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 후기] 커트보니것 <제5도살장> (상) +6
토라진
/ 2018-05-11
/ 조회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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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읽게 된 [제5도살장]은 이전의 소설들과는 달리 감정이 절제되고 문체는 다소 무거웠다는 게 중론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황과 인물들은 여전히 우스꽝스럽고 희극적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이런 대비로 인해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은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세미나 시작 전 고요한 침묵이 흐르던 그 순간, 그리고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마지막에 서서히 잦아들던 이야기들. 잠깐의 그 정적 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는 과음한 탓에 쓰린 위를 부여잡고, 또 다른 누군가는 늙은 부모의 병간호에 지친 몸을 이끌고......조금씩 병들거나 지친 일상을 추켜올리며 매일의 일상 속의 한 켠, 목요일 오전에 만나는 우리 삶의 전장은 어떤 꿈을 꾸는 것일까?’
그 침묵 사이, 열기어린 이야기들을 기억 속에서 끌어와 거칠게나마 그 꿈의 자락들을 다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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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는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의 로즈워터씨와 과학소설 작가인 트라우트의 등장, 여전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등, 앞서 읽었던 소설의 요소들이 총체화 되어 드러나지만 문체와 이야기의 정교함은 좀 더 신중해졌습니다. 그것은 보니것의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끔찍했던 경험과 살아남은 자로서의 부채감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을 쓰기 전에 네 편의 장편과 수많은 단편들을 썼던 보니것에게 [제5도살장]은 어쩌면 숙제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1장에서 매리 오헤어의 당부처럼 전쟁의 영웅서사나 고발 소설이 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문장을 버리고 또 다시 썼을지 짐작하게 합니다.
보니것은 현실의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세계를 새롭게 그려내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스타일로 꼽는 것은 SF적 상상력과 풍자와 블랙 유머, 다층적인 캐릭터 등입니다. 그런데 [제5도살장]을 읽고 보니 그의 이런 특징들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신체에서 흘러나오게 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계와 부조리가 가득한 세계와 나약하고 무기력한 개인의 광적인 심리 상태가 현실을 벗어나 외계를 상상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도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새로운 세계의 건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도피든 건설이든 그것은 그의 최선이었을 것입니다. 풍자와 유머 역시 진실을 넘어서는 그 어떤 방식을 찾다보니 나오게 된 실소 같은 것일 테고요.
결국에 보니것이 대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계가 분명한 세계 속에서의 인간, 그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드레스덴 폭격에서 살아남은 화자인 ‘나’, 미치광이 취급을 받던 빌리, 과학소설을 쓰던 트라우트, 찻주전자를 훔쳤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던 에드거 더비 등은 어쩌면 보니것 자신의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었거나 죽음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 죽을 수도 있었던 전쟁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보니것은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요? 살아 있는 것이 죽음과 다르지 않으며, 살아나간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숙명이 박제된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건 아닐까요? 트랄파마도어인이 말한 ‘순간이라는 호박 속에 갇힌 벌레’처럼 말이죠.
토론에서 가장 많은 나온 이야기는 트랄파마도에 관한 것이었는데요. 트랄파마도어라는 외계 행성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한꺼번에 인식하며 모든 사건의 결과를 미리 알고 있습니다. 버튼 하나로 행성이 없어질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좋은 순간을 즐기며 지켜내려 합니다. 빌리는 그곳에 납치되어 그들의 철학에 어떤 위안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결국 삶과 죽음으로 갈라서게 만든 순간이란 이미 결정되어진 것이며 그가 부채감으로 짊어지고 있던 죽은 사람들은 어쩌면 살아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보니것은 트랄파마도어라는 세계를 창조해내면서 죽어간 이들을 애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미나에서 나온 의견처럼 트랄파마도의 설정이 당시 미국의 영상매체의 발전과 보급에 따른 문화적 감각의 확장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은 물론일 테고요.
