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0421 세미나 발제문 <섹슈얼리티의 매춘화>
소리
/ 2018-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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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산업화
1970년 이후로 매매춘은 극적으로 산업화되고 정상화되어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산업화는 전쟁이나 외국 점령 시기에 군대 매춘을 위해 발전하거나, 경제 발전을 위해 외화벌이 수단으로 발전하거나, 수출 지향적 경제 발전으로서 발전하였다.
매매춘의 산업화는 경제가 산업화되기 이전에도 외국 군대나 사업가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번성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경제 구조와 지하 경제에 의해 유지되는데, 이는 모두 막대한 수입을 창출한다. 여러 요인들이 성의 산업화를 가져오지만, 성적 서비스에 대한 ‘구매자의 수요’가 가강 중요한 요인이다. 경제 발전이 전 사회의 물질주의적 수준을 향상시킬수록 여성이 물질적 고소득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 조장되기도 한다. 전쟁 중의 대규모 강간으로 인해 마을과 가족 공동체에서 외면당한 여성들이 포주와 조직 범죄자 집단에 의해 걸려드는 경우도 많다.
"매매춘은 자발적이건 강제적이건 상관없이 전쟁과 정치적 억압과 고문의 시기에 일어나는 성 학대의 한 형태이자 결과이다." p.165
여성에 대한 강간은 적 남성을 모욕하기 위한 군사전략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강간과 포르노그라피, 거기에서 파생한 매매춘은 휴식과 오락의 일종이다. 그러한 군인들 중에 유엔 평화유지군도 마찬가지이다. 전쟁 중에 군인들로부터 마을의 다수의 여성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강제적/자발적으로 매춘을 하는 경우도 있다. (엘살바도르 시민 전쟁 이후에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군인에게 주는 관행의 예) 그렇기 때문에 매매춘은 여성에 대한 중층적인 고문과 억압이 드러나지 않는다.
제3세계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의 성적 수요는 사업가들이나 휴가 중인 군인들이 구매하는 여성들로 가득한 시장을 형성해 왔다. 이들의 대규모 수요에 맞춰 공급은 계속된다. 매매춘의 섹스 서비스를 위해 여성의 대규모 산업화와 더불어 많은 여성 인구가 매매춘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예로 군사적 거점과 휴양지였던 필리핀과 타이의 매매춘과 전쟁 후 폐허 속에서 군대를 위한 매매춘이 발달했던 한국과 베트남이 있다. 그리고 이곳으로 유럽과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타이완에서 섹스관광을 오고 있다.
군대를 위한 매춘 시장: 한국
전쟁 중의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섹스 시장에서의 여성 판매는 아시아의 많은 지역에서 경제 발전 이전부터 일어났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식민지로, 한국 여성을 납치해 위안부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매춘이 산업화되기 시작했다.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여성들 모두가 이 위안부로 소집, 납치되었다. 위안부는 일본 군대가 주둔하는 곳이라면 어디에도 있었다. 위안부는 일본 군대를 위한 이용시설로서 군율 하에 있던 곳이었다.
전쟁 중에 한국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로 이용했던 일본군은 미군 점령기에 미군이 한국 여성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전후 일본에서는 “꽃과 같은 일본 여성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군을 위한 일본인 위안부를 만들기 위해 정부차원에서의 조직이 있었다. 처음에는 일본군을 위해 조직된 위안부는 미군을 위한 군대 매춘으로 변했고, 후에는 일본인 사업가들을 위한 섹스 관광으로 발전했다.
베트남과 전쟁
베트남 전쟁에서는 전쟁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살을 위한 타인종의 타자화, 인종차별이 이뤄졌다. ‘노랑이(gooks)’로서의 베트남 여성들은 노랑이 창녀로서 취급되었을 것이다. 남성들은 대규모 강간을 통해 그들의 적을 모욕했다. 흔히 아시아 전통 국가가 그렇듯이 여성이 강간을 당하면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거나, 결혼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들에게 남은 길은 매매춘뿐이었다. 강간당한 여성은 군사 전략의 피해자이자, 매매춘의 유일한 공급원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많은 군인을 베트남에 보낼수록 매매춘 시장의 수요가 증가했고, 매매춘 시장이 발달하게 되었다.
남성이 돈을 주고 여성을 살 때, 자신의 부인에게는 비밀이라는 점, 종교가 이를 금지한다는 점, 불법이라는 점이 남성들을 유혹한다. 군인들은 군대 매춘을 통한 마을과 가족을 약탈당한 타인종의 여성을 성적으로 비하시키는 것에서 재미를 찾는다. 또한 ‘유색’의 몸을 제공함으로써 손님의 인종 차별주의적 욕구 또한 충족시킨다.
