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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 혐오발언: 3장 발제
준민 / 2018-11-11 / 조회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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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전염되는 말 : 편집증과 군대 내 동성애

 

1993년 7월 19일 미국 국방부는 “군대 내에서의 동성애에 관한 신정책 가이드라인”을 선언하면서 동성애적 행위를 한 군인은 해고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군인의 성적 지향이 동성애인 것을 금지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면 안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동성애적 행위는 장병이 자신을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라고 선언하거나 같은 성별의 누군가와 결혼하고자 했다는 진술로 정의된다. 국방부는 진술이 행위에 관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군 장병에게는 이를 부인할 기회를 준다.

 

군대 내에서 동성애자라는 용어는 자기 정의의 맥락 속에서 발언될 때만 금지된다. 이 규제는 동성애를 금지시키기 위해 동성애자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 버틀러는 이 규제가 동성애자라는 용어를 공적 담론으로 이동 시킨다고 주장한다. 규제는 이 용어를 발언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다. 규제는 이 용어를 수사적으로 표명하고, 발언 가능하게 하고, 증식시킨다. 버틀러는 동성애자라는 용어가 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정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기술하기 위해서만 쓰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어처구니 없어 보이지만 나름 일리가 있다.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행위가 부정당하는 이들이고, 자기 부정을 통해서만 군복무를 하거나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자들이다. 따라서 동성애자라는 용어는 스스로를 정의하는 게 금지된 계층을 기술하게 된다. 군대 내 동성애자들은 다른 시민권의 취소 가능한 지대와 중첩된다. 이민법과 이민자들은 언제든지 그들의 시민권이 취소될 수 있고, 군대 내 동성애자들은 그들과 같은 처지이다. 

동성애자들을 규제하는 새로운 정책에서는 누군가가 동성애자라고 진술하는 것이 동성애 행위 그 자체라고 합리적으로 해석된다. 또한 진술은 군대에 큰 위협을 제기하는 동성애 ‘성향’의 증거이다. 

버틀러는 동성애적 성향을 심문하는 합리적인 사람이 전반적으로 편집증적이라고 주장한다. 그 합리적인 사람들은 어떤 동성애적 성향을 나타내는 행위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 성향 또는 행위는 동성애자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사람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따라서 동성애 혐오적인 상상의 허구가 된다.

군대는 동성애자의 자기 선언을 동성애 행위와 동등한 것으로 본다. 버틀러는 그 견해를 집중 분석한다. 동성애자의 자기 선언은 그 말이 동성애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진술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발언이 가지는 수행적 권력은 오직 규제적 담론 속에서만 생산된다. 하지만 이런 귀속된 수행성은 동성애자의 더 많은 공공성에 권위를 부여하려는 운동에 의한 수행성과 어떻게 구별될까? 버틀러는 동성애라는 용어가 끊임없이 어떠한 섹슈얼리티를 구성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동성애라는 용어가 자신의 지시 대상을 수행할 수 없는 건 차라리 잘된 일이다. 이로 인해 동성애, 동성애자인 것, 퀴어적인 것과 같은 용어들의 기표는 규정되지 않은 미래의 언어가 된다. 버틀러는 동성애가 확실한 지시 대상이 없다면 효과적인 게이, 레즈비언 정치학도 있을 수 없다는 주장에 반하여, 동성애라는 용어를 군대가 상상하는 것처럼 어떤 수행문이 되지 못하게 만들려 한다. 그 용어를 미래의 재표명으로 열어두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편집증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에서 양심은 남성 동성애에 대한 억압으로 인해 남자다움이 생길 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이와 똑같이 군대의 동성애 부정은 어떠한 ‘남성’에 대한 개념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적 담론은 시민권이 상상된 동성애에 대한 거부와 승화를 통해 획득되는가를 말한다. 편집증적인 자아는 동성애를 양심 작용의 전형적 모델로 구성한다. 프로이트는 동성애를 승화하면서 자아가 획득된다고 말하지만, 그의 담론은 진행하는 과정에서 바로 그 승화에 직접적으로 연루된다. 이를 보기 위해선 <편집증의 메커니즘에 관하여>로 돌아가야 한다. 그는 동성애적인 충동이 사회적 본능을 구성하는 데 도움을 주며 따라서 일반적인 인류애를 구성한다. 그 본능 또는 자아-이상은 가족, 계급, 국가의 공동 이상이 된다. 그 자아-이상이 불충족될 때의 불만은 동성애적 리비도를 해방시키고, 이것은 죄책감이 된다. 편집증은 여기서 생산된다. 편집증은 동성애 승화나 내면화의 동기를 부여하는 사랑의 상실에 대한 공포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편집증에 대한 이 설명이 어떻게 결국 인과관계에 대한 편집증적인 설명으로 귀결되는가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는 편집증은 병의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장애이지만, 남성 편집증의 두드러지는 원인은 사회적인 체면과 모욕이라고 서술한다. 여기서 그는 거짓 원인을 참 원인으로 교체하고 있다. 편집증의 원인은 모욕과 상처가 아니라 내면화에 종속되는 성적 욕망이다.

