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발제]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1,2강 (0517)
삼월
/ 2018-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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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1970년 12월 9일>
지식의 테마에서 진리의 테마로 이동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사에서 지식에 대한 욕망이 생략되다
푸코가 “지식의 의지의 형태학을 위한 여러 단편들”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이 강의는, 특정 시기의 역사연구에 쓰일 수 있다. 16~18세기 동안 경제 과정에 대한 지식의 수립, 17~19세기 동안 섹슈얼리티에 관한 지식의 수립 등이다. 지식-권력에 관한 푸코의 후기 작업들은 1970년에 한 이 강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강의는 구체적 연구와 이론적 결산을 불규칙한 방식으로 병행할 것이다. 구체적 연구 대상은 19세기 프랑스의 형벌제도이다. 아마 『감시와 처벌』에서 살펴보았던 프랑스혁명 시기 형벌제도의 변화가 언급될 듯하다. 푸코가 분석하고자 하는 요점은, 과학을 자처하는 담론(의학, 정신의학, 정신 병리학, 사회학)이 명령적 체계였던 형벌 체계에 어떻게 편입됐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법 담론에서 진리 담론이 갖는 기능을 탐지하고 그 담론의 효과를 가늠하고자 한다.
푸코는 진리의 의지가 담론에 대해 배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걸 알아보기 위해 우선 몇 가지 물음을 전제해야 한다.
① 진리의 의지가 문제인가 아니면 지식의 의지가 문제인가? 두 개념을 통해 마주치게 되는 인식은 어떠한가? 결국 지식, 진리, 인식 사이의 게임을 정해야 한다.
② 의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의지와 욕망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지식의 의지’와 ‘인식에 대한 욕망’ 사이에 어떤 관계를 수립해야 할까?
끝까지 풀리지 않을 질문들은 중간에 중계-정의가 필요할 테고, 먼저 몇 가지 문제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① 지식의 의지라는 개념은 왜 요청되는가, 혹은 꼭 필요한가?
② 지식의 의지와 인식의 여러 형식들 간의 관계. (이론적·역사적 수준에서)
③ 주체를 정초하지 않는 방식으로 지식 분석에서 의지 개념을 끌어낼 수 있을까?
④ 지식의 의지를 역사와 현실에 어느 정도까지 연결할 수 있을까?
물음은 다섯 번째 문제가 아닌, 위에서 언급한 모든 문제들을 관통하는 문제들로 연결된다.
① 참된 담론의 역사에서 참 또는 거짓의 의지의 역사, 참과 거짓의 연계 체계를 놓으려는 의지의 역사를 밝혀낼 수 있는지.
② 참 또는 거짓 체계의 게임이 서양 문명에 지식의 의지 중심 에피소드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지.
③ 진리의 의지라는 형태를 띤 지식의 의지를 한 주체나 익명의 힘이 아닌 현실 지배 체계에 연결할 수 있는지.
푸코는 이 연구에서 철학 담론이 별로 의지가 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지식에 대한 욕망은 철학이라는 이름 안에 들어가 철학의 존재를 정당화해왔지만, 철학 담론의 시초에서부터 생략되었다. 푸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서두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를 밝히려고 한다.
『형이상학』 A권에 대한 내적·외적 독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서두에 등장하는 유명하고 진부한 구절.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인식에 대한 욕망을 갖는다. 다양한 감각에서 오는 즐거움이 그 증거이다. 사람들은 쓸모를 떠나 감각을 그 자체로 즐기는데, 다른 감각들보다 특히 눈을 통한 감각을 즐기기 때문이다.”
푸코는 이 구절의 요소 하나하나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그 의미, 가치, 기능을 부여받았다고 본다. 이 구절은 주변적 성격을 띠면서 저작 내부에 다시 포함되어 내적 독해가 가능하며, 외적 독해 역시 가능하다. 푸코는 이 구절에서 철학 담론 자체에 대한 조작, 서양 문명에 존재했던 철학 담론에 대한 조작을 탐지해낸다. 이 구절은 어떤 ‘철학적 조작자’를 구성한다. 철학 체계 자체를 넘어 철학 담론 일반의 지위를 다루고 거기에 작용한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 광인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는 데카르트, 참된 관념으로서 선의 발견을 다루는 스피노자, 두 사람을 철학적 조작자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과학 텍스트에서도 ‘인식론적 조작자’라 부를 수 있는 것을 식별 가능하다.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지식을 욕망한다.’ 이 문장은 세 개의 테제를 함축한다.
