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 후기] 불교철학_인과因果와 무아無我 :: 0421(토) +2
오라클
/ 2018-04-24
/ 조회 1,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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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과因果] 분석적 인과성과 연기적 인과성
분석적 인과성(독립변수와 종속변수)과 연기적 인과성(초기조건=실제조건)
우리가 아는 통상적인 인과관계가 분석적 인과성이라면, 이와 다른 종류의 인과관계를 의미하는 연기적 인과성이 있다. 분석적 인과성이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사이의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것이라면, 연기적 인과성은 연기적 조건(초기조건, 실제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인과관계를 보는 것이다. 분석적 인과성이 초기조건과 무관하게 성립하는(‘동일한 조건이라면’) 보편적인 인과성을 찾는다면, 연기적 인과성은 초기조건에 따라 인과작용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나비효과는 초기조건의 효과가 애초 변수의 인과관계를 초과하는 차이를 만들어냄을 뜻하며, 연기적 조건이 분석적 인과성을 초과하는 사례이다. 분석적 인과성의 두 변수간의 관계보다, 연기적 인과성의 조건의 차이가 훨씬 더 크개 개입하는 것이다.
분석적 인과성(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연기적 인과성(실제 조건에 따라)
갈릴레오의 자유낙하 법칙은 각각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먼저 분석적 인과성에 따르면,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질량이 다른 물체를 동시에 떨어뜨리면 둘 다 똑같은 시간에 땅에 떨어진다.” 반면 연기적 인과성에 따르면, “모든 물체는 그것이 만나는 조건에 따라 다른 속도로 떨어진다. 아니 떨어지지 않기도 한다.” 즉 낙하의 실제조건(초기조건)인 공기저항(부력)의 차이 때문에 가벼운 게 늦게 떨어진다. 실제에서 공기저항이라는 초기조건은 항상 존재하며, 따라서 ‘공기저항이 없다는’ 가정은 실제에서는 불가능한 가정이다.
분석적 인과성(2개의 변수), 연기적 인과성(무한한 변수)
먼저 분석적 인과성은 두 변수 간의 관계를 ‘정확히’하기 위해, 예측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 변수를 최대한 줄여 둘로 만들어 선형적(직선적) 인과성을 지향한다. 그러나 실제 일어나는 자연현상 가운데 선형적 관계는 찾기 어렵고, 대부분의 현상은 비선형적이기 때문에 정확하기 예측하기 어렵고 동일하게 반복하지 않는다. 반면 연기적 인과성은 연기적 조건이 두 변수 간의 관계에 언제나 더해져야 할 또다른 ‘변수’로 본다. 나아가 연기적 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인을 고려하면, 어떤 사건도 수많은 변수의 연쇄라고 해야 한다.
분석적 인과성(차이없는 반복), 연기적 인과성(차이의 반복) :: 결론적으로 연기적 인과성이 실제(자연)에서의 ‘차이의 반복’을 드러낸다면, 분석적 인과성은 이것을 실험(과학)에서의 ‘차이없는 반복’으로 바꾸어버린다.
분석적 인과성(필연적 인과성), 연기적 인과성(우연적 인과성) :: 따라서 분석적 인과성이 필연적 인과성을 의미한다면, 연기적 인과성은 우연적 인과성을 의미한다. 인과 아닌 인과! 즉 분석적 인과성이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위해 우연성을 제거한다면, 연기적 인과성은 인과관계의 우연성을 위해 필연성을 부정한다.
[2.무아無我] 니체와 무아의 철학
① 자아(잠정적 안정성)와 자아(힘들의 잠정적 중심)
서구철학에서 ‘나 – 자아 – 주체’
① (데카르트) 먼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코기토를 통해 ‘의심하는=생각하는 나 ······> 확고하고 자명한 나의 존재’ 즉 근대적 주체를 확립한다. ② (하이데거) 하지만 하이데거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모든 조건에서 분리되어 고립된 나’란 있을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모든 나, 모든 자아는 그가 속한 세계의 규정 속에 존재한다”고 한다. ③ (현대철학자) 다른 한편, 구조주의 이후의 현대철학자들은 데카르트의 ‘주체’ 개념에 대해 비판하면서, “주체는 어떤 생각이나 행동이 출발하는 불변의 지점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텅빈 자리일 뿐이며, 그 자리를 둘러싼 관계 속에서 채워지는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한다. ④ (심리학자, 뇌과학자) 지금은 심리학자나 뇌과학자들도 “확고한 나 혹은 자아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데, 다중인격장애 환자들처럼 우리 역시 다중인격을 구성하는 상이한 인물들이 하나의 뇌속에 있는 것이다. ⑤ (실존주의자) 결국 원래의 ‘자아나 진정한 나’ 같은 것은 없으며, 실존주의자들의 말처럼 ‘자아를 실현’하려는 것도 의미없는 일이다. 자아는 환경이나 관계 등 외부와의 만남에 의해 그때마다 만들어지는 ‘잠정적인 안정성’을 뜻할 뿐이다.
니체철학에서 ‘자아’
① (힘들의 잠정적 중심) 니체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확고한 주체, 단일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는 우리의 신체는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며, ‘다양한 힘들의 복합체’로 파악한다. 따라서 자아 혹은 주체란 다양한 힘들 가운데 특정한 힘이 우위를 차지할 때 나타나는 ‘힘들의 잠정적 중심’이다. ② (다양한 자아) 오히려 니체는 이렇게 질문한다. “왜 우리는 하나의 자아, 하나의 주체성에 그토록 익숙한가?” 니체적 의미에서 하나의 자아, 하나의 주체성은 ‘힘들의 과소상태’를 표현한다. 반대로 ‘힘들의 과잉상태’ 속에서 다양한 자아가 출현하는데, 하나의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자기를 생성시킨다. 니체의 경우, 다양한 자아를 생성시킴으로써, 다양한 철학을 생산할 수 있었다.
