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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 후기] 불교를 철학하다. 공, 무아, 그리하여 윤회, 끝끝내 자비. +1
박사 / 2018-05-22 / 조회 1,309 

본문

모든 상 있는 것에서 상 없음을 보면 여래를 보리라”-금강경. 

 

변하지 않는 “자성”이 없다는 부처의 가르침, “무상”은 

연기에 의해서만 성립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의 성질, “공”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무상’에 대한 이해는 고정불변의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 

즉 “무아”설명하지요.

 

우리는 고정불변의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왜 고통스럽게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수많은 면모를 가진 ‘나’를 관통하는 일관성을 가지려는 시도가 

얼마나 나를 억누르고 속박했는지, 

그 생각을 버리고

모든 것이 허용되고 인정되는 세계로 들어서면 얼마나 자유로운지. 

 

공성을 본다는 것은 

판단하지 않고 잠재성을 보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분별하지 않는 것”과도 연결돼요. 

 

그럼에도 우리는 나든 다른 사람이든 규정내리기를 좋아합니다. 

판단을 빨리하는 만큼 에너지 소모가 적거든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딱지를 붙이고 변하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 

그것은 우리 뇌의 게으름에서 기인하는 습벽이겠지요. 

 

우리는 그가 누구든 ‘대표 정체성’을 부여할 때 

나머지 다른 가능성을 묵살하고 억압합니다. 

“네가 그런 애인줄 몰랐다”는 실망은 

성급한 판단과 이름표 붙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내 삶이 답답하고 한정되는 것도 

대표 정체성에 모든 것을 맞추려 하기 때문이지요. 

 

“무아”를 이해할 때 

“윤회”또한 다양한 삶의 가능성으로 이해됩니다. 

우리는 고정된 자성이 없기 때문에 또 다른 삶을 사는 것이지요.

그 사이에 죽음이 있든 없든 말이에요. 

 

고정된 내가 없다는 생각이 이토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데도

우리는 왜 ‘나’라고 하는 개념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는 것일까요? 

왜 ‘나’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방식을 반복할 때의 편안함, 

항상성을 유지하여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한 뇌의 작용, 

자본주의 시대의 특성…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그 원인을 깊이 파악하고 하나하나 놓을 수 있다면 

부처가 말한 ‘다르마’에 대한 더 분명한 이해에 다다를 수 있겠지요. 

 

그랬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나와 남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나와 내 주변’이 아니라 

더 널리 퍼지는 보편적인 자비가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처’이고 

그러한 인식이 있을 때에야만 

진정한 평등, 함께 살기 또한 가능한 것이니까요.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무아-무상에서 연기와 윤회를 거쳐 공으로 이어지는, 한편의 아름다운 시를 보는 것 같습니다.
박사님 덕분으로, 우리 세미나가 한층 풍성하고 다채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다음주에 공부할 대망의 12연기가, 박사님의 발제가 자못 궁금하고 기다려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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