1. 지식에 대한 욕망이 있다.
2. 이 욕망은 보편적이며 모든 인간에게서 발견된다.
3. 그것은 본성적으로 주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공하는 증거들은 추론을 상식추론, 즉 특수한 사례의 진리가 일반 원리의 진리를 수립하는 상황으로 이끈다. 감각이 쓸모와 관계없이 즐거움의 원인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증거인데, 여기에는 세 번의 이동이 포함되어 있다. ① 인식 → 감각, ② 인식에 대한 욕망 → 즐거움, ③ 욕망 → 즐거움(agapēsis). 여기서 agapēsis는 ‘질서에 대한 만족’, ‘자기 마음에 드는 어떤 것에서 얻는 즐김’을 뜻한다.
감각이 인식에 대한 본성적 욕망의 만족스런 예가 되려면 다음의 세 가지를 증명해야 한다.
- 감각은 확실히 하나의 인식이다.
- 감각은 즐거움을 동반한다.
- 우리가 감각에서 얻는 즐거움은 감각을 인식으로 만들어주는 것과 연결된다.
여기서 두 계열의 정당화가 나타난다. ①『형이상학』의 구절에 암시된 것, ②『형이상학』에 부분적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에서 암시적 정당화보다 신기한 것은, 즐거움과 시각에 대한 명시적 정당화이다.
이어서 제기되는 또 다른 물음. 모든 감각이 인식활동에 상응하는 즐거움을 준다면, 동물은 왜 인식을 욕망하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에 대한 욕망을 인간에게만 귀속시키며, 이 욕망이 인간의 성격인 동시에 동물들과는 다른 유적 차이라고 설명한다. 첫 번째 차이는 감각에서 발견된다. 감각으로부터 기억이 생겨나고, 기억과 함께 영리함이 나타난다. 청력은 언어 이해능력, 배움의 능력과 자질, 훈육가능성으로 나타난다. 두 번째 차이는 기술(technē)과 학문(epistēmē)이다. 기술과 학문은 기억에 의지하며, 자주 경험보다 효과가 떨어진다. 기술과 학문은 일반적 원칙을 내놓지만 규칙, 도식, 적용원칙까지 제공하지는 않는다. 세 번째 차이는 지혜(sophia)의 현존이다. 지혜는 원인에 대한 인식이며, 보편성을 갖춘다는 점에서 본질에 대한 인식에 포함된다. 지혜는 최고의 인식이며, 자유롭고, 어떤 쓸모에도 좌우되지 않는다. 모든 인식의 목적, 모든 인식의 지향점이다. 인간이 쓸모없는 감각을 만족시킨다면, 어떤 쓸모에도 종속되지 않을 인식행위가 나타난다.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인식의 목적은, 감각활동을 끌어당겨 즐거운 것으로 만들었다.