② 무아(자아를 넘어섬)와 위버멘쉬(인간의 자기극복)
무아와 비인칭적 죽음
① (무아) 무아란 ‘본래의 자아, 불변의 자아’ 혹은 ‘참된 나, 진정한 나’ 같은 건 없음을 뜻한다. 그것은 지금의 ‘나’는 특정한 관계(연기적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잠정적인 것이며, 그런 ‘나’의 동일성과 확고함에 대한 믿음이란 허구적인 것임을 가르쳐준다. 자아란 단단해 지는 순간 나를 가두는 벽이 되는데, 무아란 자아의 벽을 반복하여 깨고, 지금의 ‘나’를 반복하여 넘어설 것을 말하는 것이다. ② (비인격적 죽음) 무아란 지금의 내가 죽고 다른 ‘나’가 태어나는 사건이며, 그런 사건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발생하는 죽음을 블랑쇼는 ‘비인칭적 죽음ㆍ비인격적 죽음’이라고 말한다. ‘나, 너, 그’로 특정할 수 없는 내 안의 누군가가 죽는 것이기에 ‘비인칭적 죽음’이라고 한다. 내게 다가온 것 앞에서 나를 채우고 있던 ‘누군가(비인칭적 대명사)’가 죽는 것이다. ③ (자아의 죽음) 무아란 내게 다가오는 어떤 사건들 앞에서 발생하는 비인칭적 죽음을 반복하여 긍정하는 것이다. ‘자아의 죽음’은 무수히 많은 다양한 ‘나’의 탄생이고, 그런 ‘나’들을 거쳐가는 변이의 과정이다. 그 많은 ‘나’를 살기 위해서 나를 비우는 것이다. 보르헤스 “나는 모든 사람이 될 것이다. 즉 나는 죽을 것이다.” 무아를 통찰한 나란 ‘어떤 나’도 나라고 부를 실체가 아님을 알기에, 그 ‘모든 나’가 나임을 수긍하는 나이다. 내가 아닌 나! 또한 ‘어떤 마음’도 마음이 아니기에, ‘모든 마음’을 긍정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무아는 그때마다의 ‘무수한 나, 무상한 나들’에 대한 긍정이다.
니체의 위버멘쉬
① (위버멘쉬) “나는 무한한 잠재성 자체이고, 매번의 실험과 시도를 통해, 매번 새롭게 생성되는 무수한 나를 기다린다. ······ 나는 항상 나로 머물러 있지만, 그것은 항상 다른 내가 되는 방식으로 그랬다.” 니체가 인간의 목표로 설정한 위버멘쉬는 '자기극복으로 정의되는 존재'이다. 니체는 힘들의 배치에 따라 수백명의 자신이 있음을 깨닫고, 수많은 이름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바그너-니체, 쇼펜하우어-니체, 차라투스트라-니체, 결국 디오니소스-니체...... 그런 의미에서 위버멘쉬는 '어떤 고정된 형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나를 시험하는 존재'이다. 이로써 우리는 과거에 나일 수 있었던 수많은 나들, 앞으로 나일 수 있는 수많은 나들에 대해 긍정할 수 있게 된다. ② (영원회귀) 문제는 "하나의 정체성을 해체함으로써, 어떻게 다양한 자기를 생성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매번 죽음으로써 영원히 살아났던' 디오니소스의 형상이고, 영원회귀에 대한 암시이다. 영원회귀는 힘들의 과잉상태에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새로운 자신을 생성시킨 체험의 결과물이다. 이처럼 위버멘쉬는 한번의 결과가 아니라, 자기극복이라는 영원히 반복되는 과정(영원회귀!)이다. (*위버멘쉬-되기야말로 영원회귀의 과정(영원히 되돌아오는 반복의 과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원회귀에 관한 또하나의 주제를 얻게 된다. 무엇이 영원히 돌아오는가? "매순간 새롭게 생성되는 자신만이 영원히 되돌아온다"고. 이때, 영원한 것은 ‘되돌아온다(반복)’의 동일성이고, 회귀되는 것(반복의 결과)은 ‘차이와 다양성’이다.
댓글목록
소소님의 댓글
소소
우리는 종종 의도한 대로 되지 않거나 상대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절망하는 감정을 갖는 것 같아요. 반대로 의도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결과가 나오면 더욱 기쁘거나 행복해 하기도 하고요. 의도한 대로 결과를 바라는 건 분석적 인과로 사고하는 것이겠지요.
무수한 나와 마주하는 무수한 존재들은 내 의도와 무관하게 서로 만나고 생성하고 변화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게 되니 나의 감정도 다 허구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소소에게서 니체와 불교가 아름답게 조우하는 거 같습니다.
공부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이런 경험을 두고 말하는 듯 합니다.
'의도한 대로 결과를 바라는 것은 분석적 인과로 사고하는 것이다.' _소소
나의 욕망대로 행동하고, 타인에 관해서는 - 그 이후에 관해서는 - 결과에 대해서는
마음에 두지 않는 것......! 혹은 마음에 둘 수 없는 것....!
이것이 연기적 인과로 사고하는 것일 테지요.... 삶과 자유에 관해 소소에게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