캐릭터에 대해서도 의견들이 오갔는데요. 특히 종잡을 수 없는 빌리에 대해서입니다. 이 소설이 반전소설로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소설 안에서는 전쟁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빌리는 오히려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아들을 방관하죠. 어떤 의견도 제시하지 않은 채 말이죠. 이것은 보니것이 집필 당시의 미국의 베트남전 반대 분위기를 감안하면 의아한 점입니다. 결국 보니것이 그리고자 했던 것은 어떤 판단이나 비판을 할 수 조차 없는, 삶의 전장에 내팽겨쳐진 한 인간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빌리는 지극히 사실적인 캐릭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섣부른 의도와 비판보다 한 인물의 복잡하고 광적인 상태의 정신세계를 그리는 것이 전쟁의 모습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테니까요. 페스트리처럼 겹겹이 쌓여있는 인물의 내적 상실과 상처를 한 입 베어 물고 음미해야 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은 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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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간에 [제5도살장]의 마지막까지 읽게 됩니다. 마지막 결론이 어떻게 나게 될지 궁금해지는데요. 책의 마지막이 새로운 사건의 시작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는데......어쩐지 이 [제5도살장]이 그럴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함께 읽고 얘기하면서 서로의 생각과 순간의 침묵들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보니것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게 되는 것 같아 즐겁기도 하구요. 물론 그의 유머와 이야기의 깊이를 가늠하는 것이 좀 두렵긴 하지만 말입니다.
두려움과 설레임으로 다음 시간을 기다리겠습니다.~~^^
댓글목록
김현님의 댓글
김현
와.. 저는 오래 전에 읽은 것만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후기를 읽으니 새롭습니다.
예전에 읽을 때에는 미처 보지 못하고 넘긴 것들이 너무 많은 듯요.. ㅎㅎ
시공간을 한꺼번에 인식하는 외계인이라니..!
어디선가 듣기론 시간을 인식하는 것도 하나의 방식이라서
(그런 존재가 있기만 하다면) 과거-현재-미래 순으로 '시간이 흐른다'고 인식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요.
시간을 '흐른다'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세계일까요. 크..
이런 것들을 볼 때마다 sf 너무 매력적이라는..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네요.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이런 시간 인식은 영화 <컨택트>에도 나오죠.
원작인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는 더욱 자세히 다뤄지는데요.
세미나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세계 바깥을 상상하게 해주는 힘이 보니것에게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SF를 좋아한다는......^^
모로님의 댓글
모로
2차세계대전과 외계인의 만남이라니,, 작가의 상상력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전 트랄파마도어 행성보다 빌리의 참전기에 대한 묘사가 사실적이면서도
한편의 거대한 코미디극을 보여주는 것 같아 인상 깊었습니다.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사실적이지만 우스꽝스러운 상황과 인물의 행동들로
빌리가 겪여낸 전쟁은 또 다른 행성의 이야기처럼 읽히기도 했습니다.
무엇이 사실이고 환상인지 알 수 없는 경계 속에서
빌리는 현실을 어떻게 살아나갔을까요?
비애는 이런 행간들에 스며 있었던 것 같습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섣부른 의도와 비판보다 한 인물의 복잡하고 광적인 상태의 정신세계를 그리는 것이 전쟁의 모습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거라는 토라진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엘리엇의 상처는 세계에 의한 것이니까. 그 바깥이라는 걸 상상할 수 없는 지금-여기의 세계...
그 세계에서 휘청거리는 한 인간을 그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작가를 상상합니다. 아프네요.
그것은 아우슈비츠 이후로 서정시를 쓸 수 없게 되었다는 아도르노의 목소리와 닮아있는 듯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야 하고 쓸 수밖에 없다면 무엇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쓸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작가에게 있었을 것 같고, 그 고민을 붙들고 밀고 나간 하나의 산물이 바로 이 작품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무엇에 대해,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삶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제5도살장]이 전쟁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닌,
인간 보편의 문제로 확장되는 지점도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요?
진짜 보니것 아저씨, 리스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