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1장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 발제 (1122)
삼월
/ 2018-11-22
/ 조회 1,586
첨부파일
관련링크
본문
버틀러는 도덕철학에 대한 질문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동시대의 사회적 틀 안에서 행위와 연관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고려하면서. 가장 먼저 아도르노가 인용된다. 『도덕철학의 문제들』이라는 제목으로 묶이게 된 1963년 여름의 강연에서 아도르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덕적 질문은 도덕적인 행동 규범들이 공동체의 삶에서 자명하고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길 멈출 때 항상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도르노가 여기서 공동의 윤리적 에토스의 파괴를 애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도르노는 집단적 에토스가 언제나 보수적인 에토스이고, 가짜 통일성을 가정한다며 우려한다. 아도르노에게 세계는 통일된 상태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며, 윤리는 억압과 폭력 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두 번째 인용되는 것은 헤겔이다. 헤겔이 보기에, 세계정신이 집단적 관념들에 거주하길 멈춘 뒤에도 그런 관념들의 모습으로 생존하는 윤리나 도덕은 퇴보한 것이다.
아도르노는 집단적 에토스의 지배가 멈췄을 때 도덕적 질문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도덕적 질문은 공통으로 수용된 에토스에 토대해서 발생할 필요가 없다. 또 사람들이 더 이상 집단적 에토스를 공유하지 않을 때, 집단적 에토스는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공통성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강요할 수 있다. 집단적 에토스는 시대착오적일 때 폭력으로 변한다. 집단적 에토스는 지나간 과거가 되길 거부하면서, 현재에 자신을 부과하고 강요한다. 보편성에 대한 요청이 있을 때 아도르노는 윤리학과 폭력을 연관시킨다. 보편적 이해관계와 특수한 이해관계들이 갈라질 때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가 도덕의 문제를 만든다. 보편성에 대한 요청 자체가 개별자의 ‘권리’를 무시하게 되는 상황이 있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모든 격언이나 규칙이 개인들에게 ‘살아있는 방식으로’ 전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도르노의 이론적 틀에 변화를 일으킨 것은 도덕적 탐구 자체의 역사적 가변성이라고, 버틀러는 강조한다. 아도르노는 도덕적 탐구의 필요를 출현시키는 가변적 사회 맥락 안에서 도덕을 고찰했다. 맥락은 질문에 외재적이지 않다. 추상적 보편성이 폭력이라는 아도르노의 비판은 헤겔의 비판과 연결된다. 버틀러는 보편성 자체가 아니라, 문화적 특수성에 반응하는 데 실패한 보편성성의 작동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보편적 교훈이 사회적인 이유로 거부당할 때, 이 교훈은 민주적 논쟁의 주제가 된다. 따라서 민주적 논쟁의 전제조건으로 보편적 교훈의 위상이 필요하지는 않다. 보편성은 정의상 폭력적이지는 않지만, 보편성이 폭력을 자행할 수 있는 조건들이 존재한다. 살아있는 전유가 불가능해진다면, 교훈은 자유와 특수성을 대가로 치르며 강요되는 고통겪기로서만 경험될 수 있다.
아도르노는 “나”가 자신의 사회적 조건에서 분리된 채 이해되고, 순수한 직접성으로 떠받들어지는 실수를 경고한다. 아도르노는 “나” 없이는 어떤 도덕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그렇다면 이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떤 용어로 도덕을 전유하거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가? 아도르노에게 행위와 무관한 도덕이나, 도덕적 규범들에 연루되지 않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자아는 사회적 시간성에 연루되어 있으며, “나”가 들려주는 자기 이야기는 일군의 규범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자신을 출현하게 하는 사회 조건들에 항상 어느 정도 탈취 당한다. 탈취는 도덕적 탐구의 조건, 도덕 자체가 출현하기 위한 조건일 수 있다. “나”는 규범들의 사회적 발생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심사숙고해야 한다. 윤리적 심사숙고는 비판의 작동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비판은 심사숙고하는 주체가 일군의 규범들을 어떻게 살아 내거나 전유하는가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만 생명력을 얻는다.
