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 후기] 불교를 철학하다_5.보시, 6.중생 :: 0428(토) +5
샐리
/ 2018-05-02
/ 조회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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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순수 소모는 없는가.
“책이 주는 정보를 모두 옳다고 생각하면 ‘음, 그래. 그래.’ 하며 넘기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책에 반문을 던지며 읽을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가 지난 시간을 마무리하며 소소님의 소감과 함께 나눈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번 후기는 책에 대한 동감보다는 반문을 던져보는 나름의 도전으로 꾸려보고자 한다.
“포틀래치가 ‘재산을 죽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부의 축적 자체를 저지하고 정기적으로 재산을 소모해버리는 ‘순수 소모’ 자체에 있다. 먹고사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의 부가 축적되기 시작하면, 그 부는 무엇에 사용하게 될까? 남에게 빌려주어 이자를 얻거나, 남을 고용하여 자기에게 필요한 일을 하도록 하는 데 사용될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축적된 부의 격차는 점점 커질 것이고, 결국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커지며 계급대립이 생겨날 것이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정기적으로 필요 이상의 부를 소모해서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축적’이 당연시된 자본주의 사회에선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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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포틀래치를 바라보며 ‘순수 소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모란 어떠한가에 대해 토론하였다. 가령 빵을 예로 들자면 그 빵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를 살 것이고 제빵과정을 위한 기계를 살 것이다. 이것은 원료와 기계를 사기 위한 소모이다. 그렇기에 순수 소모라고 볼 수 없다. 또한 내가 빵을 먹고 싶어서 빵을 산다면, 그 빵의 일정 부분은 다른 것을 생산해내기 위한 과정에 투입될 것이다. 때문에 이 또한 순수 소모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순수 소모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다른 주제가 많았던지라 급히 마쳤던 기억에, 후기를 통해서라도 진정 우리 사회에는 순수 소모란 없는 것인지에 대해 토론해보고 싶다.
‘아름다운 가게(아름다운 가게가 실제로 잘 운영되는지 보다는 기부라는 측면만 생각해보기로 한다)’는 어떨까? 물론 그들도 기부자가 요청하면 기부영수증을 발행해준다. 그러나 그러한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부하는 행위는 순수 소모라고 볼 수 없을까? 또 한편 이러한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를 하면 아름다운 가게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 남긴 수익금으로 본인들의 사업을 진행한다. 결국 내가 빵을 사는 행위가 다른 것을 생산해내는 것과 동일한 과정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티베트 사원을 예로 들고자 한다. 개인의 축적 대신 잉여 재산을 사원에 기부하고 사원에서 재산을 소모함으로서 부의 축적을 막았던 사례를 말이다. 티베트 사원은 이런 식의 소모를 통해 소모적 장식 뿐 아니라 보시를 대중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물품을 중고로 거래할 수 있음에도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했고 그 행위가 다른 공익활동을 배출해냈으니, 이 또한 순수 소모이자 보시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이 쯤 되면 순수 소모 자체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된다. 기부와 포틀래치를 엮어낸 의견을 찾다가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기부에 대한 모스, 데리다 등의 학자들의 의견을 담은 내용)』라는 책을 발견했다. 본 책의 저자는 증여론에 대해 “기부행위 역시 궁극적으로는 답례, 곧 대가를 전제로 하는 일종의 교환에 불과하다는 것이 모스의 견해”라고 정리한다. 그런 점에서 순수한 기부는 없다는 것이 저자가 이해한 증여론이다. 나의 ‘부’를 축적하지 않고 소모했다는 점에서 포틀래치의 소모 행위 자체는 순수 소모로 바라볼 수 있겠으나, 그 ‘부’를 축적하지 않는 대신 ‘권력’과 ‘우월한 지위’를 갖게 되었으니 순수 소모는 순수한 의도로만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다시 논점으로 돌아오면, 우리가 읽는 책에서의 순수 소모는 경제적인 부가 정치적인 권위로 이어지지 않도록 부를 ‘죽이는’ 것을 말한다. 경제적인 부를 가지면 정치적인 권위를 갖지 못하고, 정치적인 권위를 위해서는 경제적인 부를 포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가게와 같은 기부 행위가 순수 소모인지 생각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게 된다. (1) 부를 ‘죽이는’ 행위여야 하고,(2) 경제적인 부가 정치적인 권위로 이어지지 않아야 한다.
먼저 기부는 ‘나’라는 개인만 본다면 부를 죽이는 행위가 맞다. 물건을 혹은 재산을 투여하여 충분히 다른 부를 창출해낼 수 있지만 다른 곳에 건네줌으로서 죽이지 않았는가. 두 번째로 내가 기부를 하여 정치적인 권위를 얻었는가? 전재산을 기부하지 않는 이상 정치적은 커녕 사회적인 지위도 얻기 힘들다. 내가 필요로 하는 만큼(그 필요가 과하든 아니든)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기부를 통해 소모했다면, 게다가 이 소모를 통해 심신의 안정이라던가 스스로의 만족감 따위만을 얻었다면. 포틀래치만큼이나 순수 소모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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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을 통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혼자 줄글로 쓰다보니 자꾸 제 생각 안에 갇히는 느낌이 드네요~ 누구든 언제든 다른 의견을 내어주신다면 제 생각이 더 원활히 돌아갈 것 같습니다! 항상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동료들이 있음에 감사하며, 휴셈 이후에 뵙겠습니다 ^0^
댓글목록
거은님의 댓글
거은오. 아름다운 가게 말씀하시니까 딱 와닿네요. 나는 그냥 집정리 할겸 쓸모없는 물건을 버리는? 건데 이게 누군가에게 도움되는 비용으로 발생하니까.. 한달에 몇만원씩 후원금 내는 것 보다 자리이타에 더 가까운것 같습니다ㅎㅎ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한편의 멋진 철학에세이를 보는 듯 합니다. 샐리는 우리세미나의 막내이지만,
개념의 정식화나 논지의 전개, 적절한 예시 등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네요. ^^
샐리의 사유가 날로 발전하는 것을 보니, 뇌운동도 젊었을 때 보다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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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수소모란 무엇인가?
