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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 발제] 불교를 철학하다_3.인과, 4.무아 :: 0421(토)
마시멜로 / 2018-04-28 / 조회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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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 세미나  <불교를 철학하다> 2018_0421/ 마시멜로 

 

 

제3장 나비의 날개를 타고 끼어드는 것

인과: 분석적 인과성과 연기적 인과성

 

1. 인과를 모르면 여우가 된다 (61p~)

‘백장의 여우’라고 하는 공안(화두): 백장스님의 법문을 듣고 해탈한 수행자의 예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 不落因果, 불락인과”고 학인에게 답했다가 과보로 여우 몸을 받아 오백 생을 사는 노인→“인과에 어둡지 않다 不昧因果, 불매인과”는 백장의 대답을 듣고 깨우쳐 여우 몸을 벗고 해탈  

 

인과에 강한 애착을 가진 서구 근대철학

‘인과율’: “모든 결과는 필연적으로 그 원인을 갖는다”- 근대과학, 신학 (62쪽)

결과를, 그것을 야기한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하려는 사유

중세 신학: 핵심원인=‘신’

근대과학: 독립변수(x)→종속변수(Y) Y를 야기하는 요인 중 X가 아닌 요인 제거= X의 효과를 다른 요인의 효과와 ‘분리’하여 포착하여 서술 → ‘분석’= ‘분석적 인과성’

과학: 보편적인 인과법칙을 찾는 것이다. (예: 찻잔의 낙하- 63쪽 상단)

 

※[참고자료] 보편적[普遍的, catholic]: '보편적'이라는 뜻의 영어 catholiccatholic은 헬라어 '카돌리코스'의 음역으로 '전체를 통하여', '일반의', '우주적', '보편적', '공동적'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 낱말은 교회 역사에서 여러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교회용어사전 : 교리 및 신앙, 2013. 9. 16., 생명의말씀사-

 

위대한 수행자라고 해도 이 보편적인 법칙은 달라지지 않는다.… 불교 또한 이런 인과적 필연성을 보라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인과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아니라 인과를 정확히 알도록 가르칠 일이다.

 

연기적 인과성: ‘연기적 조건’- 과학의 ‘초기 조건’ 분석적 인과성이 초기 조건의 차이를 부차적으로 보고 ‘동일한 조건이라면 ceteris paribus’이라는 말로 추상하여 그런 조건과 무관하게 성립하는 보편적인 인과성을 찾고자 한다면, 연기적 인과성은 초기 조건의 차이에 따라 인과의 작용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강조 (~64쪽)

 

2. 나비효과, 혹은 차이의 반복 (65p~)

연기적 인과성 = ‘나비효과’

나비효과: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북경의 나비 날갯짓이 캘리포니아 해안에 폭풍을 만들어낸다”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가 발견: 계산 중 .506127을 반올림 하여 .506 대입하여 새로 계산-> 가령 해수면온도를 0.000127 정도 줄임→ 다른 결과로 귀착)

 

어떤 현상도 반복할 때마다 ‘조건에 따라’달라질 것이다. 

  예) 매번 다른 일출, 장마, 종이 떨어트리기(바람의 영향 등) 

나비효과는 초기 조건의 효과가 애초 변수의 인과관계를 초과하는 차이를 만들어냄을 뜻한다. 연기적 조건이 분석적 인과성을 초과하는 극적인 사례. 두 변수 간의 관계보다 조건의 차이가 훨씬 더 크게 개입.

 

분석적 인과성: 두 변수 간 관계의 보편성을 추구하기 위해 조건의 차이를 최대한 제거- 조건의 동일성 가정. 

갈릴레오의 ‘자유낙하의 법칙’나무토막과 쇠뭉치를 동시에 떨어뜨릴 때 공기의 저항이 없다면 똑같은 시간에 땅에 떨어진다.(실제로는 공기의 저항(초기조건) 때문에 가벼운 게 늦게 떨어짐)- ‘차이의 반복’은 ‘차이 없는 반복’

 

→연기적 인과성: “모든 물체는 그것이 만나는 조건에 따라 다른 속도로 떨어진다. 아니, 떨어지지 않기도 한다.”(물속의 나뭇조각은 물의 저항 때문에 바닥에 닿지 못한다.)