욕망에 대한 금지는 스스로를 기만하고, 이 기만이 양심이 된다. 따라서 양심은 정신적 실체가 아니라 자아에 대한 기만, 욕망을 외면하는 욕망의 경로가 된다. 동성애자의 자기 정의에 대한 규제는 이러한 양심이 더 이상 사회적 규제에 복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군대 내에서의 사회적 남성 연대는 동성애에 대한 금지를 필요로 하며, 이 연대는 군인 남성들을 끈끈하고 황홀하게 엮어준다. 즉 군인들은 자신들의 동성애를 갖기 위해 동성애를 가져서는 안된다. 또한 동성애는 전염성을 가진 위험한 액체로 비유된다. 이는 동성애를 에이즈의 전형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진술과 행동과 행위

다시 한번 보자면 국방부는 장병의 성적 지향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장병이 동성애 행위에 관여되어 있을 때 그를 해고한다. 버틀러는 이 새로운 가이드 라인이 ‘행위’와 ‘행동’을 융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국방부는 동성애 행동에 대한 기준은 정하지 않고, 동성애 행동이 동성애의 가능성을 확장시킨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들은 동성애자의 자기 선언이나 결혼 시도와 같은 동성애 행위가 군대 내 동성애 행동을 증폭시킬거라고 생각한다. 동성애 행위를 한 자가 특정한 동성애의 권력을 가질거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행위가 바로 행동이 된다면, 진술도 바로 행동이 된다. 누군가가 동성애자라는 진술은 그 발언 앞에 있는 사람에게 동성애적으로 행위하고 있는거라고 해석된다. 따라서 “그냥 말인데 뭐”라는 어구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되고, 진술은 말하는 것이 존재하게끔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욕이 된다.

진술이 행위인 것은 충분히 맞지만, 진술이 자신의 지시 대상을 온전히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는 자기 정의의 맥락 속에서 말할 때만 모욕적인 행동으로 해석된다. 이는 그 발언을 듣는 자들이 그 진술로 인해 유혹 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술은 동성애 행동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만, 군대는 진술을 행위 그 자체의 담론적인 발생으로 받아들인다. 오스틴은 모든 발언이 행위라고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발언이 청자에게 기계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발언은 우연성, 해석의 다양성, 이해도에 따라 전유된다. 군대는 발언에 귀속된 수행문이 행위를 일으키는 것으로 편집증적인 환상을 하고 있다. 그러고는 “나는 동성애자다”라는 진술을 “나는 당신을 성적으로 원한다”라고 곡해한다. 

이러한 군대의 해석은 동성애라는 용어의 발언 가능성이 터부를 부수고, 욕망에 대한 표현을 통제할 수 없게 만든다고 전제한다. 금기시된 욕망의 청자는 그 욕망에 의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은 에이즈의 전달로 환원된다. 동성애자의 선언을 전염적인 행위로 과장하면서 말이다. 

 

터부와 전염

프로이트는 인간이 터부가 금지하는 것에 양가적 태도를 가지고, 터부에는 유혹을 부르는 권력이 귀속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즉 터부는 전염처럼 행위하는 것이다. 또한 터부를 위반했던 사람은 자신의 사례를 따르도록 타인을 유혹하기 때문에 스스로 터부가 된다. 문제는 자기 선언이 군대 내의 금지 안에서 어떻게 전염 가능성을 가진 매개체 역할을 하는가이다. ‘동성애자’라는 기호는 욕망을 흡수해서, 욕망이 그 기호 자체에 의해 전달된다. 그 기호는 자신이 재현하는 욕망을 대체했을 뿐 아니라 전염시키는 매개체의 기능까지 획득했다. 