제가 이해하는 순수소모 역시 샐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순수소모'는 물건의 유용성(사용가치)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모든 물건(재화)은 우리 삶의 수단이 되는 의-식-주에 필요한 유용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순수소모란' 더이상 옷이나 쌀이나 가구가 될수 없도록 파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과 다르게 '일반적인 소모'는 물건(재화)이 '축적'되거나 '생산'에 투입되는 것입니다.
물건이 축적이나 생산에 투입될 때, 그것은 더큰 부(재화)를 생산하고 더큰 빈부 격차를 만들어냅니다.
포틀래치나 티베트의 경우 순수소모를 통해, 부의 축적이 가져올 빈부격차를 제거하려고 했던 거지요.
2. 현대사회의 순수소모는 없는가?
현대사회의 순수소모는 없는가?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제 떠오른 것은 이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팔리지 않은 물건이 쌓이게 되고 새로운 생산을 가로막게 됩니다.
결국 재고가 쌓이고 공장가동률이 낮아지고 실업자가 넘치는 공황을 맞게 됩니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는 과잉생산으로 인한 만성적이고 주기적인 공황상태에 있습니다.
따라서 자본은 재고형태로 쌓이는 물건들을 주기적으로-강제로 폐기처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세계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절반인 20억톤이 매년이 버려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식량이 너무 많이 시장에 나오면 식량의 가격이 떨어지기 때문에,
자본은 식량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농산물업자와 축산업자에게 돈까지 주며 식량을 폐기처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싱싱한 식료품이 그대로 버려지고, 건강한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3. 순수소모 = 과잉생산으로 인한 물건의 폐기처분?
재고의 폐기처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직 수명이 남아있는 물건을 쓰레기로 만드는 일은 일상적이지요.
오히려 물건이 수명을 다하고 버려지는 경우가 예외적이라고 해야 겠지요.
대부분의 물건은 물리적 수명 이전에, 사회적 수명에 의해 폐기되고 있으니까요.
현대사회의 순수소모는 과잉생산으로 인한 물건의 폐기처분이 아닐까요? 하나의 의견입니다.^^
고대사회나 현대사회의 순수소모는 모두 물건의 유용성을 파괴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고대사회의 순수소모가 부의 축적과 빈부의 격차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면,
현재사회의 순수소모는 부의 축적과 빈부의 격차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거은님의 댓글
거은오라클님 댓글을 읽고 생각해보니 포틀래치나 태양같은 경우 자신의 힘을 내는(소모하는) 과정에서 타인에게 이로움을 주는 반면, 불필요해진 내 물건을 기부하는 행위는 내 힘을 내거나 내 힘을 소모한다고 하기보단 자본주의의 과잉생산으로 생기는 잉여물을 소모하는 것 같습니다. 포틀래치와 비교해 소모하는 급?격?의 차이가 있는것 같습니다. (한입으로 두말하는것 같지만 같이 이야기를 나누니 사고의 전환이 되는것 같아 재밌습니다ㅎㅎ)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거은! 한입으로 두말하는 거... 완전 좋습니다. ㅋㅋ
우리가 살면서 이런 경우가 얼마나 흔할까요!
다만 스스로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지요.
한입으로 두말하는 것은, 기존의 사유가 변화되는 것인 만큼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순수소모'를 태양이 자기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에 비유한 것은 정말 좋습니다.
거은이 지난 세미나에서 나무를 사례로 든 것처럼, 자연은 축적하지 않습니다.
태양은 자기에너지를 흘러넘치게 대지에 투사하고,
나무는 때가 지나 썩은 열매를 땅에 떨어뜨리지만 결코 축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은 생성과 몰락의 거대한 '흐름' 자체입니다.
축적 혹은 저장을 뜻하는 '스톡stock'은 자연의 흐름을 절단하여 가둔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포틀래치의 재화 파괴와 자본의 과잉생산 폐기를 비교하여
급과 격이 다른 순수소모라고 평가한 것도 재미있습니다.^^
소소님의 댓글
소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책에 스스로 거렁뱅이가 된 자가 나와요. 그는 자신이 부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자신의 풍요와 마음을 나누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갔어요.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가난한 사람들도 천박하기는 마찬가지 였지요. "위에도 천민, 아래도 천민! 오늘날 무엇이 '가난함'이며 무엇이 '부유함'인가!" 라며 그들로부터 도망치게 됐고 차라투스트라를 만나 한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차라투스트라가 말해요. "그대 이제 배웠겠지. 제대로 주는 일이 제대로 받는 것보다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가를. 그리고 근사하게 베푸는 것, 그것이 일종의 비결, 그것도 선의의 마지막, 더없이 교활한 으뜸 비결이라는 것을"
샐리님의 후기를 읽다가 주고 받음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