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말과 사물 1108 5장 분류하기 발제
준민
/ 2018-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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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분류하기
- 준민
1 역사가들이 말하는 것
17~18세기의 생명과학은 그 전과는 달리 정확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현미경의 발명 덕에 관찰의 기술적 개선이 이루어진 것과, 물리학에 새로운 특권이 생기고 물리학적 실험과 이론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들에 힘입어 17-18세기는 생물의 영역을 체계화하려는 시도가 생긴 시기이다.
왜 이 때 이런 일이 생겼는가? 원인의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합리성이 생물의 합리성으로 옮겨져 왔을 수도 있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은 모든 물리적 현상이 어떤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기계론적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설명한다. 생기론은 기계론과는 대조되는 이론인데, 물리적 현상이 물리적, 화학적 힘과는 상관없이 독특한 생명력에서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사상사가들은 다른 나라를 탐험하면서 이국의 동식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새 풍토를 길들이려 했다. 역사가들은 신의 섭리와 과학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발견했고, 다른 과학 분야들 사이의 모순을 봤고, 자연 전체가 분류될 수 있다는 주장하는 사람들과 생명은 고갈되지 않고 계속 변동한다는 사람들 사이에 대립을 봤다. 진화론에 관한 논쟁은 18세기가 아니라 17세기에 이미 시작되었고, 데카르트와 말브랑슈는 기계론과 신학을 두고 끊임없는 논쟁을 펼쳤다. 19세기에는 18세기의 이 모호했던 시도들이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생명과학으로 실현되었다. 여기서 푸코는 18세기의 방법론들을 파헤치려 한다. 현미경을 통한 관찰이 마주치는 난관, 생물의 불변을 주장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실험주의자들과 체계 옹호자들의 갈등, 아리스토텔레스나 스콜라 철학으로 결정되는 바탕과 진화, 유기체의 개념에 의해 정해지는 바탕으로 지식을 나누어야하고 기록해야할 의무. 이 중 가장 중요한 건 ‘생명’이다. 18세기에는 생물학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당연한 것이 그 때는 유효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 생물학은 미지의 분야였고, 생명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2 자연사
데카르트의 기계론이 위축되면서 자연의 역사가 출현했다. 세계 전체를 기계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생물의 세심한 관찰은 데카르트 철학이 물러난 빈 자리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다른 과학의 부재나 장애로 인해 새로운 과학이 생겨날 순 없다. 데카르트의 역학과 자연사는 동일한 에피스테메를 가지고 있다.
16-17세기 중엽까지 존재한 것은 역사였다. 1657년 존스턴은 <네발짐승의 자연사>를 펴낸다. 이 이전에 동식물의 역사에 관해 쓰는 것은 동식물의 요소나 기관을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관련된 전설, 이야기까지 기술하는 것이었다. 관찰과 이야기의 분리는 당시에는 실재하지 않았다. 즉 기호가 사물의 일부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존스턴에게서는 많은 것이 누락되었다. 핵심은 그 결여에 있다. 존스턴의 경우, 의미론은 쓸모 없게 되었다. 동물의 실체와 얽혀있는 말이 떨어져 나갔다. 자연사의 장소는 사물과 말 사이의 벌어진 간격에 있다. 말과 사물이 서로 떨어졌을 때, 차후에 새로운 것을 볼 가능성이 열린다. 존스턴 이후 린네가 자연사에 제안한 서술 순서는 이름, 이론, 속, 종, 특징, 용도, 끝으로 리테라리아이다. 사물에 침전된 언어가 맨 끝으로 밀려난 것이다. 사물은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나타난다. 고전주의 시대 자연과학은 보편적 마테시스 기획에 관련되어 있지만, 고유한 고고학을 갖는 별개의 형성물이다.
