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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 발제] 불교를 철학하다 : 9장(공).10장 (윤회) , 11장(자비)
미오 / 2018-05-22 / 조회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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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사물의 구원,쓸모없는 것들의 존재론

: 존재의 사유와 순수 잠재성

2018.05.19. 발제자: 美悟

 

1.연기적 조건이전의 존재

-모든 본성이나 규정성은 연기적조건과 함께하는 것이기에 연기적 조건을 모두 지우면 아무런 본성도 어떤 규정성도 없는 것,그것이 공이다.어떤 규정성이나 본성이 없기에 연기적 조건에 따라 그 조건이 규정하는 규정성을 받아들일 수 있기에 공은 단지 없음을 뜻하는 무가 아니다.

-공성을 본다 함은 연기적 조건에 따라 얻게 될 수많은 가능성을 보는 것이고, 그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열린 잠재성을 보는 것이다.이것은 규정가능성을 가진 무규정성이고 다양한 의미화를 위해 열린 무의미이다.수많은 규정가능성을 갖기에 어느 하나의 규정성을 부여할 수 없는 잠재성이다.

-거슬러 올라가 본다함은 사고와 통찰의 방향을 말하는 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잠재성을 보는 것으로 다른 규정성을 향해 열려있고, 새로운 규정성을 향해 지금의 그것을 바꾸어 가는 것이다.그러므로 공성은 가변성의 바탕이고 근거이다.

 

2.불생불멸의 잠재성

-공의 세계에 대해 불구부정(不拘不淨),부증불감(不增不減),불생불멸(不生不滅)을 말하는 것은 순수잠재성의 세계,()를 이루는 영역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이는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고, 체의 능력 자체는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발생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공이란 규정가능성을 갖지만,규정하는 순간 그 규정성 밖을 벗어나버리는 무규정성 잠재성이다.즉 모든 규정성의 바깥인 것이다.그렇기에 말할 수 없는 것이고 규정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규정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규정불가능성이다.

-생명도 마찬가지이다.어떠한 규정성을 갖는 생명체가 자신이 처한 조건에서 살아가게 하는 능력,그 순수잠재성이 바로 생명이고 생명력이다.이런 능력은 특정한 생명체의 능력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에 속하는 능력이다.

 

3.존재는 왜 보이지 않는가

-어떤 사람에 대한 규정은 그가 어떤지를 알게 해주기보다 알 수 없게 해 주는 요인이다.우리는 그 규정 앞에서 상처받고 절망한다.평균화된 규정성은 드러내는 것 만큼 가려진다.그때 가려지는 것은 그 규정들과 소통하지만 규정성의 어둠 속에 있는 드러나지 않았고 충분히 표현되지 못한 잠재성이다.

-한 사람의 본체가 갖는 공성을 본다함은 그는 그 모든 규정성을 통해 존재하지만,어떤 규정성으로도 포착될 수 없는 무규정성 잠재성을 보는 것이다.

- 한 사람의 규정성을 넘어선 잠재성을 보는 구원의 행위를 통해 진정 구원받는 것은, 사물이나 사람과의 관계에 들어가는 구원하는 자 자신이다.중요한 진실은 이러한 구원의 시도를 통해 닫힌 듯 보이는 삶의 어떤 출구를 찾게 될 우리자신이 구원받는 다는 사실이다.

 

 

 

10: 죽음의 불가능성이 왜 고통받는가

윤회-영원한 회귀와 니힐리즘

 

1. 영생의 고통이라니

-윤회안에서의 죽음은 삶의 중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삶에서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변환의 문턱일 뿐이므로 죽음이라 할 수 없다.윤회란 어두운 터널 같은 그 문턱을 수도 없이 통과하며 진행되는 삶의 연속이다.그러므로 윤회란 영생불사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피하고 싶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불행이다.왜 벗어나야 하는 가? 삶이란 모면 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영원히 고통속에 머무는 것이다.삶의 영원성이란 고통의 영원성을 뜻한다.

-윤회의 중단은 고통스런 삶의 중단이며 그로부터 벗어남이다.이것이 해탈이다.

윤회의 형식으로 반복되는 삶에서 벗어나며 죽을 수 없는 무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영원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죽음이고 진정한 떠남이다.

-윤회에서는 고통과 추함도 삶의 영원성과 함께 끝없이 되돌아온다.윤회를 단지 삶의 영원성으로 해석하고 그저 기뻐하는 것이 쉽지않음은 이 때문이다. 되돌아오는 삶을 긍정할 수 없다면 현세의 삶또한 긍정할 수 없다. 삶의 긍정이란 인간이라는 척도자체를 넘어설 때 가능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부터이다. 윤회하는 삶의 고통은 영원히 되돌아오는 생명의 힘을 통해 긍정하게 된다.