1. 여성의 창녀화와 인종차별 미군이 ‘노랑이’라고 부르며 대상화할 때 베트남 여성들은 성이 거래되지 않아도 창녀로 전락한다. 물론 베트남에서 미군 여성이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위협받는 것은 같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눈에 보이는 미국 여성들의 존재는 처음부터 창녀가 아니었다. 이들은 군사요원, 군인의 부인, 관광객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인종 차별주의는 피지배 인종 집단의 여성이 남성에 의해 강간이나 매춘을 통해서 성 착취를 받는 대상으로 선택될 때, 지배 인종 집단의 여성-백인, 미국여성-을 성 착취로부터 보호해주는 기능을 한다. 인종주의는 성 착취를 통해 좋은 여성과 나쁜 여성의 분리를 유지시킨다. 이때의 좋은 여성과 나쁜 여성은 역시 성녀와 창녀구도, 생식용 여성과 쾌락용 여성의 구분을 뜻한다. 물론 미군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면 여성은 다시 섹스를 위한 몸뚱이로서 위치지어진다.
2. 민족 해방운동과 그 군대
미군과 남베트남 공화국 군과는 반대로 베트남 민족 해방군은 지역 여성에 대한 강간과 매춘을 금하는 엄격한 윤리강령을 갖고 있었다. 남베트남 공화국과 미국의 군대가 거주하는 사이공에서는 매매춘이 번성했고, 북쪽 호치민의 민족 해방군이 통치하는 하노이에는 매매춘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중에 베트남을 비롯한 타이, 필리핀의 여성들이 미군을 위한 매춘 여성으로 동원되었다. 후에는 미국 군인에 의해서 매춘업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매춘부들은 미군 기지의 공식적인 환영을 받았다. 군대 사창가는 기지를 둘러싸고 있는 시설들 이외에서도 출입이 통제되는 매춘지역으로 개발되었다. 미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술집, 마사지 업소, 등등의 매춘업소들이 생겨났다. 매춘을 하는 여성들은 주로 전쟁 중 사별한 여성이나, 버림받은 여성들, 강간 피해자들이었다. 종전 이후 남베트남에서 철군할 때 많은 미군은 북베트남 군으로부터 남메트남의 매춘여성들을 ‘구해’내려고 했다. 왜냐하면 이들을 다시 매춘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여성들을 ‘구해’ 베트남 밖으로 “탈출시켜 주었다.” 함께 떠나기를 거부한 한 매춘여성은 자칭 남편과 함께 베트남인들로 구성된 매춘업소를 운영할 계획이었고, 그의 말에 따르면 남편은 CIA출신이라고 했다.
3. 전후 베트남(사회주의 국가 베트남)과 도이모이
베트남 여성들은 이들이 베트남 여성이기에 미군으로부터 매춘부로 여겨졌고, 강한 거절을 해도 돈으로 자신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어려웠다. 전쟁 후 헤이슬랍의 자서전을 통해 우리는 자발적 매춘과 강요된 매춘의 미세한 차이에 대한 설명을 느낄 수 있다. 매춘은 전쟁 중에 여성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하 일로 당연시 되었지만, 반면에 소녀들이 매매되면 노예제로 간주하였다. 매춘에서의 여성의 선택과 자유의지에 대한 논쟁이 또 시작되었다.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매춘 여성들을 미국을 등에 업은 남베트남 정권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질서의 피해자로 간주하고, 전후 문제해결의 심각한 문제로 성병을 꼽았다. 매춘여성의 성병 치료를 시작했고, 가족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성들은 전통 사회로 돌아갔다. 가족으로 돌아갈 수 없는 여성들은 각 도시의 혁명 정부의 경제적 지원을 통해 만들어진 여성재활학교에 보내져 직업훈련과 정치 강좌, 문화활동 등을 할 수 이게 되었다. 종전 후 이러한 프로그램은 성공적이었다. 전시 매춘여성의 3분의 2가 가족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가난에 찌든 전후 베트남의 많은 여성들이 다시 매춘으로 유입되었다. 재활 프로그램과 사회주의 정부의 금지령(포주 행위 통제, 포르노그라피 금지 등)으로 매매춘이 감소하긴 했지만, 매매춘을 완전히 근절시키지 못했다. 시장경제가 없어도 남성들에 의한 여성의 몸에 대한 수요가 계속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1986년 ‘도이모이’라는 개혁으로 자유시장 경제가 발달하기 시작하자 매매춘은 즉시 증가하였고 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경제 상황이 향상되고 소비가 증가하자 남성들은 남은 여윳돈으로 여성의 몸을 샀다. 도이모이 전에 사이공의 매춘여성은 1만 명으로 줄어들었으나, 1991년에는 1만 명, 1993년에는 5만 명으로 점차 증가하였다. 매매춘이 가속화됨에 따라 빠른 속도로 매매춘은 정상화되었다. 