말걸기의 장면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게 되고, 자신이 했던 일을 설명할 위치를 정하게 되었는지를 기술한다. 정의의 체계 안에서 누군가 고통을 겪을 때 고통을 겪는 이나 그 옹호자는 다른 누군가를 고통의 원인으로 지목하려 한다. 지목은 자아를 원인으로 단정 지으면서, 특수한 양태의 책임감을 만들어낸다. 행위와 결과를 책임지라고 요구받을 때,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설명해야만 입장에 처한다. 정의와 처벌의 체계에 의해 설명가능해지는 존재로 호명되었기에 우리는 설명을 시작한다. 버틀러는, 두려움과 공포 앞에서 우리가 반성적이 되어 도덕적으로 설명 가능해진다는 니체의 견해 이외에 다른 경우를 떠올려보려 한다. 처벌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욕망, 공포에서 유발되지 않은 설명하려는 욕망이 당연히 존재할 수 있다.
“너”와 마주본 상태에서만 자신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는 니체의 견해에 버틀러는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을 통해 질문자가 전제한 관계를 거부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과 다르다. 니체의 관점은 책임을 묻고 수용과 거부를 결정하는 메시지 전달 장면을 완전히 고려하지 않는다. 니체가 기술하는 처벌 체계는 복수에 기초하며, 공격은 삶 전체에서 나타난다. 니체에게 삶은 상해, 공격, 착취, 파괴를 통해 작동하고 사유된다. 사법은 이런 삶의 의지에 제한을 가하는데, 니체는 그 제한이 ‘인간의 미래를 암살하려는 시도’라고 본다. 인간의 공격성은 법 제도 때문에 공격의 방향을 내면으로 돌리고, 양심의 가책으로 내적 세계를 구성하며, 도덕의 이름으로 자신을 공격한다. 자기학대의 모델로 나타난 이런 반성성은 주체의 침전물이다.
푸코는 니체의 영향을 받았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반성성의 출현을 이야기한다. 『성의 역사2: 쾌락의 활용』에서 푸코는 자아가 스스로를 반성과 교화의 대상으로 간주할 때의 조건을 검토한다. 푸코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도덕과의 관계 속에서 주체가 구성되어 가는 방식이다. 초기의 푸코는 주체를 담론의 효과로 다루었지만, 말년에는 주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시 정리한다. 주체는 규범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형성하고, 자기-구성을 일종의 제작으로 드러내며, 자기-제작을 더 방대한 비판이 작동되는 일환으로 확립한다. 푸코의 윤리적 자기-제작은 자기에 대한 작업의 일종인데, 이 작업은 (예속)주체화의 양태 안에서 일어난다. 한계 안에서 기존의 규범들과의 비판적 관계를 유지하며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 푸코가 말하는 자아의 미학(실존의 미학)이다.
푸코에게는 어떤 행동이 도덕적이려면 규칙이나 법, 가치에 순응하는 행위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현실과의 관계, 자아와의 관계를 통해 행동은 도덕적 행동이 될 수 있다. 자기와의 관계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자기-형성이며, 윤리적 주체로서 자신의 형성을 요청하지 않는 도덕적 행동은 없다. 푸코에게 도덕은 창안적이며, 어떤 대가를 치르고 오는 것이다. 버틀러는 푸코의 자기 설명 시도를 분석하면서, 질문을 이어간다. 출현의 조건을 자신이 설명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주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할까? 버틀러는 자기에 대한 지식의 한계를 시인하는 주체형성 이론이 어떻게 윤리와 책임을 개념화하는데 봉사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윤리의 질문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가능성 도식의 한계 안에서 출현한다.
