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틀러 후기] 1장 : 6절 언어, 권력, 그리고 위치 변경의 전략 +2
라라
/ 2018-05-02
/ 조회 1,704
관련링크
본문
위티그의 휴머니즘(페미니즘)에는 행위 뒤에 행위자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면서도 젠더의 수행적 구성은 문화의 물질적 실천 속에서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성은 자연질서에 속하며,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 ‘지각 가능하도록 주어진 것’ ‘육체적 특질’로 여겨진는 것 같지만 정교한 신화적 구성물 즉 ‘상상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섹스’라는 언어적 허구는 이성애 욕망의 축을 따라 정체성의 생산을 규제하려 애쓰는 강제적 이성애 체계로 생산, 순환된다고 주장한다. 위티그가 보기에 동성애는 성의 범주를 초월하는 것이다.
이리가레는 젠더 ‘표식’을 남성 패권적 의미화 경제의 한 부분으로 이해한다. 남성적 의미화의 경제란 모든 의미화의 방식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남성적 관점에서 남성적인 것을 보편화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간의 수직적 경제구조처럼 남성/여성 간의 지배/피지배 양식이 있다는 입장이다.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의미화 경제는 남성적인 것으로 여성만의 대안적 체제 여성 상상계나 상징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버틀러는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결정되기보다는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입장이다. 섹스/젠더/섹슈얼리티의 구성뿐만 아니라 몸의 구성도 마찬가지이다. 몸이라는 물질에 대해서도 그 물질에 대한 인식성이나 인식 가능성 자체가 몸을 인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때문에 몸과 몸에 대한 인식성은 선후관계(인과관계?)가 아니라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역사적으로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지배담론, 제도, 규범에 따라 우연적인 토대에서 가변적으로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젠더는 규제의 틀 안에서 반복적으로 행위화, 양식화한 행위이다. 젠더의 본질적 외관을 젠더의 구성적 행위들로 해체할 수 있고 젠더의 행위는 사회적으로 감시하는 다양한 힘들을 보여줄 것이다. 젠더화를 통해 인식될 수 있는 주체개념도 그 자체가 우연적 존재론을 구성해온 젠더의 다양한 물화들이 배척되었을 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성애적, 동성애적, 양성애적 실천 속에 모호함이나 비일관성은 남성성/여성성의 이분법이라는 틀 안에서 억압되고 재기술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젠더 혼란의 문화적 배치는 ‘이성애’,‘동성애’,‘양성애’의 상대적 의비를 제한하기도 하고 융합과 재의미화로 전보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위치 변경의 전략이 될 수 있다.
행위뒤에 행위자가 없다, 수행만이 있다는 본질적인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발화와 행위를 통해 구성되는 주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행위를 보는 나는 어떤 주체인지 고민하게 된다. 행위자를 보지 말고 행위를 보자고 하지만 연극적 수행과 언어적 수행을 하고 있는 행위자를 어떻게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을 보는 나 또한 없다는 것인데...........어렵다.
댓글목록
현님의 댓글
현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동공지진이..;;
행위 뒤에 행위자 없다는 것은 행위로서 규정지어지지 본질적인 것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다만, 몸에 대한 이야기는 뒤늦게 멘붕이 옵니다...
발제 및 후기 쓰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동공지진 2222
그러나 당황하지 않(은 척을 하)고,
버틀러가 주체와 관련하여 지적하는 점은 '행위자=주체=나 혹은 너'라는 등식을 깨뜨리는 데 있는 것 같아요.
수행하는 자의 행위와 그것을 보는 행위자의 행위 자체가 없다는 게 아니라.
저는 지난 시간에 버틀러가 동성애자들의 이성애적 젠더 수행에 대해 말한 게 기억이 남아요.
젠더라는 걸 내가 선택해서 수행할 수도 있으니, 섹스와 젠더의 연관도 억지스러운 거라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여자/남자로 태어나 여성/남성으로 자란 게 아니라, 엄청 부자연스러운 토대 속에서 만들어진 거라고.
몸과 몸에 대한 인식이 선후관계나 인과관계가 아니라 동시발생적이라는 점도 짚어줘서 고마워요.
오늘 세미나할 내용에서도 버틀러의 이런 방식의 사유가 중요한 듯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