1991년 다시 매춘을 위해 베트남 여성을 타이에 팔아넘기는 일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인신 매매는 캄보디아를 경유하여 이루어지므로 캄보디아에서도 베트남 여성들은 매춘을 하게 되었다. 1만 명의 베트남 여성이 캄보디아에 있고, 이들은 주로 유엔 평화유지군을 상대로 매춘을 하고 있다. 베트남 지도층은 매매춘을 조장하는 상황을 제거하는 일을 버리고 다른 이슈들에 관심을 돌렸다. 전쟁 전이나 후에나 사회주의 지도층은 여성 운동을 반역적인 일로 간주하였다. 여성을 위한 입법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여성 조직, 여성 연맹이 있지만 당 지도부에는 도전하지 않는다. 도이모이 이후 시장 경제의 발전과 함께 여성은 주변화가 되었고, 매매춘이 횡행하게되었다. 베트남 정부는 여성들을 보호하는 프로그램에 재정지원을 하고 있지 않는다. 그러나 1993년의 10대 우선과제 중 하나로 매매춘을 인식하고 있다. 섹스 관광: 군대에서 비즈니스 시장으로 산업화된 대규모 매매춘은 외국 군대에 의해 시작되어 일본, 호주, 유럽, 북아메리카에서 온 사업가와 남성 관광객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섹스 관광과 우편 주문 신부 사업은 군대 매춘을 바탕으로 형성된 두 가지 주요 성 산업이다. 남성을 위한 매춘 시장이 발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의 막강한 경제력과 미국의 아시아 전역에 걸친 대규모 군사적 배치 때문이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로 산업화로 인한 가난한 시골 여성들의 이농현상에 있다. 한국-기생 매춘 1970년대 아시아에서 남성 관광객과 사업가들을 위한 섹스관광이 급증했다. 처음은 타이완이었으나 1972년 일본이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타이완 매춘 관광을 남한의 기생 매춘으로 바꾸었다. 93년 한국에는 대략 1만 8천 명의 매춘여성들이 27개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4만 3천 명의 미군을 상대하고 있다. 군대 매춘과 이후 섹스 관광에 종사하던 한국 여성의 매춘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에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한국 범죄 조직이 미국의 마사지업소 매춘을 위해 한국 여성의 인신 매매를 해외로 확대한 것이다. 1990년에 미국 이민 귀화국은 미군에게 의존하고 있는 미국의 한국 여성들을 미국 범죄 조직에 팔아넘길 목적으로 결혼한 군인들에게 대가로 1만 달러를 준 결혼중개인들을 수사했다. 한국인 여성은 미국에 도착해서 이혼당하고 마사지 업소에 팔려간다. 1980년대 중반 맨해튼에서 매춘 단속이 실시된 후 뉴욕의 한국 마사지 업소 매춘은 1992년 퀸즈로 옮겨갔다. 원래의 기생은 춤추고 노래하는 예술인, 손님을 애인처럼 대해주는 독립적인 여성들을 지칭했다. 그러나 기생은 매춘의 한 종류가 되었다. 1984년 남한에는 8천 명 이상의 기생들이 매춘을 하고 2천 명이 등록되어 한 달에 두 번씩 성병검진을 받으며, 서울에만 30개 이상의 기생집이 있다. 값싼 값의 기생 매춘을 이용하러 일본 사무직 노동자들이 온다. 전통 한복과 이국적인 음식과 술, 숙소 등 무엇이든 팔린다. 1973년 아시아여성 연합은 기생 관광을 중단하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매춘 사업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상품을 팔 시장을 찾는 매춘 알선업체와 외화벌이를 생각하는 정부의 요구에 발 맞춰 동남아시아에 섹스 관광이 싹트고 있었다. 아시아여성연합의 캠페인은 일시적이었으며, 이 나라들에서의 관광은 여전히 일본과 서구 남성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 산업은 점점 수지가 많이 남는 곳으로 이동했다. 타이 타이에서의 매춘 규모는 강간 서건 추정 건수의 패턴을 따른다. 또한 섹스 관광은 타이 고나광 산업에서 외화 벌이의 주된 원천이다. 경찰은 1974년에 타이에 약 40만 명의 매춘 여성이 있다고 했다. 경제적 조건과 자유매춘법으로 인해 독일은 타이 여성 매매의 표적이 되었고, 네덜란드가 매춘을 합법화하자 필리핀이나 타이, 여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네덜란드로 여성매매를 확대시켰다. 1980년대 초반에 타이의 섹스산업은 유럽의 성병에 대한 두려움과 남자 혼자 가는 여행에 대한 비판 여론으로 인해 정부 단속이 잠깐 되었고, 불경기를 맞았다. 1990년대에 타이에서 부정부패가 드러나면서 어린이와 강제적 매매춘에 대해서 단속하게 되었다. 타이의 매춘의 86퍼센트는 내국인에 의한 것이고, 매춘 여성의 2.1퍼센트가 강제로 매춘을 했다고 주장한다. 결국 유럽과 마찬가지로 타이에서도 강제 매춘에 대한 단속은 실질적으로 성 산업을 안정적으로 유지시켜주는 매매춘 정상화의 일부가 되었다. 