과학 혹은 철학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한 데 그 첫 번째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런 갈등이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종교와 과학의 갈등을 새로운 지평에서 종합한 것이 서구 철학이라면 중국 철학은 세간과 출세간의 대립을 종합한다. 중국철학의 정신이란 바로 이 둘을 종합하는 것이다. 입세간入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대립을 종합한 사람, 그것이 바로 성인聖人이다. 성인은 고양된 정신을 가지고 있는, 도를 체득한 사람이다. 그는 지극히 이상적이면서도 실제적․실천적이다. 전통적인 표현을 빌리면 ‘안으로는 성인이며 밖으로는 제왕(內聖外王)’이라고 할 수 있다.
펑유란은 ‘대립과 모순의 종합적 통일’이라는 형식을 즐겨 사용한다. 이 종합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이 앞서 소개한 ‘신도가’와 ‘신유가’이며, 이 둘 가운데서도 ‘신유가’, 송대 성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道家)과 외래 사상(佛家)의 종합으로서, 혹은 이상(道弗)과 현실(法家)의 종합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송대 성리학이다. 이 종합은 한번 이제 한 번 더 이루어져야 한다. 바로 전통과 서구 문물의 대립이다. 펑유란은 이 종합을 전개할 이론적 토대를 송대 성리학에서 찾는다. 펑유란 스스로 송대 성리학, 이른바 정주학程朱學을 창조적으로 계승(接著)했다고 밝혔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정주리학程朱理學을 새롭게 구성한 신리학新理學이라고 불렀다.
리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그는 정주학의 이론적 토대 가운데 하나였던 도통론道統論을 그대로 계승한다. 요-순-우-탕-문-무-주공-공자-자사-맹자-(주돈이)-정호-주희로 이어진 도통은 펑유란의 <중국철학사>에서 새롭게 정리된다. 도통론이 사승관계를 통해 ‘도道-리理’의 변함없는 전승을 주장했다면 펑유란은 반대로 접근한다. 도의 전승이라는 거대한 ‘중국 철학의 정신’에 다양한 인물들을 새롭게 배치하는 것이다. 덕분에 펑유란의 ‘중국철학사’는 더 풍성한 철학사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한계를 짊어지게 되었다. 바로 궁극적 진리로서의 리理를 근대 철학의 구도 속에서 새롭게 되살려 버린 것이다.
댓글목록
백조님의 댓글
백조
세미나를 이끌어주신 기픈옹달님, 그리고 함께 한 라라님, 현님 모두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함께여서 가능한 여정이었습니다.
3개월동안 공부하며 그동안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내용들을 더 풍부하고 체계적으로 살펴볼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벌써 시작된 무더운 여름 다들 건강히 잘 지내시고 시원해지면 또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감사합니다. 긴 시간 두꺼운 책을 읽느라 수고하셨어요.
잠깐 호흡을 다듬고 또 뵈어요~^^
라라님의 댓글
라라
저야말로 덕분에 2천 500년의 중국철학사 중 400년을 만났네요.
서양철학자의 책을 보면서 철학자 자신의 철학을 만들고 그렇게 살아간 것이 훌룡하다고 생각했는데 생애 전반이 자신의 철학과 일치하지는 철학자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니체를 공부한다고 칸트를 공부한다고 그 사람에게서 니체나 칸트의 태도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경전중심의 중국철학은 철학자를 지우고 텍스트에 집중하면서 비논리적인 측면이 책에 쓰여지긴 했지만 철학하는 태도로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옹달님 현님 백조님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중국 철학의 특징을 잘 보셨다는 생각이예요.
참 긴 시간, 수 많은 사람을 만나는 여정이었습니다.
매력을 느끼셨다니 다행이어요.
또 다른 여정에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