 

2.고통의 피안에서 차안의 해탈로

-붓다는 전생을 탓하고 다음 생을 기약하며 삶을 충실히 살라는 선고를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긍정할 만한 삶을 사는 능력을 만들어가라는 제안으로 바꾸었다.이 경우 해탈이란 업에 예속된 삶으로부터의 해방이 된다. 삶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삶안에서의 해방이다.

-고통에 대한 사고의 전환: 고통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절대적 죽음을 통해 벗어나야할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고통자체를 성스런 진리에 담았다.고통없이는 해탈을 향한 동인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이란 깨달음을 향한 여정의 출발점이다.

-해탈이란 삶의 고통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삶의 한가운데에서,고통을 차분하게 직시하고 그 안에서 넘어서는 길을 찾아야한다.깨달음이란 번뇌안에서 얻는 것이며 번뇌와 함께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윤회하는 삶은 떠나야 할 것이 아니라,깨달음의 장으로 긍정된다.이것은 업이란 이름으로 참고 견디라는 인고의 가르침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삶을 긍정할 만한 것으로 바꾸어가라는 가르침이다.

 

3.노바디의 윤회

-블랑쇼의 비인칭적 죽음; 장소와 양상을 바꾸어가며 하나의 생 안에서 내가 사는 삶이란 하나의 나가 죽고 다른 나가 태어나는 과정의 연속이란 점에서 일종의 윤회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나는 나의 삶에서 거쳐가는 모든 사람이 되어야 한다.그러기 위해선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야 한다. 한사람의 삶이란 무아라고 명명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이 그 때마다 연기적 조건에 따라 상이한 나들 그 모든 나가 되며 펼쳐지는 과정이다,

-윤회란 아트만보다는 무아나 생명이라고 불리는 게 적절한 어떤 힘의 영원한 흐름이다.윤회를 긍정한다함은 이 힘의 되돌아옴 이 흐름의 가변성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다.

 

 

11: 연민의 윤리에서 우주적 우정으로

자비-타자의 윤리학과 존재론적 우정

 

1.가까운 자가 아니라 멀리 있는 자를 사랑하라

-자비는 남에게 기쁨을 줄려는 마음을 뜻하는 maitri(마이트리)를 번역한 자()와 고통이나 슬픔에 공감하여 그것을 덜어줄려는 마음을 표현하는 karuna(카루나)를 뜻하는 비()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다.자비행은 내가 만나는 이들에게 최대한 기쁨을 주고 최대한 슬픔을 덜어주며 살라는 보살행의 일부이며 이는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자와 비를 행해야 한다.

-진정한 자비심은 사람간의 차별을 두지 말고 기쁨을 주거나 슬픔을 덜어주는 마음을 동등하게 가져야 한다는 평등심이다.우리 자신이 가까운이에게 베푸는 사랑은 본질적으러 자신에 대한 애착의 연장이다.차라투스트라의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말은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더 숭고한 것은 더 없이 먼곳에 있는 이방인들 생각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 지금 널리 퍼져 있는 것과 다른 이질적이고 낯선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2.연민없이 사랑하라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 내가 알 수 없는 타인의 고통,그 타자성을 향해 나를 넘어는 서것이 바로 윤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달라이 라마: 평등한 자비심은 모든 중생이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을 얻고자 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함을 인식하는 것에서 나온다.

*중생연자비:다른 중생과의 관계속에서 행하여지는 자비로 고통받는 중생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고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서 행하는 자비,

*법연자비:마음을 법칙을 깨달은 사람이 행하는 자비로 이웃모두에게 평등심을 가지고 만남에 있어 언제나 기쁨과 슬픔의 감소를 추구하는 자비행

*무연자비(대자대비): 절대평등의 경지에서 진여실상을 깨달은 사람이 행하는 자비로 모든 중생이 부처임을 알고 그들과 부처로서 만나며 부처간의 우정을 나누는 것.

-모든 중생은 부처라는 점에서 평등하다.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자비란 자신과 만나는 모든 잠재적 부처들에 대해 갖는 마음과 그들에 대해 행하는 존재론적 차원의 사랑이다.

 

3.미움없이 미워하라

-진정한 자비란 악행을 행하는 그들이 부처로서의 잠재성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기쁘게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무조건적인 자비가 아니라 그로 하여금 부처라는 말에 근접한 사고와 행동을 하도록 촉발하는 것이 바로 자비행의 요체이다.이는 저항과 고통이라는 스승을 통해 그들이 부처를 향해 살아갈 수 있도록 반복적으로 마찰의 촉발을 일으켜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이럴 때의 자비는 분노와 미움같은 감정에서 벗어나 제 방향을 찾아가게 하려는 능동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감정적 행위와 구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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