푸코의 주체들
1980년대 푸코의 자기-구성 작업에서 진리 체제는 자기-인정을 가능하게 해줄 용어들을 제공한다. 진리 체제는 존재의 인정 가능한 형식과 인정 가능하지 않은 형식에 대한 규범을 제공하고 미리 강제한다. 진리 체제는 불변이 아니며, 인정을 통치하는 규범은 이 틀과 연관해서 도전을 받고 변형된다. 진리 체제가 주체화를 통치하는 곳에서 진리 체제를 의심한다는 것은 나를 존재론적으로 배치하는 체제를 의심하는 것이다. 여기서 비판은 내가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됨을 의미한다.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을 가능성 자체를 위협한다. 또한 이 의심은 나의 인정가능성을 박탈하는 규범들과 타자들은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를 묻는다. 내가 타자의 존재를 확인하는 규범적 지평은 이렇게 비판적으로 개방된다. 이런 개방은 진리 체제의 한계를 문제 삼는다.
푸코는 이처럼 자아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 덕의 신호가 된다고 주장한다. 누군가를 인정하려는 욕망 혹은 내가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진리 체제에 질문을 제기하는 동기가 된다. “나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윤리적 질문을 제기하자마자 나는 사회적 규범의 영역으로 휘말려든다. 규범의 국면 뿐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을 통한 권력의 문제에도 휘말려든다. 누군가를 인정하려는 욕망,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없었다면 규범과의 싸움에 휘말려들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 욕망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포스트-헤겔적인 질문들
헤겔의 지적에 따르면, 인정은 일방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 버틀러는 타자가 밖에서 발견된다는 헤겔의 견해에서 벗어나 이타성의 견지에서 두 주체의 만남을 가정해보려고 한다. 헤겔이 말하는 주체는 타자를 자신에게 동화시키는 방식으로 인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헤겔이 말하는 타자와의 관계를 탈아성, 즉 자신의 외재성으로 볼 수도 있다. 나는 나 자신에게 타자이고, 나 자신으로의 귀환이 일어나는 어떤 최종적인 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겪는 만남에 의해 항상 변형되며, 당연히 인정의 과정을 통해서도 변형된다. 자아는 자기 내부에 머무르는 게 불가능하고, 우리는 자기 밖에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인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 방향이 상실된 자아들이다. 푸코가 헤겔을 보충하며 이런 질문을 덧붙일 수도 있다. “오늘날의 존재 질서에서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너는 누구인가?”
인정에 가장 중심적인 질문은 “너는 누구인가?”로 전달된다. 한나 아렌트 계열의 카바레로는 철저히 반니체적 방식으로 윤리에 접근하면서, “누구”라는 질문이 이타주의의 가능성을 가진다고 본다. 카바레로는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 개념 안에서 행위의 윤리적 함의를 찾는다. 관계에서 타자에 대한 노출과 취약성이 정치적으로 윤리를 요청한다. 카바레로에게 자아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제기하는 내적 주체가 아니다. 단지 말을 걸 “너”가 있기에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타자에 의존하며, 타자가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타자와 같지 않으며,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인정에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가 이타주의라고 부르는 윤리는 감정이입이나 동일시에서 오지 않으며, 오히려 나와 다른 사람인 너를 욕망하는 데서 온다. 우리는 서로에게 독특함으로 노출되며, 단수성으로 묶여있다.
스스로를 설명하려는 나의 노력이 실패하는 이유는 내가 나의 설명에 말 걸기 때문이고, 나의 설명에 말을 걸면서 너에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조건이 있고, 이야기는 스스로가 가리키고 있는 몸을 포착하지 못하다. 언어 안에서 우리가 규범에 탈취되는 이유는 자신을 설명하는 서사의 구조가 말 걸기의 구조로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뒤늦게 삶을 구성하고, 시작과 전제조건 중 몇 가지를 놓치면서 갑자기 이야기의 한 가운데에서 시작된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설명은 부분적이고, 서사적인 재구성을 향한 노력으로 인해 늘 수정 중이다.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투명성은 존재하고 너에게 나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는 윤리적 실패일까? 버틀러는 다시 한 번 묻는다. “자아”를 조건 짓고 무색하게 만드는 이 관계성이 꼭 있어야 하는 윤리의 출처일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