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틀러 발제] 3장 : 3절 모니크 위티그_몸의 해체와 허구적 성
jina
/ 2018-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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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복적 몸짓들
3) 모니크 위티그 – 몸의 해체와 허구적 성
* 시몬 드 보부아르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 = 성별화된(젠더를 획득한) 존재, 성은 인간의 분석적 속성
섹스와 젠더를 분리하고 젠더를 ‘획득’개념으로 이해함으로 급진성을 가진다.
이분법으로 규제받지 않는 젠더와 다양한 문화적 젠더 해석의 잠재력을 발견했다.
p295. 젠더는 분명한 성의 이분법이 부과한 이원적 한계를 뛰어넘어 증식될 잠재력이 있는 일종의 행위이다....(중략).. 이 새로운 어휘는 다양한 종류의 재의미화가 가능한 확장적인 범주들을 설정하고 확산한다.
* 버틀러의 반박 : 만들어지는 젠더란 난센스다. 여자가 언제 어떻게 되는 것인지, 여자가 되기 전에는 무엇인건지 규정할 수 없다. 또한 젠더가 몸 이후에 부여되는 2차적인 것일 경우 성이 부여되기 힘든 몸의 형태들은 인간됨의 외부로 나가떨어져 버린다.
p295. 불가능하고 헛된 유토피아적 기획이라는 운명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 모니크 위티그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 젠더 이전의 몸(섹스)은 이미 경제적 필요에 의한 이성애 제도에 의해 구분된 개념
애초에 섹스는 이미 젠더화된 범주이고 태생적인 것이 아니라 부과되어 있는 것이다.
이성애적 모태의 전제와 억압성 폭로 : 인간에게 부여된 섹스는 이성애를 기반하여 생성된 것이기에 그것에서 벗어난 존재(ex,레즈비언)은 성의 범주를 초월하게 된다.(p.302 이성애자가 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도 없을 것이다.) 또한 늘 남성을 기준점으로 그에 반하는(이성인) 여성이 상정되기 때문에 남성=인간, 여성=성 인 강제적인 사회관계가 생성된다.
p.297. 위티그는 이 일련의 강제적인 사회관계에서 여성은 존재론적으로 성으로 가득차게 된다고 주장한다. 여성들이 그들의 성이다. 그리고 뒤집어 말해 성은 반드시 여성적이다.
- 위티그는 젠더나 허구적인 성을 본질적 인간의 속성이라고 주장하는 문법을 전복시키고, 대명사(여성, 남성, 기타 등등)의 변별성을 포기한 상태로 육체와 섹슈얼리티를 기술할 근본적인 재편성을 요구
- 직관적으로 보이는 징표(가슴, 성기 등)를 성구분의 훌륭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고양된 바이므로 우리가 하고 있다고 믿는 ‘직접적인 지각’은 억지에 불과하다. 실증적인 – 이상으로 간주되는 몸의 ‘통합성’과 ‘통일성’은 파편화(해당 젠더로 통합되기 위해 몸의 세부적인 성적부위들로 판단되는 것), 규제, 그리고 지배라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반직관적이고 반보편적인 언어가 필요하다.
- 여성의 과제 : 권위 있는 발화 주체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
여성은 오랫동안 반복된 언어를 통해 그것들을 ‘사실’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성을 ‘명명’하는 것은 지배와 강제의 행위다. 성에 대한 담론의 구성방식은 추상적일지라도 그렇게 형성된 언어와 이론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은 매우 물리적이고 폭력적이다.
p.301 우리는 몸과 마음속에서 특질 하나하나마다 우리를 형성해온 자연의 관념에 맞출 것을 강요당한다. 남성과 여성은 정치적인 범주일 뿐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다.
- 전복을 위한 수단 : 언어
언어는 사고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체로 작동할 수 있다. 여성들이 언어 속에서 ‘나’라는 일인칭 주체가 되고 보편적 인간이 된다면 ‘주체성의 절대적 행위’ 설정이 가능하다. 여성은 젠더를 배제한 보편적인 존재가 돼야만 한다. 그리고 그 성공여부는 여성에게 부과된 성적 부과를 벗어날 수 있는 총체적 능력(여성성의 전복)에 달려있다.
p.305 그런 물화가 여성을 부분적 존재나 관계적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나’를 완전히 소환하려면 이런 물화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여성은 자신의 젠더에서 벗어나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말한다.
* 버틀러의 반박 : 보편적 주체가 되어서 어떠한 권위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분법적 사고의 증식일 수 있다. 이것은 제국주의적 전체주의적 관점이다. 위티그 역시 탈중심화에 실패했다. 307, 311
- 위티그의 레즈비어니즘 (근본적 혁명)
주어 ‘그’를 삭제해버리고 ‘그녀’를 일반 주체로 등장시키며 언어 안에 있는 성의 범주를 퇴색시키고자 한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과 레즈비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애의 인식적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파괴력을 지니며 이성애의 근간을 흔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레즈비언이 되는 것 : 이성애에 작별을 고하고 여성과 남성이라는 강제적 의미에 저항
p.313 라캉에게 나타난 것처럼 이성애주의의 이상화는 이성애를 실천하는 사람의 몸에 통제력을 행사하는 위티그 자신의 공식에서도 나타난다. 그런 통제란 불가능하며, 결국 자신의 불가능성에 걸려 넘어지게 되어있다. 위티그는 이성애적 맥락과의 근본적인 단절만이, 즉 레즈비언이나 게이가 되는 것만이 이성애 체계의 몰락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 버틀러의 반박
이성애는 분명히 존재하며 이성애와의 단절은 택일적 이분법이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름을 강제적 명명이라고 한다면 ‘레즈비언’ 또한 하나의 강제적 범주에 불과하다. 레즈비어니즘은 이성애를 지우는 방식이 아닌 패러디(부치 팸) 등을 통해 원래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고 결국 이성애적 권력을 철회시킬 수 있는 의지작용으로서 이성애를 무력화해야 한다. (이성애적 구성물을 게이의 방식으로 전개할 때 발생하는 탈권력화, 탈자연화)
p,319 게이와 레즈비언의 실천에 대한 규범적 핵심은 권력이 완전한 초월이라는 불가능한 환영보다는 권력의 전복적이고 패러디적인 재배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티그는 분명 레즈비어니즘을 이성애에 대한 전면적 거부로 구상하고 있지만, 나는 그런 거부야말로 레즈비어니즘이 초월하고자 한 바로 그 관계에 개입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에 근원적으로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p.326 이성애와의 근본적인 단절 속에서 자신을 규명하는 레즈비어니즘은, 바로 그 이성애적인 구조를 재의미화할 능력을 자신에게서 제거하게 된다. 레즈비어니즘은 바로 그 이성애적 구조 때문에 부분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구성되는데도 말이다. 그 결과 이 레즈비언 전략은 강제적 이성애를 억압적인 형태로 공고하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