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발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제4부 과학에대하여~조짐
에피파니
/ 2018-05-25
/ 조회 2,710
첨부파일
관련링크
본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4부】 과학에 대하여 ~ 조짐
에피파니 (2018. 5.28)
□ 4부 전체의 개관
1) 차라투스트라의 시도들이 실패로 돌아갔으나 새롭게 도전하는 모습 그려짐
: 1부에서 3부까지 등장 했던 인물들의 재등장
2) 신의 죽음 및 허무주의의 극복이 ‘인간의 자기긍정’과의 관계에서 재조명
3) 4부를 관통하고 있는 연결고리는 바로 인간에 대한 ‘연민’
□ 과학에 대하여
: 과학(학문)에 대한 정신적 양심을 지닌 자(과학자 혹은 학자)와 차라투스트라의 대비되는 견해가 제시되어진 부분
진정,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동굴로 돌아오기 전에 우리는 함께 충분이 이야기도 해보고 생각도 해보았다. 그 덕에 나 알게 되었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그대들과 나, 우리 이 산위에서 서로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으니, 나로 말한다면, 나는 더 많은 안전을 찾아 여기 차라투르스라에게 온 것 이지. 그야말로 여전히 없이 견고한 탑이요 의지이니.
☞ 학자가 추구하는 확실한 앎을 추구하는 자세의 모습(환상이나 믿음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대들은 나로 하여금 더없이 두려워 떨게 만드는, 고약하기 이를 데 없으며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삶, 야수의 삶을, 숲과 동굴, 가파른 산과 미로와 같은 깊은 틈새를 탐하고 있는 것이다....
공포로 말하자면, 그것은 사람에게 있어 타고난 감정이자 근본적인 감정이다. 공포로부터 모든 것이, 타고난 죄와 타고난 덕이라는 것이 설명된다. 과학이라고 불리는 나의 덕도 공포에서 자라났고.......
이처럼 오래된, 뿌리 깊은 공포가 마침내 그럴싸하게 다듬어지고, 신성시되고 정신화 되면서 오늘날 과학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학문은 인간의 공포심을 없애기 위해서 건축된 것
☞ 이후 차라투스트라 등장하여 정신의 양심을 지닌 자(과학자)가 말하는 진리를 뒤엎는 견해를 ‘웃음과 함께’ 제시
공포, 우리에게는 예외적인 것이지. 오히려 용기와 모험, 미지의 것과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것에 대한 희열, 내게는 용기가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 전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용기, 독수리의 날개에 뱀의 지혜를 갖춘 사람들의 용기가 결국 그럴싸하게 다듬어지고, 신성시되고 정신화 된 것이다.
☞ 삶의 조건으로서 오류를 인정하는 용기. 우리의 앎과 지식은 오류를 싫어하면서도 실상은 즐겨 사랑하기도 하는 것. 이러한 앎, 이런 지식이 살아있는 것이고, 삶을 사랑하는 것임. 결국 학문이란 삶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의지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임을 역설
□ 사막의 딸들 틈에서
: 허무주의자의 노래
□ 각성
: 허무주의 극복의 실패 -> 나귀로 비유되는 새로운 신앙의 부활 (국가, 사회주의 이념, 자본주의 이념, 공리주의 이상, 윤리적 보편주의, 행복주의, 이성 등)
차라투스트라는 동굴 안에서 웃고 떠드는 지체 높은 자들을 보며 완전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역겨움과 중력의 정령이 물러가고 다시 건강을 되찾아 가고 있다고 생각함. 이에 안도감과 기쁨을 느낌. 그러나 나귀제를 지내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함!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의 귀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떠들어대는 소리와 웃음소리로 요란하던 동굴이 갑자기 죽은 듯이 조용해진 것이다. 그의 코는 솔방울을 태울 때 나는 듯한, 냄새 좋은, 자욱한 연기와 향을 맡게 되었고.....
“하나같이 다시 경건해졌구나. 기도를 하고 있구나. 실성들을 했나보다!”..... 무릎을 꿇고 나귀를 경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바로 나귀를 찬양하기 위해 부르는 경건하고도 기이한 연도였으니, 이런 것이었다.
아멘! 찬양과 영예와 지혜와 감사와 영광 그리고 권능이 우리의 신에게 영원히 있을지어다!
그러자 나귀가 이-아 하고 화답했다.
☞ 차라투스트라의 긍정을 완전히 오해!
1) I-a 라는 나귀 울음소리는 독일어 Ja(예)와 구분 못함을 나타냄.
2) 나귀≒낙타: 부정할 줄 모름.
3) 나귀의 긴 귀: 주인 명령을 빨리 알아채는 데만 유용.
4) 보다 높은 인간들은 무작정 “예”라고만 하는 나귀들을 선악 저편의 즉, 선악 판단의 가치를 넘어선 존재로 착각. but 『도덕의 계보학』에서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라는 표현이 좋음과 나쁨을 넘어섰다는 의미가 아님을 강조! 보편 윤리로서의 도덕적 선과 악을 비판했을 뿐 좋음과 나쁨을 의미한 것은 아님! 오히려 추상적이고 보편적이고 획일적인 선, 악이 아닌 자기에게 맞는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는 것이 강자의 특징이라고 봄 (예: 귀족 도덕 vs 노예 도덕)
□ 나귀의 축제
: 새로운 우상
1) 보다 높은 인간들 모두 인간적인 것에 대한 경멸을 보여주었으나 그것을 극복하는 데 주저함. 변신이라는 불확실한 과정에 자신을 내맡기기보다는 뭔가 의지할 것을 찾음으로써 차라투스트라의 믿음을 철저히 배신하고 자신을 보존하고 지탱하는 쪽을 택하고자 함. 그들은 점차 깊은 신앙의 세계, 순종의 세계로 들어감.
2) 새로운 우상을 출현시킨 자는 신 부정에 실패했던 '더없이 추악한 자'
3) 허무주의자의 생각 : 새로운 형태의 신은 인간에게 가장 믿을 만한 것(교황에게 있어서 신은 죽었으나 신앙은 남았고, 과학자에게 있어서는 실증성이나 엄밀성 자체가 새로운 신앙이 될 수 있음)
4) 차라투스트라 : 그들의 우상숭배 자체에 대한 혐오. 하지만 초월적인 신 자체를 거부하 고 지상적인 신을 찾는 것은, 지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차라투스트라의 프로그램에 좀 더 접근하고 있는 것
저 더없이 추악한 자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 그가 신을 다시 깨웠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가 일찍이 신을 죽였다고 했지만. 신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늘 그랬듯이 속단일 뿐이다.
☞ 속단: 선입견을 의미
오, 차라투스트라여, 그대 자신을 생각해보라!
진정, 그대 자신을 말이다! 그대 또한 그 차고 넘침과 지혜로 말미암아 나귀가 될 수도 있으니,,,
☞ 차라투스타라를 신으로 만들려는 의도
“그리고 끝으로 그대 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