17세기 중엽까지 역사가의 역할은 자료와 기호의 대규모 수집이었다. 파묻힌 말을 언어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와 달리 고전주의 시대 역사가는 사물 자체에 대한 세심한 조사를 떠맡고, 수집된 것을 말로 옮기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최초로 실행된 게 자연사이다. 자연사를 구축하기 위해선 사물에 적용될 말만 필요했다. 따라서 자연사의 자료는 사물들이 병치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역사의 장소에서 존재물들은 모든 주석과 주변 언어를 박탈당한 상태로 공통의 특질에 따라 분류된다. 르네상스 시대에 기묘한 동물은 구경거리였고, 새로운 우화가 되었지만, 고전주의 시대에 와선 ‘도표’식으로 진열될 사물이 되었다. 무대의 시대와 목록의 시대간의 차이는 욕망이 아니라 사물을 시선과 담론에 동시에 결부시켜 역사를 기술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3 구조
자연사는 관찰된 사물을 말에 가장 가깝게 이끌어야 한다. 자연사는 가시적인 것의 명명이다. 때문에 자연사는 단순하며 사물 자체에 의해 강제된다. 이것은 여태껏 인간의 눈이 극복하지 못한 것을 갑자기 정당하게 다루는 것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가시성의 영역이 온전한 밀도로 구성된 것이다. 자연사는 인간이 더 자세히 볼 수 있어졌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인간은 경험의 영역을 스스로 제한했다. 17세기 관찰에서 시각은 절대적으로 중시된다. 18세기의 맹인은 자연사학자가 될 수 없었다. 많은 배제를 통해 관찰이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런 조건들이 경험의 영역을 제한했고 광학 도구의 사용을 가능하게 했다. 렌즈를 통해 더 정확히 관찰하려면 다른 감각들은 배제해야한다. 광학 도구는 한 개체가 어떻게 동일성을 보존하면서, 여러 시기를 가로질러 전달될 수 있었는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였다. 관찰하는 것은 사물이 재현의 풍요로움 속에서 분석될 수 있고, 각자가 이해할 수 있는 이름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대상은 네 가지 변수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요소들의 형태, 요소들의 양, 요소들이 공간 속에서 상관적으로 배치되는 방식, 요소들 각각의 상대적 크기. 린네는 모든 주석은 이 네 가지 요소에서만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네 가지 변수는 동식물을 모든 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묘사로 분절하고, 따라서 누구나 동일한 개체를 동일하게 묘사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언어와 사물의 첫 번째 대면은 불확실성의 여지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확립될 수 있다. 식물학자들은 이 네 가지 가치를 구조라고 부른다. 구조는 묘사를 두 가지 방식으로 가능하게 해준다. 수와 크기는 언제나 계산이나 측정에 의해 양적인 용어로 표현될 수 있다. 반대로 형태와 배열은 다른 방식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이 때 매우 복잡한 몇몇 형태는 인체와의 뚜렷한 닮음 관계에 따라 묘사된다. 이 경우 인체는 가시성의 전형들의 저장고로서 구실한다.
재현을 통해 형태가 마련되고, 그것은 구조에 의해 분석된 후 언어의 단선적 전개에 적합하게 된다. 명사와 달리 하나의 동일한 동식물은 재현에서 언어로의 이행이 구조에 의해 제어되는 한, 동일한 방식으로 묘사된다. 언어에서 명제와 분절에 부여되는 역할이 자연사에서는 하나의 동일한 기능 속에서 중첩된다. 구조의 이론에서는 가시적인 것 전체가 변수 체계인데, 이 체계의 모든 가치는 언제나 완결된 묘사에 의해 정해질 수 있다. 따라서 자연물들 간에 체계와 차이들의 순서를 확립할 수 있다. 아당송은 식물학을 언젠가는 수학적인 학문으로 취급할 수 있을거라 말했다.
4 특징
그러나 이런 식으로 얻은 묘사는 고유 명사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가 되려면 보통 명사가 되어야 한다. 자연사는 일상언어가 따로따로 유지하는 것을 하나의 동일한 작용 속에 통합해야 하고, 확실한 지칭과 제어된 파생을 동시에 보장해야 한다. 여기서 특징의 이론이 적용된다. 특징의 확립은 쉽다. 명명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구조에 의해 담론의 내부로 넘어간 요소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곧 생긴다. 모든 자연물의 동일성과 차이를 확립하려면 묘사에서 언급될 수 있는 특성이 있어야 한다. 이 난점을 피할 수 있는 기법은 두 가지가 있다. 닮은 점이 명백한 집단 안에서 완전한 비교를 통해 동일성과 구별을 확보하거나, 모든 개체에 변이를 조사할 유한한 집합을 선택하는 것이다. 전자는 ‘방법’이고 후자는 ‘체계’라고 불린다. 통상적으로 이 둘은 서로 맞선다. 중요한 것은 차이가 아니라 언어를 구성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이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필연성에 있다.