필리핀 미군의 필리핀 지배 역사는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미군 지배가 공식화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말의 군사 기지 협정을 통해서였다. 역시 필리핀에 주둔하는 미군 기지를 중심으로 매매춘 사업이 확장되었다. 미군과 필리핀 여자 사이에 태어나는 매년 3만명의 아이들이 있다. 이중 1만 명은 거리의 아이들이 된다. 미군이 철수하면서 미군과의 혼혈 아이들 덕분에 받을 수 있었던 의료 혜택과 교육, 양육 지원 등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1992년 11월 24일 미군은 철수했고, 필리핀 정부는 군인 구매자들을 사업가로 대체하려는 관광 경제 발전을 위해 성산업을 재생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었다. 타이에서처럼 필리핀에서도 매매춘은 정상화되었다. 매매춘을 제한하는 어떤 법률도 없기 때문이다. 93년 필리핀에는 30만에서 50만명의 매춘 여성이 있다. 필리핀에서 여자들은 외국인들에게 갈색 피부를 가진 작은 섹스 기계로 선전되며, 3가지로 나뉘어지는 매매춘 계급이 존재한다. 술과 마약은 매춘의 영향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매춘 여성의 대부분이 술과 마약 중독의 위험에 있다. 술집 여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이들이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들인 미군이 돌아와 자신을 아내로 삼고 미국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미군들은 이들에게 연인처럼 대했고 거짓을 약속했다. 이들은 매춘과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희망으로 미국인과의 결혼을 희망한다. 이것은 또 다른 성 산업인 우편 주문 신부의 기반이 된다. 여성 매매: 우편 주문 신부 결혼은 매매춘의 또 다른 모습이다. 매춘 여성은 대개 버림받았거나, 과부이거나, 아내 구타를 피해 다니고 있거나, 가난한 시골에서 결혼하는 것보다 더 나은 기회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여성들은 결혼, 부유한 외국인과의 결혼을 가난과 매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본다. 경제 개발 중에서 많은 전통 사회가 근대화 과정에서 중매혼과 일부다처제를 불법으로 정한다. 반면 서구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서양 남성과 제3세계 여성 사이의 중매 결혼을 주선해 줌으로써 돈을 벌고 있다. 타이와 같은 나라에서 여성을 매매하는 우편주문 신부는 부분적으로 외국인과 결혼하려는 매춘 여성들의 노력에 의해 유지되었다. 우편 주문 신부 산업과 여성 매매는 모두 매춘여성과 가난한 여성, 자신의 나라를 벗어나 외국인과 결혼할 길을 찾고 있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우편 주문 신부 판매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매매춘의 결과로서 중매혼은 또다른 모습이다. 위장된 매매로서 시행되던 중요한 성 산업으로서 시작하였고, 이것이 산업화되어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한게 우편 주문 신부이다. 유럽에서는 타이에서 휴가를 보내며 신부를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슈퍼 섹시 관광’이 신문광고로 났다. 보통 1500~3000달러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남성들의 성 차별적 꿈은 인종 차별적인 모습이다. 이를 노린 홍보는 아시아에 대한 편견과 인종비하적, 차별적 환상을 파는 문구들을 통해, ‘해방된’ 서구 여성들을 대신한 대안으로서 제시된다. 공산주의 진영이 무너지면서 동유럽과 러시아 여성들의 매매가 급증했다. 이민 당국은 이러한 사업을 알지만 모르는 척 한다. 미국 법에 의하면 약혼비자가 발급되려면 3달이 필요하고, 발급 후 여성은 약혼자와 함께 미국으로 여행할 수 있으나 도착 후 90일 이내에 결혼해야 한다. 결혼하지 않으면 90일 이내로 떠나야 한다. 이러한 법의 시간차를 두고 남성들은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결혼하지 않으면, 이민당국이 여성을 국외로 추방해줄 것을 믿고 새 상품을 시험적으로 사용해 볼 수 있게 해준다. 남성을 만족시키지 못한 여성의 상당수가 미국에서 매매춘으로 판매된다. 이 판매는 남성들이 가사 노동과 성적 서비스를 받기 위해 여성들을 사는 매매춘의 한 형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결혼 시장에서의 외국인 배우자, 결혼 매매의 경우에 여성이 결혼 관계를 유지하지 않더라도 미국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는 비자상 조건부 노예 지위를 완화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런 정보는 그들에게 차단된다. 