군대는 동성애자들에게 자신들의 경솔한 선언을 철회할 기회를 준다. 공권력의 위협에 반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 단념을 통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단념이 욕망을 폐기할 수는 없으며, 금지가 욕망을 보존할 수 있는 기이한 방식이 된다고 주장한다. 억압적인 법은 억압이 리비도의 활동이 되는 만큼 억압하고, 몸에 반하는 금지는 그것들이 규제하고자 하는 육체적인 활동에 의해 그 자체로 존속된다.

양심은 자신이 금지하고자 하는 만족의 장소가 되기 때문에 추구된다. 금지는 처벌하는 법이라는 명분 아래 본능이나 금지된 욕망을 위한 충족의 장소가 된다. 법의 적용은 그 충족을 확인시키며, 모든 금지된 욕망의 출현을 통해 활성화된다. 금지는 금지된 욕망의 소멸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금지된 욕망의 재생산을 추구한다. 군인이 자신의 자리로 복귀되는 단념은 금지가 동성애 욕망을 부정하는 동시에 인정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욕망은 발언 불가능해지는 게 아니라 금지 속에서 보존되는 것이다. 

그러나 금지로 인한 모욕과 상처는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모욕과 상처는 동성애에 대한 금지가 취하는 상상된 외부 형태인 것일 수도 있다. 즉 동성애가 금지된 것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상처를 받는 것이다. 이와 달리 금지는 편집증 과정에서 일반화되는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는 양심이라고 알려진 것이 되며 자신에게 반하는 동성애적 욕망을 상정하며, 사회적인 것은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정식적인 금지와 사회적인 금지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편집증 내에서의 모욕과 상처는 사회적 규제에 대한 정신적인 것의 흔적이다. 또 스스로를 거부한 욕망으로 인한 모욕과 상처는 그 거부된 욕망을 타자의 판단으로 이후 투사한 것이다. 자아-이상의 개념은 실행되지 않은 굴절된 동성애로 구성되어 있고, 많은 양의 동성애 집착에 대한 철회를 통해 형성된다. 이 동성애는 철회되거나 굴절되거나 억압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부인하는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금지는 이성애적 시민의 형태로 ‘결합’되는 자아-이상의 허구를 위한 조건이 된다. 그 이성적인 시민의 동성애적 리비도는 죄책감으로 변형되면 영원한 것이 된다. 

군대 내에서 동성애 금지는 남성우월적 시민을 생산한다. 여기서 레즈비언 또한 표적이 되는데, 이 때 모욕은 대부분 그들의 사생활에 대한 성희롱의 형태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동성애를 말할 수 없다. 이는 젠더 종속이 확보되는 이성애적 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자신의 동성애를 말한다면, 그 말하기는 솔직함을 야기하겠다는 위협이고 따라서 남성 계급의 동성사회성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군대가 동성애적인 비유를 적극 생산한다는 것도 고찰해야 한다. 국가는 동성애자를 국가의 호명 권력에 의해 명명된 채 남아 있도록 만든다. 국가는 동성애적인 행동을 규제하지 않고 그 이름이 탄생된 금지로부터 억제가 풀릴 경우 그 이름에 부여되는 과도한 권력을 규제하고자 한다. 

 

버틀러는 우리가 동성애라는 용어에 대한 정의에 착수할 경우, 동성애에 대한 권위적이거나 적극적인 개념을 생산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군대에 저항하는 자들조차 자신이 명명하는 것을 언어적인 존재로 만들어 낸다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퀴어’는 모든 선의의 이성애자들이 그 용어에 갖은 성적 실천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때 출현한다. 동성애에 대한 담론적인 생산, 즉 동성애에 대한 말하기, 글쓰기, 제도적 인정은 동성애가 말하는 욕망과는 같지 않다. ‘커밍아웃’은 일종의 행위지만 자신의 지시 대상을 전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욕망은 수행성의 연쇄를 강제하는 지시 대상이다. 욕망은 절대로 수행성을 통해 완전 포획되지 않는다. 수행성과 지시 대상의 간격을 폐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푸코는 담론이 그런 행위를 통해 성애화된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버틀러는 이 경우 담론이 동성애를 탈성애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어떠한 지시 대상도 완전히 명명될 수는 없고, 어떤 사건과 분리된 채로 있어야 한다. 이런 사건은 우리가 이미 된 것과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미래를 배제한다. 그 기표가 민주적인 재표명에 이용 가능한 투쟁의 장소로 남아 있는 미래를 말이다. 따라서 버틀러는 동성애적은 욕망은 그것을 말하는 욕망과는 같지 않으며 동성애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동성애적으로 행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당한 과오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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