체계는 묘사에 의한 요소들 중 몇몇을 선별한다. 사람들은 이 요소를 통해 동일성과 차이를 조사한다. 그러나 요소들 중 하나와 관련되지 않는 것은 의도적으로 제외된다. 따라서 체계는 출발점에서부터 자의적이다. 반면 두 개체에서 선택된 요소가 유사할 때 그것은 공통의 명칭을 얻는 데, 그것이 특징이다. 린네는 특징이 “첫 번째 종의 결실에 관한 가장 신중한 묘사”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체계는 상대적이다. 누구나 바라는 대로 적용할 수 있는데, 다른 개체로 넘어가면 차이는 매우 빨리 나타난다. 이 경우에 특징은 순수한 묘사에 가깝다. 반대로 구조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면 차이는 드물고, 개체는 촘촘해진다. 특징은 분류에서 요구되는 섬세함의 정도에 따라 선택된다. 동식물계 전 영역에도 이런 식으로 격자가 놓일 수 있고, 어느 종이라도 스스로가 포함되는 군의 명칭에 의해 지칭될 수 있다. 존재물들은 자체의 교유 명사와 자신이 속하는 보통 명사의 온전한 계열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방법은 특징으로 구실하는 요소를 점진적으로 연역한다. 그 종의 어떤 부분도 내버리지 않고, 끌어낸 모든 값을 변수들에 의해 결정한다. 이 과정은 다음 종에서도, 그 다음 종에서도 반복되지만 차이만이 언급된다. 첫 번째 묘사를 중심으로 묘사는 점차적으로 경감된다. 그러나 실재하는 모든 종을 이 방법으로 처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 때 작업이 무한 반복되지 않도록 공통의 특색들을 확립하고 명명한다. 방법은 사물들을 전반적인 닮음에 의해 바깥으로부터 부과되고, 출발점에서 여전히 묘사와 가깝다. 그러나 같은 특징을 지니면서 명백히 동일한 과에 속하는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방법은 언제나 수정될 수 있다.
체계가 법칙과 같아서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면, 방법은 예외를 허용하지 않을 만큼 일반적이진 않다. 게다가 체계가 동식물들 간의 등위 관계만을 알아볼 수 있다면, 방법은 일반적인 동일성에서 덜 일반적인 것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수직적 종속 관계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럼에도 체계와 방법은 동일한 토대에 기초하고 있다. 그 토대는 경험적 인식이 모든 가능한 차이의 연속적이고 보편적인 도표에 의해서만 획득된다는 것이다. 16세기에 종은 공통된 표지의 범위에 의해 확보되었다. 모든 생물은 표지를 지니고, 다른 종과는 무관한 자체의 개체성을 표출했다. 그러나 17세기부터 기호는 동일성과 차이에 따른 재현의 분석에서만 존재한다. 하나의 지칭은 다른 모든 지칭과 관계 지어진다.
5 연속과 파국
종은 워낙 다양하게 바뀌어서 특징이 없어질 수도 있고, 보통 명사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가장 단순한 특징이 나타나려면 적어도 하나의 요소가 다른 구조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자연사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와 같아진다. 보통 명사가 가능하려면 사물들 사이에 닮음이 있어야 하는데, 언어에선 닮음이 단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상상력은 자연사와 같은 잘 구축된 언어에게는 보증이 될 수 없었다. 자연사에게는 이 의심을 피해갈 수단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연속성이다.