세 번째 이동에서 인식의 욕망을 증명하는 것은 감각에서 발견되는 즐거움, 즐김이다. 쓸모없는 감각을 배가하는 즐김이 그리는 미래의 행복(관조), 즐김(agapēsis)은 그렇게 이해된다. 즐김(agapēsis)은 감각적·동물적인 쾌락의 질료를 가리키면서도 인간 특유의 행복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텍스트의 의미 중첩을 통해 인식에 대한 욕망을 본성에 기입하고, 욕망을 감각과 신체에 연결한 뒤, 그 상관물로 어떤 향유형태를 제시한다. 한편으로는 인식에 대한 욕망에 지위와 토대를 제공한다. 그 욕망은 인간의 유적 본성 위에, 그리고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지혜와 인식의 요소 위에 세워진다. 이에 따라 신체와 욕망은 생략되고, 감각에 밀착해 원인에 대한 인식으로 향하는 운동이 강조된다. 지혜로 향하는 의지가 존재하는 이 운동은 이미 철학이다. 철학은 처음부터 모든 인식에 대한 욕망을 포함하는 역할을 한다. 욕망 없는 인식의 원인이 인식에 대한 욕망이라는 사실을 보장해주는 것이 철학의 기능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 이론은 희랍 비극의 위반적 지식, 소피스트적 지식, 플라톤적 상기를 배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절은 ‘위반하고, 금지된, 가공할 지식’이라는 테마를 배제하고 있다. 이런 테마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계속 발견되는데, 비극의 주인공은 본성적으로 지식에 대한 욕망에 거리를 둔다. 주인공이 지식을 욕망하게 될 때는 어떤 말이 위에서 선고되었기 때문이다. 이해하면서 이해하지 못하고, 모호한 동시에 희망을 주기 때문에 이렇게 욕망되는 지식은 끔찍한 지식이다. 지식을 쥐고 있는 것은 질투 많고 탐욕스러운 신들이다. 오이디푸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식은 그 지식과 연관된 자들을 눈멀게 한다. 또 지식은 목숨을 빼앗는다. 주인공은 지식에 저항하지 못한다. 즐거움에서 행복으로 가는 지식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테마는 비극적 지식에 대립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는 왜 인식을 욕망하는가?”라는 소크라테스-소피스트적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인식을 욕망하는 훌륭한 본성을 가졌다면, 우리는 왜 배우는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데 말이다. 지식의 주체와 욕망의 주체는 같지 않다. 인식에 대한 욕망은 인식에 속하지만, 인식은 인식에 대한 욕망과 한꺼번에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지식은 갈망되고, 소유되며, 상품처럼 유통될 수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점을 언급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에 대한 욕망이 본성임을 긍정하면서, 기억과 천상 위의 세계에 관한 플라톤의 테마 역시 배제한다. 인식에 대한 욕망은 감각 안에서 예고되며, 감각 너머와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테마를 멀리하면서도 플라톤과 동일한 이론의 요청에 따른다. 인식이 처음부터 인식을 이미 취하게 만들 것. 푸코는 플라톤의 상기설을, 인식에 대한 욕망을 인식 내부에 거주시키는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억을 감각 속에 위치시키며, 배치를 뒤집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호기심과 권력 의지: 지식의 두 형태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테마를 배제하면서 플라톤과 다른 방식으로 인식을 욕망의 외부성과 폭력에서 보호하려 한다. 욕망은 지연된 인식이며, 중단 속에서도 이미 가시화된 인식이다. 지식을 욕망하는 자는 결국 지식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의 주체가 지식에 대한 욕망에서 인식으로 가게 된다. 인식이 욕망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욕망도 존재할 수 없다. 인식은 욕망의 대상이자 목적이자 질료이다. 이 평온한 욕망은 호기심, 알기 위해 알고자 하는 욕망 등으로 불릴 것이다. 푸코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어휘를 고정할 것을 제안한다.
- 인식: 욕망과 지식에 미리 앞서 단일성, 상호 소속, 동일 본성을 부여할 수 있게 해 주는 체계
- 지식: 바람의 대상, 욕망의 목적, 지배의 도구, 투쟁의 쟁점을 재발견하기 위해 인식의 내부성에서 뽑아내야 하는 것
누구나 조금씩은 철학자가 아니냐는 테마를 철학 담론이 물리치자마자, 철학은 특정한 과제라는 테마가 출현한다. 여기에 철학은 진리 자체의 운동과 다르지 않다는 테마도 정기적으로 나타난다. 철학이 인식 일반의 최초 운동과 연결된다는 테마에서, 욕망은 욕망의 효력과 함께 생략된다. 욕망은 이제 원인이 아니며, 인식이야말로 인식 자체의 원인이다. 인식은 인식 자체의 원인이고, 인식과 관련된 욕망의 원인이다. 따라서 욕망의 주체와 인식의 주체는 하나이다. “모두가 다소 철학자이다”라는 낡은 테마는 서구 역사에서 인식에 대한 욕망을 인식 안에 봉쇄했다.