3체 문제: 변수가 셋을 넘어가서 서로 영향을 미치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예: 태양의 주위를 도는 지구의 궤적: 달의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을 계산하면 계산 불가)

= ‘선형적(직선적) 인과성’↔ ‘비선형적 항’: 서로 영향을 작용하는 요인(지구-달)

 

3. 연기적 인과성, 연기적 합리성 (70p~)

통일 후 동독 기업과 공장의 생산성 증대를 위한 50% 해고.

생산량이 그대로라면, 노동생산성은 2배가 된다. 투입량(노동자 수)→산출량(생산량)의 관계만 본다면 극히 ‘합리적’= ‘분석적 합리성’ :자본주의라는 연기적 조건에서만 성립하는 자본주의적 합리성

그러나 해고된 사람들이 굶어죽거나 구걸을 해야만 살 수 있다면, 사회가 실업기금이든 생활보조금이든 다른 비용을 들여 먹여 살려야 한다. (따라서, 100% 생산성 향상은 허구)

 

북경 패스트푸드점에서 쟁반과 쓰레기를 치우려는 글쓴이를 만류하는 후배

“손님이 다 치우면 여기 직원들이 할 일이 없어져서 해고된다.”

사회주의 정부의 분석적 합리성과는 다른 종류의 합리성

 

분석적 인과성: 두 변수 간의 인과관계가 필연적↔연기적 인과성: 필연성 ☓

고생물학자 스티븐 굴드 “생명의 진화과정을 역으로 돌린다면 역사가 똑같이 진행되어 ‘인간’이란 생물이 출현하는 일은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연기적 인과성 안에는 우연성이 필연성 못지않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우가 된 노인이 학인의 질문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던 이유 아닐까?“ 연기적 사유 안에서 그것은 인과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인과에 따라가는 것이니,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분명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백장 스님은 ‘백장의 여우’이야기를 제자인 황벽에게 해준다. 

황벽: 옛사람이 한마디 잘못하여 오백 생 동안 여우 몸을 받았다고 하시는데, 제대로 답했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백장: 알려줄 테니 가까이 오라

황벽:(백장에게 다가가자마자 백장의 뺨을 한 대 후려갈긴다.)

백장: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달마의 수염이 붉다고들 하지만, 여기 붉은 수염의 달마가 있구나!   

   === 이들은 왜 이렇게 했을까? (토론주제)

 

 

 

제4장 내가 죽는 곳에서 만인이 태어나느니…

무아: 비인칭적 죽음과 부모 이전의 ‘나’

 

1. 카게무샤의 눈물 (77p~)

영화 <카게무샤>(구로자와 아키라 감독)

* 카게무샤: 적들의 정탐에 대처하기 위해 성주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내세워 중요한 일을 하도록 만든 ‘무사’

카게무샤 역을 그렇게 끝내고 나온 이 도둑은, 자신이 신겐이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다케다 가문이 몰락하는 마지막 전투에 스스로 뛰어 들어가 그 패배를 지켜보며 마치 자신이 패하고 몰락하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눈물을 흘린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저 사람이 ‘나’라고 한다면, 그 ‘나’는 대체 누구일까?

 

→ 데카르트 ‘내’가 의심하는 한, 의심하는 ‘내’가 존재하는 것은 확고하고 자명함.

그런데 데카르트는 그 ‘나’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는다. ‘나’가 ‘나’임은 자명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물었어야 했던 것은 그 ‘나’가 누구이냐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모든 조건에서 분리되어 고립된 ‘나’란 있을 수 없다고 비판한다. 모든 ‘나’, 모든 ‘자아’란 그가 속한 ‘세계’안에 있는 것이고, 그 세계의 규정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구조주의 이후 현대 철학자들이 데카르트의 ‘주체’개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약간 다른 이유에서다. 주체는 어떤 생각이나 행동이 출발하는 불변의 출발점이 아니라, 그 자체로 텅 빈 자리일 뿐이며, 그걸 둘러싼 관계 속에서 채워지는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뇌과학자: ‘확고한 나’, ‘자아’같은 것은 없다.  예) ‘다중인격장애’ - ‘다중인격’을 구성하는 상이한 인물들이 하나의 뇌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여러 역할을 하며 살 수 있는 것은 여러 패턴의 행동을 할 수 있는 뇌의 잠재성 때문. 반면 내가 하나의 ‘진정하 자아’로 꽉 차 있다면, 우리는 다른 관계, 다른 환겨에서 살아가지 못한다. 이 경우 세상과 불화를 겪을 때마다 어느새 어린 시절의‘나’로 퇴행해버린다.