연속적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체계와 방법에서 다른 형태를 띈다. 체계에서 연속성은 빈틈없는 병치로만 이루어진다. 범주들은 병치에 관한 자의적 규약이 되고, 올바르게 확립된다면 자연의 실재하는 영역들과 상응할 수 있게 된다. 즉 특징이 속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속이 특징을 구성한다. 방법에서 연속성은 닮음이 명백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요구 조건이 된다. 세계의 광범위한 개체들을 범주화하는 것은 언제나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분류는 순전히 명목적인 것이다. 자연은 항상 단계적으로 변하며, 일반적인 범주를 발견하는 노력에는 반드시 연속성이 전제되어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단계적인 연속성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경험이 갖는 계열에는 수많은 빈틈이 있기 때문에 말과 자연사는 분리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실제 현실의 존재물들은 무질서하게 드러나 있다. 그 이유는 자연이 우연에 의해 혼합됐기 때문이다. 많은 종들이 어려운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고, 이 사건들의 역사적 계열은 생물의 평면에 부과됐다. 이 계열에서 중요한 것은 생물이 아니라 지구이다.
자연사가 과학으로 존재하려면 도표와 격변의 선 사이에 자리해야 한다. 존재물을 도표로 분류하는 ‘생물불변설’과 연속성을 통한 진전을 믿는 ‘진화론’은 적대적인 견해가 아니다. 빈틈없이 짜인 망과 이 망을 혼란시킨 사건들의 계열은 동일한 차원에서 인식론적 기반을 이룬다. 고전주의 시대 자연사와 같은 지식이 이 기반 위에 세워졌다.
6 기형과 화석
초기 진화론적 사유는 살아있는 형태가 획득된 게 아니라 미래의 시점을 향해 나아간다는 관점이다. 이 분석들의 의도는 도표를 연속성의 계열 속에 연결하는 것이다. 이들의 방법론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생물의 연속성과 도표 형태를 통합하는 것이다. 그러면 배열된 모든 생물은 시간에 종속된다. 이는 진화가 첫 번째 요소에서 마지막 요소까지 맞물려 있는 일반적인 변위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샤를 보네의 체계이다. 그는 생물이 신이 만든 가장 완전한 피조물을 향해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진화론은 모든 생물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일반화의 방식이다. 시간은 분류학의 원인이 아니라 하나의 요인이 되고, 다른 모든 변수처럼 미리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체계는 불편성의 신조를 뒤엎는 진화론이 아니라 사진까지 포괄하는 탁시노미아이다. 이런 보네의 주장은 19세기 진화론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시간이 정반대의 역할을 하는 진화론도 있다. 여기서 시간은 종들의 연속적인 망이 형성되는 모든 칸을 나타나게 하고, 특징 표시의 심급이 된다. 현재 생물의 닮음이나 동일성이 나타내는 표지는 자연의 급변을 가로질러 존속하고, 분류표에서의 모든 공란을 채운다. 그러나 시간은 외부 요소의 특징을 나타나게 하는 계기로서만 존재하고, 변수의 모든 가능한 값이 이어지는 선을 드러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생물이 자연을 통해 내부에서 갖는 새로운 특징의 변화 원리를 규명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두 가지 사이에서 선택해야한다. 생물이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생득적 능력을 갖고 있다고 인정하던가, 생물이 완전성을 가진 최종 종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인정해야한다.
첫 번째는 생물이 모든 특징을 연속적 변이에 의해 획득한다. 이는 활성적인 입자들이 모이고 그렇지 않은 입자들이 흩어진 수 많은 작은 차이로 인해 형성된다. 우리 눈에 보이는 종들은 이런 변화들을 어느정도 거진 생물들이다.두 번째는 생물이 단순한 요소들을 조합해 점차 복잡한 존재물 쪽으로 나아간다. 이 원리는 조직화를 절대적으로 지배한다. 수, 크기, 정밀성, 내부 구조에서 나타나는 변이는 무한히 분할되는 종을 낳는다. 그래서 자연의 연속성은 지구에 깊이 파묻혀 있는 원형과 현재 인간 사이에 자리한다. 겉보기에 아무리 기묘해도 결국 본질적으로는 생물의 보편적 차원에 속한다.