<2강. 1970년 12월 16일>
인식과 진리의 함축 관계 해체를 분석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에서는 모든 인식에 앞서는 욕망이 논의되는데, 이 논의는 두 가지 조작을 통해 가능했다. ① 인식을 욕망의 원리 자체로 재도입하는 것, ② 진리를 욕망과 인식 사이의 제3의 요소로 도입하는 것. 삼중의 이동을 정당화하는 모든 추론과 증거는, 감각과 그로 인한 즐거움이 진리와 관계맺음을 전제로 한다. 인식이 고유한 운동 내에서 욕망을 낳을 수 있다면, 이는 그 운동이 이미 진리의 질서 속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푸코가 강조하는 요점은 여기에 있다. 인식에 대한 욕망을 보증하고 근거 짓는 것으로서의 진리.
진리는 다음의 세 가지 역할을 한다.
① 진리는 욕망에서 인식으로 가는 이행을 보장한다.
② 진리는 욕망에 대한 인식의 선차성을 정초한다.
③ 진리는 욕망하는 주체와 인식하는 주체의 동일성을 야기한다.
욕망, 진리, 인식이 하나의 이론적 구조를 이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서 진리가 점하는 모호한 우위. 스피노자, 칸트, 니체가 이 체계성을 뒤집으려 하다
이 모든 체계성의 강력한 계기를 구성하는 것은 욕망 및 인식과 관련해 진리가 하는 작용이다. 서양 철학에서 니체 이전까지 욕망과 의지가 인식에 종속되어 있었던 것도 진리와 맺는 이 관계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그 관계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그 구조에서 빠져나와 뒤집을 정도까지 나아갔다. 스피노자에게 문제는 인식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행복에 대한 욕망이었다. 행복에 대한 검토 속에서 참된 관념에 고유한 행복이 발견된다. 스피노자에게 진리는, 인식과 인식에 대한 욕망을 모두 정초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로부터 모든 요소들이 전개되고 정렬된다.
니체는 의지-인식-진리의 관계를 문제 삼는다. 니체의 텍스트는 인식의 형식·법에서 인식에 대한 욕망을 해방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인식의 뿌리에는 욕망이 있으나, 욕망과 인식은 근친관계가 아니다. 니체에게 인식은 살아가기 위해, 지배하고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지 인식 자체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인식의 발전을 이끈 것은 의지의 어떤 규칙, 금욕주의라는 것도 중요하다. 인식행위의 배후에서는 본능들, 부분적 자아들, 폭력들, 욕망들의 투쟁이 전개된다. 그러나 인식의 저편으로 넘어가기 위한 니체의 노력은 불안정하게 머물 위험이 있다. 인식의 저편, 외부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푸코는 인식에서 빠져나와, 외부에서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니체 담론의 경계에서 푸코는 칸트의 위협을 본다. 진리와 인식이 서로에게 소속되지 않을 때만 우리는 인식할 수 없는 진리의 역설에 빠지지 않고 인식의 저편으로 넘어갈 수 있다. 욕망, 본능, 인식에 대한 의지에 관한 니체의 분석은 진리와 인식의 함축관계를 해체하는 작업에 의해 배가된다. 그 해체작업에서 사용되는 니체의 실증주의는 직각을 이루는 두 방향에서 이루어지는 비판행위이다. 하나는 인식 바깥을 향하고, 하나는 인식과 진리의 비장소를 향한다. 니체에게 칸트는 위험, 미세한 일상의 위기이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니체에게 위대한 타자, 유일한 상대이다.
쾨니히스베르크의 ‘늙은 중국인’에게서 해방되기, 하지만 스피노자를 죽이기
니체가 진리와 인식의 귀속 관계를 걷어내다
니체에게 칸트는 모든 인식 비판에 쳐진 함정이다. 칸트는 우리가 저편으로 넘어갈 수 없으며, 넘어간다면 진리를 놓치게 될 것이라 말한다. 불가피한 독단론 속에서 우리는 진리의 인식을 수중에 갖지 않고서도 자신을 참으로 제시하게 된다. 니체의 상대인 스피노자는 진리와 인식이 참된 관념의 형식에 속함을 지명하고 정초하고 연장한다. 칸트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리와 인식을 가장 엄밀한 방식으로 연결한 스피노자를 죽여야 한다. 칸트에게서 벗어나려면 진리와 인식의 소속관계를 해체해야 한다. 스피노자는 칸트의 조건이다. 스피노자에게서 해방된 후에야 칸트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