우편 주문 신부 판매는 여자를 부모의 소유물이자 남편의 소유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중매혼의 관행의 토대이다. 그러나 남성의 권리 운동들은 독립적인 서구 여성에 대한 대응으로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국의 남성연대가 한국의 김치녀들에 대항하여 남성 인권을 위해, 외국인 여성(일본인, 동유럽 백인)과 한국 남성의 결혼을 지지하는 광고를 지하철에 띄운 것과 비슷한 생각의 매커니즘) 서구의 성 산업 전개 서구라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진 산업 국가에서 성 산업은 발전했고, 패키지화 되었고, 개발도상국에서 가능하게 된 새로운 시장을 준비했다. 동남아시아의 섹스 관광과 우편 주문 신부 판매를 통해 그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경제체제와는 상관없이 모든 국가에서 매매춘의 정상화 기조가 불었다. 폴란드는 공산당에 의해 포르노그라피가 ‘민주주의의 일부분’이란 설명으로 배포되었고, 어린이 착취에 한에서만 제한하였다. 낙태를 제한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1989년 헝가리에서는 국민의 75%가 매춘의 합법화에 동의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서독 국가의 허가 하에 운영되는 성 산업의 매춘 여성들이 동독으로 유입되었고 성 산업이 발전했다. 성 산업과 조직 범죄, 서유럽의 알선업자들이 동유럽의 여성과 소녀들의 가난 위에서 번성할 때, 서구의 방송 매체는 구 공산주의 국가에서 매매춘의 확산을 성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보도했다. 시장의 측면에서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사람들이 소비할 돈을 벌어들이면서 처음에는 사치품을 후에는 개인적 만족과 권력을 위해 여성을 사는데 돈을 썼다. 산업화된 성 착취 초기 산업화를 통한 여성은 가정에서 시장으로, 지방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과정을 겪는다. 이때 남성에게 유리한 임금 노동으로부터 여성들은 주변화되고, 저임금의 하찮은 직업에 배치되면서 가난과 궁핍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산업화는 빈공의 성별 구조를 영속화시킨다. 수출 자유 지역이 발전하면서 여성 노동력이 싸고 구하기 쉽기 때문에 여성들을 대거 고용한다. 보통 이 구역은 최저 임금 규정과 근로 조건을 지키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들의 노동력으로 경제 개발이 되고, 여성들은 시골의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되지만 웬만한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돈은 아니다. 이마저도 경제 개발이 되면서 수출 자유 지역은 사라진다. 이런 부분을 노리는 이들이 매춘 알선 업자들이다. 매춘은 여성들이 다른 노동으로 벌 수 있는 돈보다 많은 돈을 제공함으로써 여성들을 사들여 매춘에 종사하게 만든다. 많은 수의 여성들이 가난한 시골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 살고 있다. 전통적으로 매매춘은 우선적으로 남성을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개발 계획에 의해 산업화가 시작된 후에 확산된다. 산업화 후에 여성이 더 나은 직업에 종사할 기회가 주어지면 매매춘은 사라질 것으로 가정된다. 그러나 매매춘은 산업화의 결과가 아니다. 산업화는 매매춘의 산업화를 가져온다. 성 산업은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내국인 남성들에 의해 다국적 산업으로 변화된다. 매매춘은 산업화되는 사회에서 개발도상국의 내국인 남성에 의해 유지된다. 경제 개발을 위해, 외화벌이 수단으로서, 여성들을 경제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매춘 산업에 크게 의존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매매춘의 합법화를 호의적으로 바라본다. 여성이 지위를 갖기 위해서는 여성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실체로서, 법적 실체로서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매매춘은 여성을 경제적, 법적 계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한다. 매매춘은 가부장적 가족 구조와 산업 노동력 사이에서 여성들을 싸게 팔아치우는 토대가 된다.