생물의 특징을 결정하는 것은 시간도 지속도 아닌 연속이다. 연속은 근본적인 역사의 가시적인 흔적이 아니라 사실상 시간의 조건이다. 연속에 비해 역사는 소극적인 역할만 할 수 있다. 이 때 기형이 필요하게 된다. 한정된 시간이 자연의 연속을 가로질렀다면 수많은 기형이 탄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계열을 통해 연속에서 도표로 다시 내려오기 위해서는 기형의 증식이 필요하다. 기형은 대륙의 변화 때문에 우리에게 포착되지 않았던 연속성을 보증한다. 또한 이렇게 드러난 연속성의 징후는 닮음의 범주에만 속한다. 역사는 유사성 외에 다른 흔적은 어떠한 것도 남기지 않는다. 이런 지형에서 기형과 화석은 둘 다 중요하다. 연속의 힘 안에서 기형은 차이를 보증한다. 화석은 모든 일탈을 가로질러 닮음을 존속하게 한다.
7 자연의 담론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영역에서는 이제 많은 탐구가 행해졌을 것이다. 이것들은 어떤 선험적 여건을 가지고 있다. 이 여건은 경험으로 마름질된 지식의 영역, 즉 인정된 담론을 사물에 행할 수 있는 조건을 확정한 것이다. 18세기의 선험적 조건은 바로 자연사의 존재이다.
자연사는 언어와 동시대적이다. 자연사는 기억 속의 재현들을 분석하고, 공통 요소를 결정하고, 마침내 명사를 부과한다. 서툴게 구축된 언어에는 네 가지 요소(명제, 분절, 지칭, 파생)에 의해 벌어진 틈들이 남는다.
자연사는 이 네 가지 요소가 지켜졌을 때 잘 구축된 언어가 될 수 있다. 언어에서 지칭의 개별 작용은 우연한 파생의 영향을 받는 반면, 자연사가 확립하는 특징은 개체를 표시하는 동시에 일반성들의 공간에 개체를 자리하게 한다. 이 이행은 큰 대가를 요구한다. 자연 언어의 형성은 직접적인 닮음만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분류학이 가능하기 위해선 자연이 실제로 연속적이어야 한다. 분류는 사물들 사이의 사소한 차이라는 원칙을 요구한다.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연속은 언어 이전에 언어의 조건으로 전제되고, 언어 일반의 원인기 된다. 하나의 재현을 통한 상상력으로 다른 재현을 불러들이고, 여기서 보통 명사라는 기호를 붙인다. 상상력은 불분명한 흔적에 지나지 않지만, 자연의 연속성과 의식의 연속성이 합쳐지는 모호한 장소를 형성했다. 따라서 자연의 연속성이 없었다면, 말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연을 지식에 제공하는 것은 명칭의 격자이며, 이 격자는 언어가 스며든 자연만을 가시적이게 만든다. 이제 명칭에 의해 명명된 생물이 생명이 된다. 생명은 분류상의 범주이고, 따라서 경계를 넘나드는 생물들은 애매할 수 밖에 없다. 아직 모호한 생명의 철학을 고전주의 자연사와 결부시켜서는 안된다. 사실 고전주의 시대 자연사는 생물학 혹은 생명보다는 언어의 이론과 교차한다. 자연사는 언어 이전과 이후에 놓이고, 일상 언어를 해체하지만, 일상 언어의 토대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토대의 발견은 자연사를 자기의 기원으로 되돌려주기도 한다. 자연사의 최종 목적은 참된 명칭을 사물에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사를 언어의 공간에 위치시킨다. 고전주의 시대에 이 문제는 닮음의 근거 및 유개념의 실재에 관한 것이다.
18세기 말에는 새로운 지형이 나타난다. 바로 칸트이다. 흄이 닮음에 관한 일반적인 질문을 한 가지로 만든 반면, 칸트는 유사성의 연속적인 바탕 위에서, 다양한 것의 종합이라는 반대 방향의 문제를 나타낸다. 결정적인 문제는 개념에서 판단으로, 명명할 권리에서 귀속의 근거로, 명사의 분절에서 에트르 동사로 옮아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