 

2. 자아가 강하면 빨리 늙는다 (81p~)

 

자아가 형성되는 생후 18~24개월경(거울단계): 자아의 형성은 행동이나 사고에 일정한 패턴이 생성, 사용하지 않는 것을 단절 - 1000조개의 시냅스→ 2/3 시냅스 단절(잠재성 소멸) 예전에 심리학자들은 세 살 정도면 사람의 성격이 확립된다고 믿었다. 사실 우리의 뇌는 지극히 유연하고 가변적이어서 그 이후에도 계속 변화되고 재구성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성격도 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원래의 ‘자아’나 ‘진정한 나’같은 건 없으며, 실존주의자들의 말처럼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려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다. 자아는 환경이나 관계 등 외부와 만나면서 그때마다 만들어지는 잠정적인 안정성을 뜻할 뿐이다.

 

‘자아’의 존재 필요성: 낯선 것에 대한 적응성-일상생활의 편의. 문제는 이런 패턴에 매여버리면, 새로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그 패턴 안에 제약된다는 점. 삶의 가능성이 ‘나’라고 불리는 성격이나 패턴에 갇히게 되는 것. ‘자아’를 확고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이미 형성된 뉴런들의 패턴들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자아의 경계가 유연하고 새로운 상황에 열려 있다면, 뇌와 다른 신체적·정신적 능력을 최대한으로 사용하게 된다.

 

자아가 강한 자=권위적=노인 “시키는 대로 하지, 뭔 말이 이리 많아!”

자아의 유연성 =새로운 경험, 사고능력 확장, 행동의 유연성 = 젊음 

 

3. 수정란도 되기 전의 나 (87p~)

무아란 ‘본래의 자아’나 ‘불변의 자아’, 혹은 ‘참된 나’나 ‘진정한 나’ 같은 건 없음을 뜻한다. 그것은 지금의 ‘나’는 특정한 관계(연기적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잠정적인 것이며, 그런 ‘나’의 동일성과 확고함에 대한 믿음이란 허구적인 것임을 가르쳐준다. 

 

무아란 지금의 내가 죽고 다른 ‘나’가 태어나는 사건이며, 그런 사건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 → 나의 죽음을 동반하는 나의 선택이란 ‘외부’라고 불러 마땅한 그 뜻하지 않은 것과 내가 만나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발생하는 죽음을 블랑쇼는 ‘비인칭적 죽음(비인격적 죽음)’이라고 명명

 

시가 쓰인다는 것은 시가 시인에게 다가왔을 때 그이 안에 있던 ‘누군가’가, 그때까지 시인이 ‘나’라고 불렀을 누군가가 죽는 것이다. 그렇게 죽으면 비워진 자리에 시가 들어가는 것이고, 그의 손을 움직여 글로 쓰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란 나, 너, 그로 특정할 수 없는 이이기에 ‘비인칭’대명사다. 그래서 내 안의 누군가가 죽는 것을 블랑쇼는 ‘비인칭적 죽음’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비인칭적 죽음과 동시에 오는 이 탄생을 ‘비인칭적 탄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란 모두 뜻하지 않은 것과 만나는 사건의 연속 아닌가. 다른 것은 시인과 달리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의 ‘나’의 궤적을 고수하기 위해 그 모든 사건을 밀쳐내며 간다는 점이다. ‘자아의 죽음’은 무수히 많은 다양한 ‘나’의 탄생이고, 그런 ‘나’들을 거쳐 가는 변이의 과정이다. 뒤집어 말하면, 그 많은 ‘나’를 살기 위해서 나를 비우는 것이다.

- 이건희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꿔야 살아남는다” ?

 

무아란 능력의 최대치를 뜻하는 잠재성을 향해 우리의 삶을 ‘거술러’ 올라가는 것이고, 그 잠재적 능력을 통해 다른 ‘나’들로 바꾸어가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급류 위에서 공을 친다.”= “한순간도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 무아의 잠재성은 뇌가 생기기 이전, 수정란으로 거슬러 올라가 마땅하다. 혜능 스님 “부모도 태어나기 전 내 자신의 본래면목이란 대체 무엇인가? 父母未生前 誰是本來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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